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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ony Jun 14. 2019

당신이 불의에 편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https://youtu.be/tbjBSYthRY4


서울대를 자퇴하고 영국에서 학교를 나오신 어느 교수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의 대학교를 떠난 것이 인생 최고의 결정이라는 그는, 자신이 영국, 미국에서 배운 사고방식을 이야기하며 우리가 불의에 편승할 수 밖에 없었던 사회적 배경을 말한다. 그것은 시대가 낳은 괴물이었다. 지난 100년 간, 우리는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것을 목도해왔다. 정의롭고 불의에 대응하는 자는 끝내 비참한 말로를 겪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맥락적으로 사고해야 한다.  시대에서는 그렇게 행동하는 게 옳다고 믿다. 경쟁하고 이겨내라고, 어떻게든 꼭대기층에 올라가야 한다는 어른들의 말씀을 마냥 꼰대라고 치부할 수 없다. 그들에게는 합리적인 사고방식이다. 그러니 부모님의 생각을 비난하지 말자.


하지만 오늘날의 우리는 다르게 행동해야 한다. 당신은 더이상 불의에 편승해서는 안 된다. 이제는 강한 자가 살아남는 시대가 지났다.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


20세기는 결정론적 기계론이 지배하던 시기다. 쉽게 말하면 원인에 따른 결과가 명확했다. 모든 것은 계획적으로 순탄히 진행되었다. 경제개발 n개년 계획과 같이 국가, 혹은 기업의 수뇌부가 모든 것을 결정했다.


하지만 이제는 돈을 쏟아붓는다고 일자리가 생기지 않는다. 더이상 원인을 제공한다고 그에 따른 결과가 찾아오지 않는다. 세상을 지배하는 패러다임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복잡계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살아남기 어렵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복잡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단어 정의는 분야마다 달라서 명확하게 짚을 수 없지만, 마다 공통적으로 다루는 개념이 있다.


복잡계는 확률적으로 극히 낮다고 여기지만 일단 발생하면 어마어마한 파급효과를 낳는 사건이 일어나는 세계다.


1이는 너무 복잡해서 예측할 수 없으며(예측 불가능성)
2. 그렇기 때문에 몇 가지 단순한 이론만으로 설명할 수 없(환원주의적 오류).


가장 대표적인 예시로 "나비 효과"가 있다. 나비의 날갯짓이 지구 반대편에서 태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내용인데, 일반적으로 우리는 사소한 사건이 엄청난 결과를 일으킬 수 있다고 이해한다.

하지만 이 예시에서 방점을 찍어야 할 곳은 다른 데 있다.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일으키기까지 얼마나 많은 변수들이 작용했을까? 옆집 아주머니의 부채질이, 자동차에서 나오는 배기가스가, 당신의 발걸음까지. 우리는 이 모든 걸 찾을 수 있을까?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일으킬 수 있지만, 반대편의 태풍을 보고서 범인이 나비라는 것을 찾아낼 수 없다. 원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요소들 간의 상호작용이 너무나도 복잡해서 결과에서 원인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 복잡계의 핵심이다. 반대 역시 마찬가지다. 원인이 될만한 어떤 현상을 보고서 이것이 결과로 이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예견할 수 없다.

즉, 우리는 그 현상이 복잡계에 놓여있다면 이를 예측할 수도, 그 원인을 파악할 수도 없다. 우리가 운이라고 부르는, 수많은 요소들의 상호작용이 결과를 어떻게 뒤흔들지 아무도 모른다. 설령 우리가 예측해낸들, 그 역시 복잡계가 만들어내는 수만 가지 시나리오 중 극히 낮은 확률로 맞아떨어진, 순전히 운일뿐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살아남는가? 연결이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 연결이 강하다는 말은, 느슨한 유대가 널리 퍼져있다는 뜻이다. 바로 소셜 미디어다.


