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원더혜숙 Apr 15. 2024

가출


1. 그녀만 아는 가출 


고스톱에서 진 것도 속상하고, 라면을 끓여줬는데도 자기를 괴롭히는 오빠를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의 머리를 한대 쳤다. 오빠는 위협하듯 눈을 깔았다. 그의 기세에도 그녀는 눌리지 않았다. 일어날 일이 뻔했지만 저항해야 했다. 얼굴 앞에 들이댄 오빠 발을 손으로 밀어냈다. 오빠는 발을 내리기 무섭게 그녀 등을 발로 후렸다. 그녀도 있는 힘껏 그의 배를 걷어 찼다. 그는 합기도 파이터처럼 다리를 연달아 휘둘렀다. 막아낼 재간이 없는 그녀는 흔히 말하는, 먼지나도록 맞았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고 부엌으로 도망갔다. 서러운 것이 터져 나오기 직전. 부엌을 지나 보일러 실 앞에서 잠시 섰다. 기름냄새가 코에 스쳤다. 보일러는 윙윙거리면서 물을 데우고 있었다. 그녀는 눈물을 소매로 훔쳤다. 조용히 목욕탕으로 들어가서 따뜻한 물을 받았다. 눈물을 씻어내고 머리를 감았다.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어내고 우두커니 섰다. 다시 흐르는 눈물을 꾹 참고, 수건을 목에  두른 채 눈에 보이는 얇은 잠바를 하나 걸치고 문을 나섰다. 


수도꼭지에서 떨어진 물이, 빨간 대야에서 넘쳐 수로까지 바닥을 반질반질 얼음 포장을 했다. 수건 아래 목덜미가 찬기로 조여왔다.터진 슬리퍼에 빼죽 나온 발가락이 시리었다.  그녀는 대문을 나섰다. 외딴 마을에서 갈 곳은 없다. 시멘트 위에 끄는 슬리퍼 소리가 텅 빈 마을을 울렸다. 마을을 벗어나 다리를 건넜다. 논길을 걸었다. 드문드문 황석산에서 눈발이 날렸다. 잠바 안 반팔 셔츠 사이를 비집고 헐겁게 바람이 들어왔다. 마음이 시리었다. 


겨울에 막아 놓아 물이 바짝 마른 시멘트 수로에 들어가 웅크리고 앉았다. 시멘트는 찼다. 여기서 얼어 죽어야지. 수로에서 뭐가 나올 것 같아 불안했다. 아직 젖은 머리카락에는 작은 얼음이 얼기 시작했고, 눈발이 굵어지고 있었다. 논에서 짚단을 가지고 와서 깔고 덮었다. 거칠거칠한 볏단에 온기를 기대하며 눈을 감았다. 머리카락과 이마에 옷에 눈이 떨어졌다. 산에서 낙하해 강을 타는 바람이 울었다. 수로에는 바람이 잦아들었다. 


지금쯤 오빠는 후회하고, 조금이라도 나를 걱정하고 있을까, 어두컴컴할 때까지 버티면 가족들이 찾으러 오겠지. 그날 당한 일 때문에 서러워서 울고 싶었지만 눈물은 추위에 얼어버렸다. 한 시간이 지났을까, 꿈을 꾼 듯 엄마가 차려준 밥상 앞에 앉았다. 흰쌀밥과 멸치 국물로 시원하게 우려낸 매운 무 국, 입으로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고 서러움이 한 번에 녹았다. 그날의 가출은 그녀만 알고 아무도 모른다. 


 









2. 참깨맛 크래커 



겨울 방학이라 집에서 할 일이 없었다. 등굣길에 사 먹던 단 맛 과자가 무척 그리웠다. 그날은 꼭 다이제스트를 먹고 싶어, 정확히 말하자면 군것질을 하고 싶었다. 동네에 슈퍼가 없다. 아랫마을 슈퍼까지는 1킬로미터 남짓, 추운 겨울날이었다. 집에는 어기적거리며 탈 수 있는 그녀 키만큼 높은 오빠의 사이클 자전거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작업 잠바에서 거추장스럽게 짤랑거리는 동전을 항상 목욕탕 옆 신발장 위에다 던져 놨다. 그날은 그것도 없었다. 아버지의 작업 잠바에서 겨우 몰래 500원을 찾았다. 바지 주머니에 500원을 꼭 넣고, 한달음에 구멍가게에 도착했다. 


구멍가게 주인아줌마는 한 겨울에 어린 손님이 왔을까, 반가워하면서도 성가신 듯 했다. 과자를 고르는 동안 아줌마가 그녀를 몇 번이고 곁눈질했다. 가게에 다이제스트는 없었다. 동네 가게에서 학교 앞 전방에서 팔던 맛있는 과자를 기대한 것이 잘못이랴.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아니 먹어는 봤지만 맛이 없었던 과자를 들었다. “얼마예요?” “500원” 깨 맛 크래커 하나에 그녀가 힘들게 찾아낸 오백 원을 덜컥 내놓을 것인가. 어서 사고 가지 않느냐는 아줌마의 눈치를 보고 돈을 냈다. 주머니에 500원 대신 크래커를 넣었다. 


자전거에 가볍게 올랐다. 안장이 높아 삼각대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왼발 오른발 번갈아 페달을 밟았다. 산에서 불어오는 맞바람에 손도 시리고 힘도 딸려 100미터도 못 가서 내려앉았다. 황석산에서 떨어진 눈이 강바람을 타고 그녀의 뺨을 스쳤다. 크래커는 어떤 맛일까. 


다시 자전거에 올라탔다. 털컥, 체인이 빠졌다. 자전거 받침으로 한쪽으로 기울이고 검지와 엄지를 이용해 덕지덕지 기름 묻은 체인을 얼른 집어서 제자리에 건다. 털 커 덕, 한 번에 잘 맞아들었고, 한 손으로 페달을 돌리니 또 한 번 털커덕하고 체인은 제자리를 찾았다. 검은 기름 묻은 손을 슥 바지에 닦았다. 손이 빨갛게 얼었다. 후드를 쓰고 몸을 웅크렸다. 옷을 두툼하게 입었으면 좋았을걸. 자전거에 훌쩍 올라타서 모자라는 다리만큼 허리를 비틀어 한쪽으로 힘껏 페달을 밟은 후 이어 다른 한쪽도 밟는다. 바지 주머니에 넣은 크래커가 떨어지지 않을까, 넘어지지 않을까 어기적 어기적 바람을 맞으며 조금씩 전진했다. 


잠잠하던 하늘이었는데 황석산은 날렵한 콧날이 눈구름에 가렸다. 눈송이가 굵어지기 시작했다. 얼굴에 차가운 눈이 내려앉았다. 스웨터 손목에 난 구멍 사이로 바람이 숭숭 들어왔다. 그래도 주머니에는 과자가 들었다. 외딴 집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저기까지 가면 된다. 논과 들에 눈이 조용히 눈이 날렸고, 어깨와 머리에 눈이 소복이 쌓였다. 눈보라가 시야를 가렸다. 따뜻한 방에 들어와 바스락거리는 포장지를 뜯고, 설탕이 발린 깨 맛 크래커를 입에 넣었다. 얼었던 마음을 설탕처럼 녹였다. 





이전 06화 눈 내린 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