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월하랑 Sep 14. 2023

작은 언덕을 사이에 두고

사계절 따라 떠나는 정원_여름: 창덕궁 옥류천과 존덕지

창덕궁 후원은 규모가 상당하다. 투어를 시작할 때면 극기훈련을 준비했다는 표현을 하는데, 각오를 단단히 하지 않고 편한 산책을 기대한다면 중간쯤부터 앉아서 쉴 곳만 찾게 된다. 가장 깊숙한 정원, 옥류천은 의외로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 적당한 곳들이 이미 선점되어서 가장 안쪽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간섭받지 않고 편하게 놀기 위한 자리선점이었다. 옥류천을 가기 위해서는 고개를 두어 번 넘어야 한다. 창덕궁 돈화문에서 옥류천까지의 거리는 대략 2킬로가 좀 안된다. 직선거리로는 그렇지만 창덕궁의 전각을 구석구석 보고 한 두 차례 고개를 넘어 옥류천에 도착하면 다시 돌아나가는 것이 걱정된다. 그래서 옥류천에 들어가기 전 내리막을 한번 보고는 고개를 저으며 언덕 위의 취규정에서 쉬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다. 취규정이 있는 언덕을 기준으로 북쪽 아래에 옥류천이 있다면, 반대편 아래에는 존덕지가 있다. 옥류천은 아버지 인조의 정원이고, 존덕지는 아들 소현세자의 정원이다. 옥류천이 구석에 숨어 삶을 향유하고자 했던 정원이라면 존덕지는 밝게 빛나 세상을 비추고자 했던 세자의 정원이었다. 취규정 언덕이 마치 두 사람 사이에 있던 장벽처럼 느껴진다. 



물의 정원


여름이면 비취색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서늘한 옥류천에는 물소리가 옥구슬이 구르는 것처럼 울려 퍼졌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는 나라를 다스리는데 특별한 뜻이 있다기보다, 권력을 누리는 데에 더 열심이었다. 후원에서 뱃놀이를 일삼는 왕에게 나라 밖의 정세가 심상치 않으니 정사를 돌보라고 신하들이 말하자, 눈에 띄지 않는 구석진 곳에 정원을 만든다. 그렇게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불과 몇 달 전 만들어진 정원, 옥류천은 세상과 동떨어진 공간이었다. 옥류천을 고운 시선으로만 보기 어려운 이유는 백성을 위한 지도자이기 전에 권력을 향유하고자 하는 개인의 만든 정원이기 때문이다. 인조는 나라를 살필 시간에 어떻게 하면 구석에 들어가서 향락을 일삼을지를 고민한 왕이었다. 그런 왕을 둔 백성의 삶은 병자호란 이후 황폐해졌다.



소요암逍遙巖 혹은 위이암逶迤巖


비류삼백척 飛流三百尺  산골짜기에 흐르는 물이 삼백 척 높이에서 날아

요락구천래 遙落九天來  구천 아래로 아득히 떨어진다.

간시백홍기 看是白虹起  흰 무지개 일어나는 것을 보며

번성만학뢰 飜成萬壑雷  우레와 같은 소리를 듣는다.

 

옥류천 중심에 있는 바위에는 숙종의 시가 새겨져 있다. 졸졸 흐르며 겨우 1미터 정도 되는 높이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를 두고 우레와 같다고 표현한다. 가만히 살펴보니 자연암처럼 보이는 암석은 인위적으로 깎아 만든 것이다. 자연암 윗부분의 절반을 잘라 반은 산 모양으로, 나머지 반은 평평하게 다듬어 깊은 산과 폭포를 표현했다. 산과 폭포 사이에는 골짜기 같은 곡선형의 물길이 있는데 이곳에 술잔을 띄우고 게임을 즐겼다.