지금은 Social era다. 아직도 한국은 4차 산업혁명빅데이터, 스마트 팩토리 등 기술적 연결에 대해서 강조하지만, 사실 중요한 요소는 사람과 사람의 연결성이다. 오늘처럼 모르는 사람과 한 순간에 인연을 맺는 시대가 이제껏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사람을 연결해주는 서비스가 혁신을 낳고 있다. 페이스북을 시작으로 에어비앤비, 우버, 리프트, 줌(zoom), 핀터레스트 등 거대한 주목을 받고 있는 기업들은 모두 소셜 시대에 탄생한 결과물이다. 그중 몇몇은 논란을 낳고 있기도 하지만, 본질이 연결에 있음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누군가는 sns가 인생의 낭비라 말하지만, 지금 시대의 흐름은 그와 반대로 흘러가고 있다. 유대가 퍼질수록 블랙 스완이 터질 확률이 증가한다. 언제 어디서 내게 기회가 찾아올지 모른다. 당신은 어느날 갑자기 지구 반대편에서 러브콜을 받을 수도 있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내가 쓴 글이 메인 포털의 상단에 올라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이 like를 눌러줄 수도 있다.


반대로 말하면, 소셜 미디어에서는 내 행동이 모두 드러나기 때문에 부정적인 잭팟이 터질 확률도 그만큼 증가한다. 언제 내 과거의 행동이 내 발목을 잡을지 모른다. 그러니 더더욱 자기를 검열해야 한다. 당신이 불의에 편승하지 말아야 할 결정적인 이유이다.


그 어느 때보다 투명성, 연결성이 강조되는 시대이다. 블록체인, 빅데이터와 같은 기술이 그 단초를 제공하고 있고, 이러한 흐름은 앞으로도 계속 지속될 것이다. 교수님께서 말하는 과학적 방법론적 사고를 가르치는 교육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이러한 연결성을 깨닫게 해주는 게 아닐까.





1. 초연결성은 갑자기 툭 튀어나온 아이가 아니다. 이미 이전부터 인류는 연결에 목매어 왔다. 기술이 그저 단초를 제공했을 뿐, 본질은 기술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있다. 교수님께서 케임브리지 교수에 편지를 보내는 것보다 지금 우리가 이메일로, 혹은 페메로 보내는 게 훨씬 쉬워진 것일 뿐이다.

2. 지속가능성은 선의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이를 굴리는 모델로 미국은 비즈니스를 택했고, 그게 오늘날의 미국을 만들었다. 그러니 주식을 하자(?).

3. 지난 겨울방학, 인턴십을 할 때였다.  스스로 한 약속 하나가 있다면, 질문할 자리가 있으면 반드시 먼저 손을 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전무님에게 사업을 함께할 동료를 어떻게 판별하면 좋을지와 팀 상무님에게 회사가 사원들에게 원하는 창의적인 성과를 위해, 반대로 회사가 어떤 시스템을 제공할 수 있을지를 질문했다.

스스로 약속을 지켜 뿌듯한 마음에 부모님께 말씀드렸더니 걱정부터 하셨다. 회사에서 그러면 안된다고. 부모님의 걱정이 옳았다. 적어도 이 나라에서는. 질문하지 않고, 불의가 있다면 이야기 하지 않고 침묵해야 살아남는게 당연했던 사회의 생각이었다. 기대어 편승하는 자가 이기는 사회가 낳은 결과물이었다.

여전히 나도 내 과외학생에게 대학을, 이왕이면 좋은 곳을 가야하지 않겠냐고 얘기한다. 나조차도 누군가에게 괜찮다고 얘기하지 못한다.

4. 그렇지만 교수님의 주장은 맥락적 관점에서 살펴봐야 한다. 모든 생각이 과학적 사고에 기반되어야 하는가, 를 논한다면 그건 어쩌면 과학만능주의일수도 있다.  과학적 사고가 필요한 영역이 있을테고 그게 적용되지 않는 분야도 분명히 존재한다.  합리성과 팩트에 기반한 과학적 사고방식은 매우 중요하지만, 역사적으로 봤을 때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고 행동에 옮기게 하는 말과 행동은 논리적이고 분석적이지 않았다.

또한, 팩트에 기반한 논리적 사고가 모든 생각의 근간이 되어야 한다는 믿음 역시 과학 철학에서 주장하는 회의적 사고와 어긋난다. 그 생각조차 반례가 있을 수 있음을 회의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과학적 사고는 하나의 방법론으로 다가가야 하지, 그게 절대적 기준이 되어서 생긴게 지난 20세기의 폐해가 아니었나. 철학의 근간은 그 뿌리인 생태적 환경이 좌우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모든 철학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보편적일 수 없다. 교수님의 말씀은 적극적으로 공감하고 지지하지만, 강한 확신은 늘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도 좋은 말씀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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