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적인 삶으로 가는 여정, 사업

나를 위해서가 아닌 남을 위해

by woony



사업을 왜 하고 싶나요?


최근까지만 해도 나를 위해서였다. 돈을 많이 벌고 싶었다. 부자가 되고 싶었으니까. 부자는 어떤 사람인가? 내가 정의하는 부자는 “시도에 제약이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난 아니었다. 돈 때문에 장벽을 마주한 적이 있었다. 군인 시절, 다니던 4년제 학교를 자퇴할 마음을 먹고서 학위가 나오지 않는 디자인 스쿨에 입시를 치뤘다. 하지만 학비가 부담돼 끝까지 도전하지 못했다. 소신대로 선택하지 못했던 지난 날의 경험. 더 이상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껏 가졌던 생각에 파문이 일었다. 아들러 심리학을 다룬 책 <미움받을 용기>에서 철학자는 이야기한다. “당신은 어떤 원인이 있어서 지금의 선택을 한 게 아닙니다. 지금의 선택을 합리화하기 위해 지난 날의 기억을 트라우마라 칭할 뿐입니다.” 돈 때문에 포기한 게 아니었다. 이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나아가기가 두려웠을 뿐이다. 좋은 기업에 취직해 안정적으로 사는 삶에서 벗어나 원하는 것을 하며 살고 싶었지만 겁이 났다. 그렇게 선택했을 때에 따르는 리스크를 감내할 자신이 없었다. 그 두려움을 가리기 위해 돈이라는 핑계를 댔다. 적어도 돈이 많으면 시도에 제약이 없어질 것만 같았다. 합리화했던 지난 날의 내 모습이다.


과연 이 상황에서 돈이 많아지면 소신대로 선택할 수 있을까? 천만에. 그때도 다른 핑곗거리를 찾아 나설 게 뻔하다. 대충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을 테다. “지금 돈 잘 벌고 있는데 무슨 새로운 시도를 하겠어”, “여기서 도전했다가 이제껏 번 돈 다 잃으면 어쩌지?” 본질은 돈이 아니었다. 그 수많은 제약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시도하는 용기에 있었다.


그러면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할까?


사람에게는 두 가지 시선이 있다. 타인에서 출발해 나로 향하는 시선이 그 첫 번째다.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을 부러워한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열등감은 인간이 가지는 본질 중 하나다. 좋은 자극을 주는 외재적 동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잘난 타인의 기준에 맞춰 자신을 바라보게 되는 순간 나는 남이 만든 잣대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좋은 직장, 좋은 차, 좋은 시계. 이런 자극에 따라가면 나는 그들의 기준에 맞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심지어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르는 그 기준으로.


그런데 자기 자신에서 출발해 타인으로 가는 시선도 있다. 나는 누구인지, 무엇을 할때 흥미를 느끼는지, 어떤 걸 좋아하는지 등 외부의 자극을 똑같이 받아도 나의 관점을 잃지 않고 반응한다. 지나간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다가올 미래에 불안해하지 않는다. “지금, 여기”를 살아간다.


나아가 내 테두리를 명확히 인식하고 타인이 감히 침범할 수 없도록 한다. 내가 풀어야 할 과제는 그 어느 누구도 해결해줄 수 없음을 이해한다. 나 역시도 타인의 과제에 감히 감놔라 배놔라 할 자격이 없음을 안다. 이른바 “과제의 분리”다.


사람이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과제의 분리로 시작해 타자공헌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혼자서 살 수 없는 존재다. 싫어도 타인과 교류할 수밖에 없다. 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다. 오히려 먼저 무엇을 줄 수 있는지를 생각한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공헌감”이라는 행복으로 돌아올 테니까. 주체적으로 사는 삶은 그런 거다. 나만의 잣대를 만드는 것에서 출발해 타인을 향한 베풂으로 이어지는 삶.


이제는 누가 물어도 당당히 말할 수 있다. “제가 만든 결과물이 사람들에게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영감을 준다고 믿습니다. 그것이 제게 궁극적으로 행복을 가져다 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제가 정한 기준에 따라 살기 위해 사업을 하고 싶습니다.”


사업은 나를 위해서 하는 게 아니다. 남을 위해서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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