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슴이 남기고 간 풍경.

영국의 천국은 여름이 아니라, 가을이다.

by Ste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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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변덕스러운 날씨, 그리고 늘 우산을 들고 다니는 신사의 모습니다.

(사실 한번도 신사가 우산을 들고 다니는 걸 목격한 적은 없다.)

아침부터 비가 내리더니 10분 뒤에는 햇볕이 쨍하고, 그러다 갑자기 바람이 몰아친다.

처음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변하는 하늘이 낯설고 답답했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영국 스러운 일상이라 여겨진다.


가끔은 그런 변덕 끝에 선물 같은 장면이 연출되기도 한다. 소나기가 스쳐간 뒤, 하늘에 거짓말처럼 대형 쌍무지개가 선명하게 걸릴 때. 처음엔 그 선명함이 너무 신기해서 혼자 '빨, 주, 노, 초, 파, 남, 보'를 손가락으로 하나씩 짚어본 적도 있다. 영국의 날씨는 흔히 좋지 않다고들 하지만, 사실 온몸이 젖을 만큼 오래 비가 오는 것도 아니다.

이제는 비가 와도 곧 또 그치겠거니 하고 무덤덤해졌다. 그리고 알게 됐다. 그 지랄 맞은 날씨 뒤에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영국의 진짜 보석 같은 풍경이라는 것을. 나는 최근에서야 그 보석을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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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부쩍 가을이 성큼 찾아왔다는 게 실감이 난다. 온 동네가 초록에서 노랑, 주황, 짙은 빨강으로 물들어 가는 과정이 마치 거대한 그러데이션 같다. 유럽의 나무들은 하나같이 웅장하고 멋져서,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장관을 이룬다. 영국은 한국처럼 도로가 잘 닦여져 있지 않아서 고속도로보다는 국도로 다닐 때가 많은데, 요즘은 차를 타고 달리다 보면 내가 지금 사진 속을 지나고 있는 건지, 아니면 동화 속 한 장면을 걷고 있는 건지 혼란스러울 때도 있다.

풍경에 어울리는 노래를 틀어 아름다운 숲길을 지나가노라면 '황홀하다'라는 단어가 저절로 입밖을 새어 나왔다.


여름과 가을 저녁 산책길에는 예상치 못한 손님들이 찾아온다.

집 앞 골목을 가로지르는 여우, 나무 앞에서 도토리를 씹어 먹는 다람쥐와 청설모, 가지 사이를 뛰어다니며 묘기를 부리는 녀석들. 운이 좋으면 꿩이나 오리, 거위 가족까지도 마주친다.

처음엔 신기하고 무섭기도 해서 숨기도 하고 감탄했지만, 지금은 그저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눈에 담는다.

그들에게도 나는 거대한 괴물처럼 보일지 모르니까.

조용히 그들을 바라보거나 길을 비켜 줄 때면 나도 어느새 그들의 일상이 된 듯한 기분이 썩 좋다.


가장 특별한 순간은 새벽, 강아지와 함께 집 뒤 숲길을 걷는 시간이다. 나는 그 길에 '시크릿 가든'이라는 애칭을 붙였다. 이름처럼 언제나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곳. 그곳에서 사슴과 마주친 적이 있다.

정말 말로만 듣던 크리스마스 엽서에서나 볼법한 몸에 하얀색 점박이 무늬가 있고 뿔이 아주 큰 아름다운 그 사슴!

사슴이 나를 보고 도망치는 찰나, 고작 1초~2초 남짓의 순간이지만 그 짧은 시간이 너무 놀랍도록 아름다웠기에

내 눈동자 속에는 긴 여운이 남아 며칠씩 잔상으로 머물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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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의 삶은 늘 계산기와 씨름하는 전쟁 같았다. 물가와 환율은 숨 쉴 틈 없이 치고 올라왔고, 예상치 못한 지출은 날마다 내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러나, 해가 기울어 붉은 노을이 하늘을 채우는 순간, 그 모든 무게가 신기하게도 가벼워졌다. 마치 자연이 나를 안아 올려 잠시 전쟁터 밖으로 데려다주는 듯했다.


아직 아이는 없지만, 언젠가 우리에게 아기 천사가 찾아와 준다면 나는 그 아이가 내가 매일 눈에 담는 이 풍경을 함께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한국처럼 빠르고 효율적인 세련된 나라는 아니더라도 자연이 늘 곁에 있고, 투박한 공원 벤치에 앉아 다람쥐나 오리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는 그런 삶을 선물하고 싶다.


슬프게도 한국은 전쟁을 겪으며 나무도, 건물도 많이 훼손돼 보전된 것이 드물다. 그 사실이 늘 안타깝고 아프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이민을 온 내게, 잃은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하면서도 단 하나 값지게 얻은 것이 있다면 바로 '자연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다. 나는 그 안에서 자연과 하나 되는 법을 배우고, 잠시나마 자연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됨에 감사한다.


결국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기에 그런 걸까, 사악한 물가와 현실적인 고민 속에서도 황홀한 풍경을 마주 할 때마다 이 나라를 미워하지도, 쉽게 떠나지도 못한다.

자연이 주는 경이로움 앞에서 나는 매번 다시 힘을 얻는다.

그것이 지금 내가 이곳에서 살아가는 이유다.


낯선 땅이 내게 가르쳐준 가장 값진 것은, 스쳐가듯 다가와 오래 마음에 남는 순간들 일지 모른다.

한 장의 오래된 사진처럼, 시간이 지나도 색이 바래지 않는 풍경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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