중국의 왕희지가 창안한 유상곡수流觴曲水는 술잔이 물에 둥둥 떠내려가 본인 앞에 다다랐을 때 시 한수를 짓지 못하면 벌칙으로 술을 마시는 게임이다. 그러고 보면 신라 포석정에서 후백제에게 잡힌 경애왕도 병자호란에서 패전한 인조도 모두 유상곡수 놀이를 즐겼다는 공통점이 있다.


동궐도 옥류천


술이 있으면 맛있는 음식이 생각나는 법. 궁에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술 파티를 여는 정원을 만들었으니 부엌이 필수 요소가 돼버렸다. 흥겨운 정원에 부엌이 분위기를 망치지 않도록 취병翠屛으로 둘러쳐놨다. 대나무로 틀을 짠 후, 조릿대 등으로 속을 채운 취병은 비취색 병풍이라는 뜻이다. 식물로 만든 담장은 일반적인 담장보다 분위기를 가볍고 생기있게 만들어준다.


인조가 만든 정원은 어떠한 명분도 없이 지극히 개인적인 향락만을 위해서였다. 인조에게 정원은 국가의 표상일 이유도 없었고 자유롭고자 하는 왕의 이기적인 공간이었다. 이 좁은 공간에 건축물과 지당이 빽빽하다. 지금은 물길이 말라 더 이상 풍부한 물은 흐르지 않고, 정원을 꽉 채웠던 지당은 절반만 남아있다. 원래의 모습이 어땠는지는 동궐도를 보며 상상해 볼 뿐이다. 







달의 정원


존덕정과 관람정



병자호란 패전 후, 소현세자는 청나라 심양 고궁에서 포로로 지낸다. 볼모로 시작한 생활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청나라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다. 소현세자에게 청나라는 더 이상 원수의 나라가 아닌 새로운 문물로 앞선, 배울 것이 많은 나라였다. 8년 간의 볼모 생활을 끝내고 조선에 돌아온 직후, 소현세자는 인조의 옥류천 건너편 아래에 자신의 정원을 만든다. 정원의 중심에는 2층 지붕에 작은 원기둥 3개와 큰 원기둥이 짝을 이루는 중국풍의 존덕정을 짓는다. 존덕정은 심양 고궁의 대정전大政殿의 축소판이었다. 귀국 직후 만든 정원의 중심에 있는 중국풍의 정자는 앞으로 소현세자가 어떤 방향으로 조선을 이끌어나갈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하였다.



심양고궁 대정전


귀국 후, 두 달이 채 안된 어느 날 소현세자가 서거한다. 인조는 갑자기 죽은 아들의 사인을 제대로 알고자 노력하지 않는다. 언덕 아래 아들이 남긴 자취를 인조는 애써 무시한다.


존덕정의 위아래에는 반달과 보름달의 지당이 있다. 반달에서 시작한 지당의 물은 세 개의 방지를 지난 후 보름달로 흐른다. 소현세자는 정원에서 달이 차오르는 하늘의 섭리를 표현하였다. 육각형의 존덕정은 절반은 땅 위에 절반은 물 위에 있다. 존덕정을 기준으로 위쪽에 반달이 아래로는 보름달이 있는 것은 마치 존덕정을 짓기 이전의 자신은 반쪽짜리 왕이었지만 존덕정 이후, 모두가 우러러보는 보름달 같은 왕으로 거듭날 것을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선을 발전시킬 포부를 품었던 미래의 왕은 보름달이 뜨기도 전에 허망하게 가버린다.



개인이기 전에 국가의 왕이고자 했던 소현세자를 국가의 수반이기 이전에 개인이고자 했던 아버지는 못마땅해했다. 자신을 위한 복수심을 불태워줄 것을 바랐던 아버지는 나라를 위해 고심하는 아들이 괘씸할 뿐이었다. 언덕을 사이에 두고 왕과 왕위를 물려받을 아들은 다른 세상에 살았다. 달을 닮고자 했던 이의 정원과 술잔이나 담고자 했던 이의 정원, 존덕지와 옥류천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