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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혜숙 Apr 01. 2024

데자뷰

아들이 아마존 에코닷에 헤드폰을 연결해서 음악을 듣고 있었다. 유명한 노래에 메시, 호나우도, 엠마페같은 유명 축구 선수를 주제로 가사만 붙인 노래다. 입에 붙긴 해도 축구 선수 이름을 반복하는 노래가 좋은 음악이라고 하기엔 그렇다. 엄마가 그렇게 생각하거나 말거나 아이는 그것에 열광한다. 들려오는 음악에 몸을 맡기고 흐느적거린다. 모호한 부분은 얼버무리고 잘 아는 부분은 리듬과 가사를 완벽하게 따라 부르기도 한다. 자기 세계에 빠져 있는 아이를 흐뭇하게 보고 있던 나, 어릴 적 생각을 생각했다.

우리 집은 다른 집보다 신문물을 금방 받아들였다. 화장을 화려하게도 (아니 시간이 없던) 엄마도 아니었고 일을 하고 집안일을 하는 것만으로 바빴던 엄마가 옷을 살리 만무했다. 그렇다고 아버지는 어떨까. 찢어지고 해진 넌닝을 입고 다녔으니, 우리 집에 돈이 모일 수밖에 없었다. 새벽이면 비밀스럽고 조용한 그들(나는 안방에서 잠을 잤다)의 목소리가 잠귀에 들렸다. “만당에 밭이 하나 나왔는데 얼마나 하는지 물어봐. 누구한테? 구장이지 누구한테 물어봐. 소문 안 나게 물어봐요. 구장한테 묻는데 소문 안 날 리가 있나. 그러면 당신 김 사장 친구 그 누구더라 용기네 이웃이라니깐 거기 거쳐서 한번 물어보지. 어 그래야겠네. 내일 우리 집에 술 마시러 온다니깐 어.” 나는 부모님의 대화를 엿들었다.

매년 부모님은 새 터에 논 두 개, 그리고 사과나무 옆에 논 한 개. 그리고 여기저기 더 샀었다. 그러고 나서도 그들의 통장에는 돈이 좀 남아있었던지. 어느 날 당시 최고로 좋은 전축이 우리 집에 들어왔다. 안방 장농 옆에 남은 공간을 다 차지할 만큼 컸다. 너비 1미터 50, 1미터 두께 정도로 두께도 두께였다. 검은 벽돌을 여섯 개를 쌓은 것 같은 육중함과 검은 합판 선반으로 나눈 것이 그것을 더 고급스럽게 보이게 했다. 카세트테이프, 레코드, 그리고 음향을 조절하는 레버, 녹음 기능까지 있었고, 무엇보다 스피커가 가슴까지 올 만큼 컸다. 

헤드폰도 있었다. 헤드폰을 쓰면 음소거가 되고 무중력의 공간에 나만 있는 듯했다. 부모님과 한 방을 쓰고 수시로 오빠들이 심부름 시키고 또 동네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우리 집에서 내게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했다. 헤드폰을 쓰면 금방 고독에 들어갔다. 나와 음악만 덩그러니 남아 적적하지만 붕 뜨는 기분이 들었다.

전축이 생기자 부모님은 카세트와 시디, 레코드까지 구매했다. 가요 메들리 뽕짝이 대다수였지만, 어느 날 내 손에 이소라의 테이프가 들려 있었다. 이소라의 음성은 호흡까지 전부 노래였다. 난 행복해. 가 처음 나왔을 때, 그 음울한 음성과 앨범에 매료되어 몇 백 번 들었을거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 창법을 따라 해보고 싶었다. 


우리 집에는 마이크까지 있었다. 노래를 부르다 보면 침 냄새와 금속 냄새가 섞여 이상해서 코를 대고 여러 번 킁킁 거렸다. 입술을 거기에 갖다 대면 전기가 찌릿찌릿하기도 했다. 마이크를 들고 헤드폰을 쓰고 빨간 녹음 버튼을 누른다. 호흡을 가다듬고, 날,,, 용서해 내가 이소라가 된 듯이 손을 앞으로 모으고. 눈을 감고 조용히 노래를 불렀다. 완벽하게 흉내 냈다고 생각했다. 두세 번 녹음하고, 그걸로 절정을 느낀 후, 그걸 들어볼 생각도 없었지만 저녁때가 되어 밥을 먹었던지 숙제를 했던지, 까맣게 잊었다. 

다음 날, 전축 앞에서 이것저것 만지고 있던 작은 오빠가 낄낄거렸다. “형, 이리 와서 이것을 좀 들어봐.” 큰 오빠가 둘째 오빠에게 다가갔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들이 내 속옷을 봐 버린 것처럼 얼굴이 벌게졌다. 내 표정인지 이소라의 표정인지. 그들은 날,,, 용서해를 이죽대며 부르며,,,, 깔깔깔 거렸다. “내 놔.” 나는 헤드폰을 뺏고, 재생 버튼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만해!” 그들이 그만 둘리 없었다. 둘째 오빠가 나를 전축 근처에 다가가지 못하도록 철벽을 치고 큰 오빠는 그걸 크게 틀었다. 무한 반복으로 재생했고, 흉내 냈다. 며칠 동안 그 놀림을 수없이 들어야 했다. 그 이후에는 절대로., 노래 녹음 따위는 하지 않게 됐다. 

 

아이가 거실 한쪽에서 헤드폰을 쓰고 어깨를 들썩거리며 노래를 크게 따라 불렀다. 저절로 따라 하게 하는 그 몰입의 순간. 그걸 알고 있어서 데자뷔를 본 것처럼 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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