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윤희 Sep 27. 2019

16. 아빠의 사랑을 떠오르게 하는 우리 술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양조장,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양조장



16. 아빠의 사랑을 떠오르게 하는 우리 술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양조장,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양조장



직업 군인이셨던 아빠는 늘 부지런하셨다. 그런 부지런함이 좋을 때도 있었지만, 힘들 때가 더 많았다. 내가 어른이 되어 독립을 하게 된 가장 큰 이유도 바로 아빠의 그 ‘부지런함’ 때문이었다. 주중이나 주말이나 지금도 아빠의 기상 시간은 새벽 5시 무렵. 아직은 고요한 시간에 거실에서 아빠가 출근을 준비하는 부스럭거리던 소리에 잠을 깨기 일쑤였다.


주말에도 게으름을 용서치 않았던 아빠는 늦잠 자는 나를 깨웠다. 아빠의 부지런함은 청소까지 이어졌다. 긴 머리를 말리고 드라이를 하고 나오면, 대기하고 계시다 머리카락을 치우셨다. 어질러진 내 방을 보고는 잔소리를 하며 걸레를 들고 닦기 시작했다.


아빠는 다림질의 고수이기도 하셨다. 지금은 웃을 수 있지만, 가슴 아픈 사연 하나가 있다. 월급을 받아 오랜만에 쇼핑했던 나는 비싼 정장 바지를 구입했었다. 기분 좋게 옷걸이에 걸어 두었는데, 다음 날 아침 경악을 금치 못했다. 출근하는 딸을 위해 정장 바지를 군복처럼 무릎선에 맞춰 칼 다림질을 해두신 것이다.


누가 여자 바지에 앞 주름선을 내놓던가 말인가? 결국 나는 그 바지를 한 번도 입지 못하고 하염없이 엉엉 울기만 했다. 아빠는 바느질도 고수였다. 학창 시절 바느질 과제는 늘 아빠 몫이었다. 엄마보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손재주가 없는 나를 도와 척척 바느질을 해 주시곤 했다. 든든한 살림꾼인 아빠 덕에 부족함 없이 자라났다.



충청북도 단양군에는 아빠의 바느질을 추억하게 하는 양조장이 있다. 4대째 가업을 이어오며 100여 년간 술을 빚고 있는 대강양조장이다. 양조장에 들어서자 아빠의 시선이 술 항아리에 고정됐다. 둘이서 가만히 들여다보니, 항아리에 굵직하게 꿰맨 흔적이다.



“이 자국들은 뭐다냐?” 의아한 표정의 우리에게 조재구 대표가 말했다. “옛날에는 워낙 항아리가 귀해서 꿰매 썼어요. 항아리를 꿰매는 기술자도 있었죠. 지금은 다 사라졌지만요” 숨 쉬는 옹기 항아리 안에는 바느질로 생명을 연장한 채, 지금까지 굳건히 양조장을 지키고 있다.



대강양조장은 100여 년 가까이 소백산 지하 암반 지하수로 빚었다는 술을 빚고 있다. 맑은 물로 빚어지는 술은 생막걸리, 검은콩막걸리, 복분자막걸리, 오곡진상주, 소백산신선주, 청동동주. 그중 오곡진상주가 청와대에 납품된 술이다.



이 술은 쌀, 밀, 옥수수, 보리, 조, 다섯 가지 곡물이 들어가 고소하고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신선주는 이름처럼 신선들이 마시는 술이라는 뜻한다. 아홉 가지 약재(신선초, 당귀, 고본, 구기자, 천궁, 솔잎, 인삼, 대추, 음양곽)가 들어간 그야말로 ‘약주’다.



신선주와 청동동주는 씁쓸한 맛에 향이 짙어 아빠 또래 중년들이 좋아한단다. 대추를 넣은 청동동주는 2주 정도 숙성하는 보통 막걸리의 2배, 한 달 이상 숙성을 거쳐 정성스레 만들어진다. 내 눈을 사로잡은 막걸리는 색만큼이나 맛도 새콤한 복분자막걸리로 여성들에게 인기 만점인 술이다.



