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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변찮은 최변 Nov 11. 2017

'미술 기법'도 '특허'가 될까?

이제 특허도 예술가들의 방패가 될지도.

"그대라는 노을" 이혜윤 작품



지적재산권에 대해 강의를 하던 어느 날, 매력적인 화가 한 분이 질문을 했습니다.

"미술 기법도 특허를 받을 수 있나요? 미국에서는 미술에도 특허를 받는다고 하더라구요. 요즘은 기술이 워낙 발달해서 특이한 기법을 사용한 작품이 많은데요. 다른 작가들이 새로운 기법이 나오면 허락 없이 따라 하는 일이 많이 생겨요. 단순히 저작권 말고도 특허로 보호받을 수 있는지 궁금해요."


"네!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건이 까다롭죠"


특허에 대해 어느 정도 아시는 분들은 "미술에 특허? 저작권이나 디자인권은 몰라도 과학기술인 특허??"라고 의아해 하실거예요. 그렇다면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야 미술 기법에 특허를 받을 수 있을까요?



특허는 '발명'에 독점권을 부여하는 제도입니다. 그럼 '발명'의 법적 정의를 알아야 미술 기법이 특허 대상이 되는지 알 수 있겠죠?


특허법 제2조 제1호
"발명"이란 자연법칙을 이용한 기술적 사상의 창작으로서 고도(高度)한 것을 말한다.


미술 기법과 관련해서 살펴봐야 할 핵심은 "자연법칙을 이용한",  "고도입니다. 자연법칙 자체나 자연법칙을 위반한 것은 특허의 대상이 될 수 없고(예를 들어 무한동력장치), 누구나 쉽게 생각해 낼 수 있는 기술이면 특허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진보성).  예를 들어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의 "액션 페인팅"을 생각해 봅시다. 액션 페인팅은 바닥에 펼쳐진 화폭 위에 물감을 뿌리고 흘리는 "드리핑(dripping)", "얼굴(tachisme)" 등 자동기술(automatism) 기법을 이용하죠. 이처럼 액션 페인팅은 그 기법의 창의성이 대단하지만, 기술적으로 고도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잭슨폴록, 작품 No. 1, 캔버스에 유채와 에나멜,172.7x264.2cm, 1948, 뉴욕현대미술관


화가 자신의 움직임만을 사용한 독특한 붓칠이나 조각술 같은 것은 발명이 될 수 없죠. 결국 과학적 방법을 이용하여 제작한 재료 자체나 제작 방법이 특허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 국내에서 미술 기법으로 특허 받은 사례를 한번 살펴볼게요.



손봉채, 폴리카보네이트 × led = 입체회화

〈물소리바람소리〉, oil on polycarbonate+LED, 1600x1200cm, 2015


입체회화로 유명한 '손봉채' 작가님이 있습니다. 손봉채 작가는 아크릴보다 훨씬 단단한 폴리카보네이트에 그림을 그린 다음 여러 장 겹친 뒤 led로 비추어 독특한 원근감을 표현하는 입체적 회화 기법을 발명해냈습니다. 회화에서 사용되는 일반적인 원근법 표현이 아닌 폴리카보네이트를 여러 장 겹쳐 led를 쏘는 기법은 '기술적 사상의 창적으로서 고도한 것'으로 인정된 것이죠.



손봉채 작가가 입체회화 기법을 생각해 낸 계기가 독특하더군요. 어느 언론에서 “대학에서 시험 감독을 하는데, 뒤로 돌기만 하면 ‘사락사락’ 하는 비닐 소리가 나는 거예요. 알고 보니 애들이 OH필름에 축소 복사를 해서 커닝 페이퍼로 쓰고 있더라고요. 압수한 OH필름을 한꺼번에 모아놓으니 글자들이 뭉쳐져서 덩어리로 보이잖아요. ‘이거다’ 했죠.”라고 소회를 밝힌 적이 있더군요. 손봉채 작가님의 작품을 실제로 보진 못했지만, 기술의 발전이 미술의 지평을 넓히는 구나라고 새삼 감탄했습니다.


〈Migrants〉, oil on polycarbonate, 90x68cm, 2015



조광호 신부, 아트 스테인드글라스 네거티브 레이어 기법


대구 범어동주교좌성당 내 소성당의 성가대에 위치.


서양 역사책에서만 보았던 '스테인드 글라스가 이렇게 아름다운 거구나.'라고 느끼게 해 준 작품입니다. 바로 조광호 신부님의 작품인데요, 특허받은 '스테인드글라스 네거티브 레이어' 기법을 활용한 것입니다. 실크스크린으로 인쇄하듯이 판유리 표면에 염료를 균일하게 색을 칠해 그림을 그린 후 700도 이상 고온으로 가열하는 방식이라고 합니다. 이 기법을 활용하면 다른 스테인드 글라스에 비해 세밀한 그림을 그려 넣을 수 있고, 투명한 색을 표현할 수 있어서 신비롭고 몽환적인 느낌을 줄 수 있다고 합니다. 

조광호 신부님은 특허를 받으셨지만, 이 기법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비용 없이 전수해주고, 공공건축물에도 별도 특허이용료 없이 제공해줄 것이라고 하네요.


부산 남천동 주교좌 성당

또한, 이 기법으로 만들어진 스테인드 글라스는 경도가 매우 강해 건축물의 외벽에 넓게 설치할 수 있다고 합니다. 위 사진에서처럼 직각이 아닌 완만한 각도로 설치할 수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죠. 위 스테인드글라스는 아시아 최대 크기라고 하네요.




제주가 문화와 창조의 섬이다보니 문화예술인 분들을 자주 뵙게 됩니다. '저작권'에 대한 관심과 식견이 높으신 예술인들에게 미술작품이 특허로도 보호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해드리면 굉장히 놀랍니다. 이런 신세계가 있냐는 반응! 물론 미술기법에 대한 특허는 '산업적 이용'보다는 '무단 침해 방지' 목적이 크지만, 또 모르죠. 지적재산권은 예측불가능한 확장성이 매력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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