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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이데 전주현 Feb 23. 2024

로마인 보행

23.09.23 23:54 씀

신발을 신을 수도 벗을 수도 있는 땅이 어른의 직립 보행을 받치고 있다. 서른이 넘도록 발가락 열 개에 힘을 고르게 분산시키지 못하는 사람. 그의 발은 ‘사람의 발이라면 이렇게 생겨야지,’ 하는 과학 실험실의 인체 모형도와는 다르게 생겼다. 입체적이긴커녕 평면적이다. 몸 전체 무게를 지탱해야 할 곡선 구조물, 아치가 무너져 있다. 내려앉은 아치라니. 폐허로 남았으나 고대 로마인들의 생활공간을 엿보기엔 안성맞춤인 유적지가 떠오른다. 이름이 포로 로마노(Foro Romano)였던가.


    어른을 받치는 건 땅,
    땅이 붙드는 건 과거의 광휘.
    그렇다면 빛이 비치는 건?


    어른은 인공 돌길이 끝나고 모래사장이 펼쳐진 곳에 멈춰 서서 땅의 경계선을 바라본다. 소금기 어린 바닷바람이 피부를 훑고 지나가기만 할 뿐, 갈매기 소리 한 번 들리지 않는 시간. 지금이야. 어른은 청바지 밑단을 접어 올리려 몸을 웅크린다. 정직하게 숙은 고개. 아침부터 곱게 빗어 놓은 머리카락이 어깨 앞으로 축 늘어 떨어진다. 양 볼을 다독이는 듯한 감촉이 간지럽다. 필시 가느다란 새치 몇 가닥이 섞여 있었으리라.


    바지가 조금 짧아졌을 뿐인데 분위기가 제법 소년 만화의 등장인물 같아졌다. 그 덕에 신이 난 건지 용기가 생긴 건지 어른은 망설임 없이 신발을 벗고 손 끝으로 양말을 죽 잡아당긴다. 두 손으로 무릎을 짚고 일어난다. 7부 바지 차림에 맨 발까지, 앉았다가 일어났을 뿐인데 어른은 잔 주름 많은 소년이 되어 있다.


    신발을 신을 수도 벗을 수도 있는 땅은 이제 신발을 벗고 싶은 땅이 된다.


    소년은 모래사장으로 걸어 들어간다. 평평한 발바닥이 모래와 만나는 게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발가락 사이사이를 간지럼 태우는 모래 알갱이 옆으로 뭉툭해진 유리병 조각, 구멍 난 조개껍질이 나뒹굴고 있다. 신발 신은 어른이 옆에 있었더라면 호들갑을 떨었겠지. 발 다친다. 신발 챙겨라 하면서. 소년은 걷는다. 아랑곳하지 않고. 파도바람만 있고 갈매기 소리 하나 없다. 소년은 걷는다. 계속. 파도소리가 데시벨을 키운다. 발바닥과 만나는 모래가 한껏 촉촉해진다.  


    소년을 받치는 건 모래,
    모래가 받아낸 건 파도.
    그렇다면 파도가 쓸어내고 쓸어간 건?


    소년은 걷는다. 기쁘게, 기쁘게. 바닷물을 미지근하게 머금은 땅은 침착하고 부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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