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 따라 떠나는 정원_여름: 창덕궁 옥류천과 존덕지
창덕궁 후원은 규모가 상당하다. 투어를 시작할 때면 극기훈련을 준비했다는 표현을 하는데, 각오를 단단히 하지 않고 편한 산책을 기대한다면 중간쯤부터 앉아서 쉴 곳만 찾게 된다. 가장 깊숙한 정원, 옥류천은 의외로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 적당한 곳들이 이미 선점되어서 가장 안쪽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간섭받지 않고 편하게 놀기 위해서였다. 옥류천을 가기 위해서는 고개를 두어 번 넘어야 한다. 창덕궁 돈화문에서 옥류천까지의 거리는 대략 2킬로가 좀 안된다. 직선거리로는 그렇지만 창덕궁의 전각을 구석구석 보고 한 두 차례 고개를 넘어 옥류천에 도착하면 다시 돌아나가는 것이 걱정된다. 그래서 옥류천에 들어가기 전 내리막을 한번 보고는 고개를 저으며 언덕 위의 취규정에서 쉬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다. 취규정이 있는 언덕을 기준으로 북쪽 아래에 옥류천이 있다면, 반대편 아래에는 존덕지가 있다. 옥류천은 아버지 인조의 정원이고, 존덕지는 아들 소현세자의 정원이다. 옥류천이 구석에 숨어 삶을 향유하고자 했던 정원이라면 존덕지는 밝게 빛나 세상을 비추고자 했던 세자의 정원이었다. 취규정 언덕이 마치 두 사람 사이에 있던 장벽처럼 느껴진다.
여름이면 비취색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서늘한 옥류천에는 물소리가 옥구슬이 구르는 것처럼 울려 퍼졌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는 나라를 다스리는데 특별한 뜻이 있다기보다, 권력을 누리는 데에 더 열심이었다. 나라 밖의 정세가 심상치 않으니 정사를 돌보라는 신하들의 말을 후원에서 뱃놀이를 일삼는 왕은 귀찮아할 뿐이었다. 그렇게 궁 가장 안쪽,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정원이 만들어진다. 옥류천은 세상과 동떨어진 공간이었다. 옥류천을 고운 시선으로만 보기 어려운 이유는 백성을 위한 지도자이기 전에 권력을 향유하고자 하는 개인의 만든 정원이기 때문이다. 인조는 나라를 살필 시간에 어떻게 하면 구석에 들어가서 향락을 일삼을지를 고민한 왕이었다.
정원을 만든 의도는 괘씸하지만, 많은 걸음으로 지친 다리를 보상해 줄 만큼 볼거리가 많다. 창덕궁 후원에서 옥류천 정원만큼 왕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의무와 책임은 뒤로한 채, 절대 권력자로서의 권한을 누리는 것에만 집중한 정원은 없다. 정원의 중심에는 육중한 자연암석, 소요암이 있다. 자연 바위로 보이는 소요암은 자세히 살펴보면 인위적으로 깎아 만든 작품이다. 얼굴이라 할만한 면석의 중앙에는 옥류천의 정체성을 알려주는 시가 새겨져 있고, 그 앞으로는 마치 무대 같은 평평한 판이 있다. 판에 인위적으로 새겨 만든 감아도는 물길은 폭포가 되어 떨어진다. 뫼 산자 모양의 면석, 그리고 판돌과 면석 사이에 정리된 깔끔한 라인, 폭포가 되어 떨어지는 절벽의 수직면까지 모두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다. 큰 공을 들여 만든 소요암은 술놀이를 위해 특별히 자체 제작한 것이다. 중국 동진시대부터 시작된 유상곡수라는 술놀이는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차례가 된 사람이 자신의 앞에 잔이 도착하기 전까지 시를 한수 짓지 못하면 벌칙으로 술을 마시는 게임이다. 소요암 옆, 한쪽 구석에는 취병으로 공간 구분을 해놓은 부엌이 있다. 술이 있는 곳에 맛있는 음식이 빠질 수 없었을 것이다. 인조가 술판을 벌이기 위해 옥류천을 만든 것은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불과 몇 달 전이었다. 그렇게 나라는 패전하고 백성들의 삶은 고달파지게 된다.
병자호란 패전 후,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는 청나라 심양 고궁에 포로로 잡혀간다. 볼모 생활이었지만, 소현세자는 좋은 대접을 받으며 청나라를 살펴볼 수 있었다. 소현세자에게 새로운 문물로 앞선 나라가 보였다. 어느덧 청나라는 더 이상 원수의 나라가 아닌 배울 것이 많은 나라가 되어 있었다. 8년 간의 볼모 생활을 끝내고 조선에 돌아온 직후, 소현세자는 옥류천 반대편에 자신의 정원을 만든다. 정원의 중심에는 2층 지붕에 작은 원기둥 3개와 큰 원기둥이 짝을 이루는 중국풍의 존덕정을 짓는다. 존덕정은 심양 고궁에서 자신을 위한 연회가 열렸던 대정전의 축소판이었다. 귀국 직후 만든 정원의 중심에 있는 중국풍의 정자는 청나라에 대한 소현세자의 입장이 어떠한지, 미래의 왕이 앞으로 두 나라의 관계를 어떻게 할 생각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하였다. 하지만 귀국 후, 두 달이 채 안된 어느 날 소현세자가 서거한다. 아들이 갑자기 죽었는데도 인조는 사인을 제대로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언덕 아래 아들이 남긴 정원은 그렇게 제대로 꽃 피워보지도 못하고 잠들어 버린다.
존덕정의 위아래에는 여러 개의 지당이 있다. 반달에서 시작한 지당의 물은 세 개의 방지를 지난 후 보름달로 흐른다. 소현세자의 정원은 달이 차오르는 하늘의 섭리를 표현하는듯하다. 육각형의 존덕정은 절반은 땅 위에 절반은 물 위에 있다. 정확히 절반을 물 위와 땅 위에 앉도록 존덕정을 지은 것은 특별한 메시지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존덕정을 기준으로 위쪽에 반달이 아래로는 보름달이 있는 것은 마치 존덕정을 짓기 이전의 자신은 반쪽짜리 왕이었지만 존덕정 이후, 모두가 우러러보는 보름달 같은 왕으로 거듭날 것을 표현한 것 같다. 하지만 조선을 발전시킬 포부를 품었던 미래의 왕은 보름달이 뜨기도 전에 허망하게 가버렸다.
개인이기 전에 국가의 왕이고자 했던 소현세자를 국가의 수반이기 이전에 개인이고자 했던 아버지는 못마땅해했다. 자신을 위한 복수심을 불태워줄 것을 바랐던 아버지는 나라를 위해 고심하는 아들이 괘씸할 뿐이었다. 언덕을 사이에 두고 왕과 왕위를 물려받을 아들은 다른 세상에 살았다. 달을 닮고자 했던 이의 정원과 술잔이나 담고자 했던 이의 정원, 존덕지와 옥류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