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윤희 Jun 10. 2019

01. 볼 빨간 부녀의 우리 술 여행

아빠, 우리 둘이 여행 갈래요?

01. 볼 빨간 부녀의 우리 술 여행

아빠, 우리 둘이 여행 갈래요?



아빠와 단둘이 여행을 하고 싶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아빠와 오붓하게 추억을 쌓겠는가 싶기도 했고, 늘 젊고 강하게만 보이던 아빠가 아저씨에서 할아버지가 되어가는 모습을 보니 더 늦기 전에 여행을 해야겠지 싶었다. 마음먹기만 했을 뿐, 여행은 쉽지 않았다.


대학 졸업과 취업 걱정에, 취업을 하니 이직과 퇴사에, 이런저런 먼지 자국처럼 불투명한 고민들로 시간이 흐르는 줄 몰랐다. 늘 내가 우선이고 핑계가 하나둘 늘었다. 그러던 내가 아빠를 마주한 건 작년, <오늘은 수제맥주> 책을 출간할 때 즈음이다.



몇 해 전, 나는 퇴사를, 아버지는 정년 퇴임을 하고 한 달간 둘이 지낸 적이 있다. 자발적으로 일자리를 포기한 터라 눈치가 보였다. 생각 없이 지내는 듯 보이는 딸이 마음에 안 드셨는지 아버지는 하나둘 참견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오래된 앨범을 꺼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셨다. 뭘 이런 걸 보냐며 무심하게 대꾸했지만 마냥 싫지는 않았다. 그즈음 나는 아버지가 대화를 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았다. 아버지는 노는 법도, 딸과 대화하는 법도 서툴렀다. 그랬다. 아버지는 평생 일만 했던, 쉴 줄도 모르는 우리 시대의 ‘아빠’였다. 졸지에 무정한 딸이 버렸지만, 다행인 것은 한 달 동안 아빠와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는 사실이다. 처음으로 옥신각신 다투기도 했다. 그 기억이 새삼 따뜻하게 떠오른다. -114 페이지, 오늘은 수제맥주, 레비 브루잉 컴퍼니 중



2014년, 두 번째 직장을 퇴사하고 아빠와 단둘이 보낸 시간을 보냈다. 고작 한 달이었지만 강렬한 추억이었다. 지금껏 아빠와 그리도 대화도 말다툼도 한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곁에 있다 보니 속상한 대화들이 오고 갔다.


대화의 마무리는 결국 나의 이직으로 끝이 났지만, 퇴임 후 텅 빈 자유시간을 보내야 할지 난감한 아빠의 뒷모습을 보았다. (부녀가 백수가 되자, 대상포진으로 앓아누운 엄마의 뒷모습도 보았다) 뭔지 모를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새로운 일을 찾았고, 다시 일상에 치이며 아빠를 잊고 지냈다. 그러다 고단한 퇴근길에 맥주 한잔이 두 잔 되고 세 잔이 되어갔다.


뭐든 빠져들면 끝장을 보는 탓에 주말에 맥주학교를 다니고, 전국 수제맥주 양조장을 찾아 여행을 떠났다. 회사에 다니면서 여행을 하며 글을 쓰고 책을 준비했다. 이러한 나의 도전은 가족들은 코웃음 치며 어디까지 하나 보자 눈치였다. 그중 유일하게 나를 응원해 준 이는 아빠였다.


생각해보면, 아빠의 응원은 그리 특별하진 않았던 것 같다. 35년간 군인으로 근무하신 아빠는 늘 바빴다. 매일 군복을 입고 이른 새벽에 출근하는 아빠는 출장과 훈련이 일상의 연속이었다.


정해진 규칙 안에서 사는 법이 삶의 정석이라 믿으셨다. 누구보다 듬직하고 보수적이신 분이었지만, 나만큼 술을 좋아했고, 평소 PX(군부대 매점)에서 딸이 좋아하는 맥주 한 박스씩 사 오셨다. 직업군인으로 오랜 기간 일해서였을까? 맥주 따라 전국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나를 보며 부러운 눈치셨다.


2018년 1월, 세 번째 직장 퇴사 후, 본격적으로 못다 한 브루어리 취재를 바쁘게 다닐 때였다. 평소보다 여유로워지니 아빠에게 눈길이 갔다.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또다시 우리 둘 뿐이었다. 2014년 4월, 그때가 생각났다.


가볍게 아빠에게 여쭸다. ‘아빠, 나 양조장 취재 가는데 같이 갈래요? 바람도 쐬고 여행도 하면서 말이에요.’ 아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리셨다. 그렇게 아빠와의 첫 여행이 시작되었다.


아빠와의 첫 양조장 여행은 2018년 1월, 인천 칼리가리 브루잉이었다. 취재 후 종종 캔맥주로 들고 갔던 수제맥주 맛을 아빠가 차츰 알아갈 무렵이었다.


함께 브루어리 투어를 하니, 양조장을 호기심 어린아이처럼 둘러보시기 여념이 없으셨다. 평소 소주를 즐겨 마시던 아빠에게 수제맥주는 독특하고 신기한 술이었나 보다. 무엇보다 수제맥주를 만드는 양조사들의 이야기를 함께 들으며 좀처럼 대화가 없던 우리 사이가 화기애애 해졌다. ‘술’이라는 주제 하나로 여행 내내 수다를 떨었다. 그렇게 취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아빠와 함께 우리 술 양조장 여행을 해볼까?





아빠와의 우리 술 여행 도전!


아빠와 나는 동상이'술', 서로 다른 술 취향을 가지고 있다. 아빠는 증류주 파다. 높은 도수의 맑은 소주를 좋아하고, 나는 맥주와 낮은 도수의 약주와 막걸리를 마시는 편이다. 평소 아빠와의 한상차림에서도 늘 술은 두 병이 놓였다. 늘 상 ‘나랑 안 맞아’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그 생각이 단번에 깨졌다.


‘서로 좋아하는 술이 다르니, 함께 여행하면 모든 술을 골고루 시음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이야깃거리가 풍성해지겠는데?! ‘라고 말이다. 뭔가 예감이 좋았다. 아빠만 오케이 하면 일사천리로 진행될 일이었다. 여행하자고 제안했을 때, 아빠의 대답은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예스’였다.


여행하기 위해서는 탄탄한 준비와 지식도 필요한 법. 수제맥주를 제법 안다고 생각했지만, 우리 술은 아는 게 많이 없었다. 먼저 공부를 하면 좋겠는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막막할 때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함께 여행 매거진 트래비에 글을 쓰는 김정흠 작가였다. 출장 때마다 우리 술을 소개하는 ‘말술남녀’ 팟캐스트를 즐겨 듣는다는 그가 딱 맞다 싶었다. 그렇게 우리 부녀의 여행에 정흠 작가가 사진 촬영을 해 주면서 본격적인 ‘볼 빨간 부녀 우리 술 여행’이 시작되었다.



글 오윤희

전국 방방곡곡 우리 술 양조장을 탐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제맥주 여행에도 함께하곤 했던 ‘볼 빨간’ 동행, 아빠를 벗 삼아 말이죠. 인스타그램 sool_and_journey


사진 김정흠

일상처럼 여행하고, 여행하듯 일상을 살아갑니다. 아빠와 딸이 우리 술을 찾아 전국을 누빈다기에 염치없이 술잔 하나 얹었습니다. 사진을 핑계로. 인스타그램 sunset.kim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