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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혜숙 Mar 12. 2024

준비물

국민학교 3학년, 여름 방학 후 사흘 정도 학교에 갔을 때였을 거다. 아침에 도착하자, 지혜가 그날 미술 숙제로 멋진 그림을 가져왔다. 시간표를 확인하지 않았던 건지 아니면 아침에 정신이 없었던 것인지, 방학 숙제로 만든 찰흙 진돗개를 집에 두고 왔다. 만들어 놨는데 제때 제출하지 못하면 아쉬웠다. 아니면, 오후에 든 체육 시간에 필요한 체육복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스케치북이거나 아니면 검사를 맡아야 하는 노트일 수도 있었다. 그 물건이 꼭 필요했다. 


혹시 엄마가 도와줄지도 몰랐다. 학생사 사거리 공중전화에서 집에 전화를 걸었다. 발신음이 가는 동안 매끈한 송화기의 플라스틱과 침이 묘하게 섞인 냄새를 맡았다. 얼굴에서 송화기를 살짝 뗐다. 뚜루르르, 뚜루르르 발신은 멀었다. 공중전화 부스에 먼지 묻은 회색 실리콘 마감을 이어 누군가 씹다 만 껌을 붙여 놨다. 부스 창으로 오른쪽으로 지나가는 버스를 보다가 동전이 뚝 하고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엄마의 목소리가 멀찌감치 들려왔다. 수화기를 가까이 들었다. 


“엄마, 나 준비물을 잊었는데 갖다 줘.” 

오전 아홉 시, 용케도 엄마는 그 시간에 집에 있었다. 다행이었다. 

“무슨 소리 하노. 못 갖다 줘. 농사일도 바빠 죽겠고만.” 


마지막 희망이 ‘바빠 죽겠고만.”이라는 말과 희미해졌다. 엄마는 급히 전화를 끊었다. 엄마는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정말 시간이 없었을 거고, 지금의 어른이 된 나처럼 그 물건이 없이도 수업에 아무 지장이 없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엄마에게는 그게 아무것도 아닌 셈이다. 호미를 챙겨 신작로를 걷는 사이 그녀는 딸아이의 준비물 따위는 완전히 잊어버렸을 것이다.


실제로 준비물은 다르게 넘어갈 수도 있었다. 벌 청소를 하거나 아니면 “칠칠맞지 못하게.”라는 몇 초 간의, 선생님의 눈초리를 받으면 됐다. 친구의 물건을 빌려도 됐다. 그 준비물이 필요한 시간만 꾹 견디면 될 걸 나는 그게 죽을 만큼 싫었다. 필요한 준비물과 원하는 물건이 그 자리에 있었으면 했다. 선생님의 눈치나 친구들에게 묻는 것이 민망해 서기보다 내 물건이 완벽하게 갖춘 상태가 주는 심리적 안정감이 내게 더 중요했다. 


걱정하는 나를 보고 수잔나가 자기 자전거를 빌려주겠다고 했다.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갔다 오면 될 것이 아니냐는.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을 잡듯, 나는 수잔나를 따라갔다. 학교 옆 교회 별채에 살던 수잔나가 뒷마당에 세워져 있던 연보라색 자전거를 내게 보여줬다. 


그렇게 작은 자전거를 타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짐을 실을 수 있는 튼튼한 뒷좌석이 있는 옛날 어른 자전거를 끌고 다녔다. 차대(탑 튜브)가 높아 안장에 오를 수 없었다. 핸들 바를 두 손으로 잡고 왼발을 땅에 고정하고 오른발로 페달을 힘껏 저었다. 딱 그만큼 자전거는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서커스 소녀처럼 팔과 기울어진 몸으로 자전거 페달 위에 균형을 잡아 자전거를 끌고 놀았다. 일 년 동안 페달 밟기를 연습하고 겨우 자전거를 타게 되었을 때는 오빠의 사이클 자전거를 탔다. 사이클 자전거의 그 둥근 손잡이에 작은 손은 악작같이 매달렸다. 페달이 길어서 지금 헬스 자전거를 타는 것처럼 다리로 꼿꼿이 펴고 왼쪽 오른쪽 골반을 씰룩거리면서 불안하게 탔다.


