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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이데 전주현 May 10. 2024

트롤

24.05.10 16:24 씀

세로로 길게 잘린 직사각형의 나무 조각들. 지그재그 배열이 서로의 이음새를 채운다. 튼튼한 갑판을 이룬다. 그 조각조각을 땅따먹기의 한 블록처럼 생각한다. 깨금발을 하며 까르르 뛰어다니는 소리. 멋 모르고 부모 손에 승선한 아이들이다.


사방이 바다다. 아이들은 육지와 가장 비슷한 갑판 위를 놀이터 삼는다. 점심식사 후 매일 갑판 위로 모인다. 땅따먹기를 한다. 그러면서 친해진다. 놀이의 특성상 돌 비슷한 무언가를, 묵직하게 툭 하고 조각 위에 안착할 수 있는 무언가를, 분신처럼 손에 쥐고 있다.


텅 빈 립스틱 통

고무지우개

포장을 벗기지 않은 알사탕

돌처럼 굳은 곡물빵 귀퉁이

공처럼 구긴 객실 안내도

떨어져 나간 머리끈 장식

뜯지 않은 참치 통조림


나는 갑판으로 올라간다. 아이들이 게임 말을 던질 때, 특히 갑판을 내리치는 묵직한 소리가 발바닥 밑을 간지럽힐 때. 목표는 하나다. 갑판 위에 나뒹구는 참치 통조림을 수거하는 것. 날렵하게 참치 통조림을 입에 물고 내뺀다. 나를 쫓아오는 소년의 발소리가 들린다.


"아이 참, 선장!" 주방장의 외동 손자. 소년의 이름은 딥이다. 아이들 중 선주가 손수 지은 내 이름을 불러주는 건 딥뿐이다. 다른 아이들은 일제히 나를 트롤이라 부른다. 내가 통조림을 물어가는 바람에 게임을 망쳤다는 이유 때문이다.


“트롤, 트롤, 먹은 땅, 먹을 땅, 네가 다 헤집었네! 이런 괴물! 몹쓸 괴물!” 노래도 부른다. 그때 딥은 오히려 내 편을 들어준다. “선장, 할아버지가 트롤은 개구쟁이 요정이랬어. 요정이 괴물은 아니잖아? 뚜껑은 꼭 마티 아저씨에게 따달라고 해!” 나는 창고 쪽 계단으로 몸을 감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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