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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색 외출

23.12.15 19:50 씀

by 프로이데 전주현


그날, 하늘은 파랗지 않았다. 무슨 색이었냐고 묻는다면 하늘색이라 답하는 게 제일인 그런 색이었다. 스케치북의 바탕색으로 하늘색 크레파스를 집어든 적이 많았던 사람이라면 아마도 고개를 갸우뚱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늘색은 고정적이지 않다. 하늘색 크레파스 하나로 완성되지 않는다. 하나의 스팩트럼, 한바탕의 그러데이션, 검다가도 노랗고 푸르다가도 보랏빛인 그런 색. 종잡을 수 없이 시간의 변화를 담아내는 그릇과 그 그릇에 담긴 물의 표면. 그게 곧 하늘색이다.


그날, 소녀가 하늘색의 하늘을 올려다 보고서 한 행동이라곤 우산을 챙기는 게 전부였다. 에나멜이 첨가된 검정 구두 한 켤레, 그 안에 들어갈 두 다리를 발톱까지 감싼 회색 타이즈, 무릎을 살짝 덮는 회색 치마와 연분홍 세로줄 셔츠, 회색 조끼에 남색 재킷, 그리고 그 모든 걸 살포시 안아주는 회색 망토 차림에, '다녀오겠습니다' 한 마디 후 나서는 현관문까지. 나머지는 평소 그대로였다.


소녀는 걸을 때마다 망토 안에서 두 팔을 씩씩하게 흔드는 걸 좋아했지만 그날은 그러질 못했다. 오른손으로 노란 장우산을 드느라 왼팔만을 펄럭일 뿐이었다. 평소 소녀는 하던 것을 못하게 될 때마다 괜한 가려움증에 시달렸는데, 그날의 간질간질한 기운은 망토 안에서 얌전히 움직이는 오른팔에 가 닿았다. '오른팔을 흔들지 못해서 왼쪽 길로만 계속 가면 어떡하지. 균형이 맞아야 하는데.'


소녀는 앞뒤 좌우를 살펴보았다. 파랗지 않은 하늘 때문인지, 그와 더불어 세차게 불어대는 바람 때문인지, 지나다니는 사람 한 명 보이질 않았다. 쉽게 가시질 않을 고요함이란 생각에 소녀는 오른손을 앞으로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노란 장우산을 쥔 오른팔을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은 왼팔처럼 세차게 흔들기 시작했다. 누군가 소녀의 뒤를 바짝 쫓아오고 있었더라면 노란 장우산의 휘둘림에 '워워, 조심해야지 꼬마야.' 하고 말해주었겠지.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소녀의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힘찬 걸음걸이에 어울리는 힘찬 팔 동작. 망토 자락이 앞 뒤로 휘휘 움직였다. 장우산의 끄트머리가 바람을 힉힉 갈랐다. 휘힉휘힉. 걸음 소리가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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