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이 아닌, 또 맞은.
영어를 입에 올리는 순간, 나는 다른 사람이 된다.
한국어 속의 나는 단호할 때는 단호하고, 차분하고, 때로는 유머까지 부릴 수 있는 사람이다.
사회생활을 하고 인생을 잘 살기 위해서는 때와 장소에 맞게 언어를 구사해야 한다.
하지만, 영어를 쓰는 순간 목소리 톤도 달라지도 억양도 달라지도 심지어 성격까지 변해버린다.
마치 유치원생으로 돌아간 듯, 말수가 줄고 단어 하나에도 머뭇거리는 내가 된다.
사실 한국에서도 영어는 어디서나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간판, 광고, 노래, 드라마 속 대사까지, 영어는 이미 익숙한 언어였다. 나 역시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영어를 단 한 번도 빼놓지 않고 배워온 세대이고, 잠깐의 어학연수 경험까지 있었기에 스스로 영어는 제2의 언어라고 믿어왔다.
누군가 '할 줄 아는 외국어가 있냐"라고 물으면 주저 없이 "영어입니다"라고 답해왔다.
그런데 말입니다,....
살면서 영어를 사용할 일이 줄어들다 보니, 영어는 점점 기억 저편으로 밀려났다. 한때 익숙했던 단어도, 문장도 입 밖에 꺼내지 않으면 금세 녹슬어버린다. 어느 순간, 핸드폰 번역기를 뒤적이며 머뭇거리는 내 모습을 마주할 때가 있었다. '지금까지 배운 게 다 무용지물이 되는구나...'라는 자책이 밀려왔고, 심지어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까지 들었다.
회사가 끝난 뒤 지친 몸을 이끌고 영어 공부를 다시 시작하는 건 게으른 내겐 하늘의 별 따기보다도 어려운 일이었다. 퇴근하면 밥조차 챙겨 먹기 귀찮은데, 무슨 수업이고 교재겠는가.(사실은..그저 다 핑계일뿐.)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라는 문구를 수도 없이 보고 들었지만, 정작 나는 준비하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어느 순간 "잘한다, 못한다"조차 애매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의 갑작스러운 영국 취업 소식으로 나는 번개에 콩 볶아 먹듯 영국에 오게 되었다.
모국어보다 영어를 더 많이, 더 자주 써야 하는 삶이 눈앞에 펼쳐졌고 변명도, 핑계도 통하지 않는 현실이었다.
영국에 도착하기 전부터 맞닥뜨린 건 내 영어의 초라한 민낯이었다. 부동산과의 통화, 행정업무를 하면서 나는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되풀이해야 했다.
"Sorry, Could you say that again?"
상대방은 친절하게 다시 말해주었지만, 나는 여전히 놓치고 있었다. 앞으로 이런 순간이 얼마나 더 반복될까 싶으니 앞이 막막했다.
가장 속상한 순간은, 영어를 쓸 때마다 내가 과소평가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였다.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닌데..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게 아닌데....'
속으로 수없이 외쳐도,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단순하고 어설프다. 정작 쓰고 싶은 관용구나 형용사는 머릿속에서 맴돌 뿐, 끝내 입술까지는 닿지 않는다. 그래서 같은 뜻이어도 내 말은 멋을 잃고, 나는 마치 반쪽짜리 사람이 된 듯 초라해졌다.
언어는 결국 그 나라의 역사,문화와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단순히 단어 하나를 배우는 게 아니라, 그 말속에 담긴 사고방식과 예의를 배우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국 사람들은 창문을 열어 달라고 할 때 보통 " Could you open the window?"라고 직설적으로 말한다. 하지만 영국 사람들은 같은 상황에서도 " Would you mind opening the window?"라고 말하는 걸 더 선호한다. 같은 부탁이지만, 한 겹 완충된 쿠션 표현을 씀으로써 상대방과 자신 모두의 체면을 지켜주는 것이다. 그래서 영국을 신사의 나라라고 부르는지도 모르겠다.
(남편은 신사의 나라는 개뿔, 회사에서 일할 때 쓸 때 없이 돌려서 말하는 영국이 너무 싫다고 한다.......)
처음에는 '왜 이렇게 빙 둘러 말하지?'라는 생각이 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안에 담긴 영국식 예의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언어를 배운다는 건 결국 문법이나 발음을 익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역사를 이해하고 그 나라 사람처럼 사고하고 느끼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라는 걸 점점 실감하게 된다.
그래서 생각했다. 지금의 나는 어쩌면 유치원생일지도 모른다. 언어도, 자아도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단계.
그렇다면 앞으로 내가 어떤 환경에 노출되고,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문화를 접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영어 자아가 만들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다. 원어민처럼 완벽하게 말할 수 없다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새 자아를 키워가면 된다. 닮고 싶은 '나만의 롤모델'을 정하고, 그의 톤과 매너를 조금씩 따라가다 보면, 비록 똑같아질 수는 없어도 최소한 비숫하게는 닮을 수 있지 않을까. 설령 어설프더라도, 그 분위기만큼은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언어는 단순한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비추는 거울 같다. 한국어 속의 나는 다 자란 어른이지만, 영어 속의 나는 아직 미완성의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하지만 아이가 자라듯, 이 또 다른 자아도 시간이 흐르면 조금씩 자라날 것이라 믿는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이민이 내게 준 가장 값진 숙제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제는 또 다른 과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현실의 벽.
집은 구했지만, 직장은 아직 없다. 미완성의 영어 자아로 어른들의 사회 속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 시작은, '백수의 차가운 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