우리 술에 추억을 곁들이고 싶다면, 양조장 바로 옆에 위치한 체험관을 방문해 보면 좋다. 대강양조장의 역사와 더불어 우리 술의 역사까지 고루 소개되어 남녀노소 공감하고 또 옛 추억을 회상하기 제격이다. 금고, 수첩, 입국 상자, 막걸리 통, 주판, 장부 등 예스러움이 가득한 체험관의 모든 소품들은 대강양조장의 보물이자 살아 있는 유산이다.




대강양조장을 나서는 길, 아빠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로 웃음꽃이 피웠다. 가끔 다림질 같은 슬픈 기억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즐거운 추억으로 남길 수 있는 여행길을 아빠와 함께라서 참 좋다.



올봄, 나의 임신 소식을 접한 후로는 아빠와 부쩍 대화가 많아졌다.  매일 밤 내 건강을 위해 기도를 한다는 아빠의 사랑을 온전히 느끼고 있는 요즈음이다. 결혼을 하고 나니 아빠가 짊어졌던 지난날의 시간들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당연하게만 생각했던 아빠의 든든한 지원이 알고 보니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막걸리 마니아들 사이에 ‘송막’이라는 별칭으로 사랑받는 막걸리가 있다. 바로 식품명인 48호이자 무형문화재 6-3호 송명섭 명인의 이른바 ‘송명섭 막걸리’다. 2014년 찾아가는 양조장이 된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합동주조장에서 만난 송 명인은 오랫동안 술을 대하는 그의 철학을 일러 주었다.



막걸리의 원재료인 효모와 누룩에 충실하면 좋은 술이 되지만, 여기에 사랑이 없으면 술이 되지 않는다 말이다. 이 말을 여러 번 거듭 강조했다. 역시 ‘송막’이라 불리며 많은 이들의 마음을 훔쳐 간 술의 매력이 다른 아닌 ‘사랑’이었음을 알게 된 순간이다.


명인 자신의 이름을 딴 송명섭 막걸리는 쌀 100%, 전통 누룩과 물, 그리고 사랑으로 만들어진 6도 막걸리로, 탁하면서 드라이 맛이 일품인 술이다. ‘죽력고’ 역시 태안합동주조장에서만 맛볼 수 있는 귀한 술이다.



송명섭 명인이 만든 또 다른 술, 죽력고는 집안 대대 4대째 이어진 양조 비법이 농축된 증류주로, 숯불 위에 올려 뽑아낸 액을 소주에 섞어 만든 32도수 술이다. 조선 3대 명주 중 하나인 죽력고는 들어간 정성만큼 효능도 좋다.


매천 황현이 쓴 <오하기문(梧下記聞)>에 따르면 전봉준이 죽력고를 마시고 기운을 차렸다는 일화에 이어 실제로 송 명인의 부친도 중풍을 앓고도 죽력고로 건강을 지켰다고 일러 주신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해가 지고 달이 뜨는 저녁이 되었다. 송 명인은 “이제 아버지랑 딸이랑 맛있는 밥 한 끼 하러 갈까요?”라며 선뜻 식사 제안을 한다. 그러고 보니 송명섭 막걸리의 맛은 송 명인을 꼭 빼닮았다. 털털하면서도 소박하고 고졸하다. 거기다 더에 우리 술을 사랑하는 한 아빠이자 장인의 사랑까지 말이다.



글 오윤희

전국 방방곡곡 우리 술 양조장을 탐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제 맥주 여행에도 함께하곤 했던 ‘볼 빨간’ 동행, 아빠를 벗 삼아 말이죠. 인스타그램 sool_and_journey


사진 김정흠

일상처럼 여행하고, 여행하듯 일상을 살아갑니다. 아빠와 딸이 우리 술을 찾아 전국을 누빈다기에 염치없이 술잔 하나 얹었습니다. 사진을 핑계로. 인스타그램 sunset.kim




대강양조장


주소: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대강로 60  
오픈: 10:00~22:00(연중무휴)
전화: 043 422 0077  
홈페이지: www.krwine.com  




태인양조장


주소: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오픈: 09:00~18:00(주말 전화문의)
전화: 063 534 4018
홈페이지:  www.태인양조장.com
체험 | 2주 전 예약, 전화 문의




이전 15화 15. 학교와 산성으로 우리 술을 만나러 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