수잔나가 건넨 아동용 자전거는 내 다리보다 낮았다. 바퀴는 16인치는 된 듯. 삼학년인 나는 또래보다 키가 컸고 그 자전거를 타고 가기보다는 걸어가는 게 빨랐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걸어가는 것보다 자전거가 빠를 것이다. 그렇게 자전거를 보여준 수잔나에게 거절하지 못한 것인지 받아 들고 길을 나섰다. 


40분의 휴식 시간 동안, 나는 1.5km 떨어진 집에 가서 준비물을 가지고 돌아가야 했다. 집으로 가는 길은 오르막길의 연속. 안장에 앉아서 페달을 저으면 힘이 분산됐다. 오르막을 오르고 있었지만 자꾸 뒤로 밀려나는 것 같았다. 자전거에서 내려 허리를 굽히고 작은 자전거를 밀었다. 허리가 아팠다. 오르막의 막바지 차량이 많은 삼 거리에서 차가 오는지 오는지 잘 살펴보고 건넜다. 약간의 내리막과 평지처럼 직선으로 펼쳐진 신작로를 바로 보고 페달을 열심히 밟았다.  


가을볕이 따뜻하게 등을 내리쬐었다. 황석산에서 여름을 품은 바람이 불었다. 등을 타고 한 줄기 땀이 흘렀다. 이마에서 진땀이 났다. 허벅지는 뜨거웠다. 숨이 찼다. 힘차게 밟은 것 같은데 속도가 안 났다. 그 자리 그 가로수, 집은 아직 멀었다. 나는 자전거가 아니라 골칫덩어리를 받았나. 썩은 동아줄처럼 주르륵 미끄러져 내리는 것처럼 힘이 빠졌다. 그렇다고 이걸 도중에 버릴 수도 없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금방 갖다주면 될 준비물을 갖다 주지 않는 엄마를 원망했다. 우리 집은 왜 농사일을 해서…엄마는 왜 늘 바빠가지고… 엄마의 동글동글 파마 머리를 생각하고 흙이 묻은 그녀의 흰 장화를 생각했다. 전화를 받았을 때의 엄마 목소리. 그런 것까지 내가 해야 하나…라는 엄마의 질책. 두고 봐. 내가 가지러 간다고. 내가 해결하면 되잖아.  학교에 돌아가서 내 준비물을 가지고 책상에 앉아 있을 나를 상상했다. 이를 악물고 전진하지 않는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혼절하듯 집에 도착해 나는 그 준비물을 찾았다. 안도의 숨을 들이 마시고 읍으로 뻗은 신작로를 내려다 봤다. 돌아가는 길은 그래도 내리막이었다. 힘을 냈다. 그 작은 자전거는 아무래도 느렸다. 시계가 없었다. 시간은 흘러가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집에서 시계를 보는 걸 잊었다. 줄어가는 시간을 쫓아서 허겁지겁 학교로 돌아갔다. 힘이 쭉 빠져서, 그 자랑스러운 물건을 책상에 올리고 있던 자신의 모습은 없다. 


그 준비물은 무엇이었던가. 체육복이었던가. 실내화였던가. 아니면 미술 작품이었을 수도 있었다. 그 물건이 기억 나기보다는 힘들었던 오르막길, 맺혔던 땀, 그리고 엄마를 원망했던 내 마음, 작았던 자전거에 대한 불만이 선명하게 남았다. 그 물건을 가져와야 한다는 나의 집착. 밉보이고 싶지 않았던 내 마음, 그 마음을 위해서 애썼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았다. 그리고, 나는 그런 일이 하찮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그때의 나처럼 그 찰나의 안정감을 위해서 자신을 몰아붙이지 않는다. 그때의 나의 세계는 지금보다 더 작았을까. 그 세계에서는 나는 준비물에 내 모든 것을 거는 작은 존재였던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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