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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혜숙 Apr 22. 2024

딸기와 사탕


슈퍼에서 딸기를 사 올 때마다 남편은 한국 딸기만 못하다 한다. 


“우리는 독일에 있으니 신 독일 딸기를 먹어야 해.”라고 아내는 T형의 얼굴로 답한다.  


가끔씩 농담으로 자장면을 시키라고 할 때, 그가 했던 것처럼 똑같이 복수를 한다. 


 


“새터에 아는 언니네 집에서 사 왔어. 1kg에 만 원이야. 진짜 신선하지?”


새언니는 한국에 갈 때마다 딸기를 좋아하는 나와 남편, 아이들을 위해 하루 걸러 한 번씩 딸기를 사 왔다. 빨간 다라이 한가득 담겨 오는 딸기. 새터 딸기는 향부터 달랐다. 딸기를 딸 때 따라나온 향이 크린 랩 안에 숨어있다가 그걸 벗기자마자 즉각 해방을 외치며 뛰어나왔다. 우리 콧구멍 속으로 힘차게 들어가며, “날 먹어줘 먹어줘. 두세 개를 한 입에 넣고 입 주변에도 벌겋게 물들이면서 먹어줘. 나는 비타민이 충분하지. 이걸 먹으면 나처럼 예뻐질 거야.”라고 외친다.    



국민학생 시절에 나는 새터 딸기 비닐하우스를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을 지났다. 하교 후 나는 학교 앞 점방에 서서 엄마가 준 백원으로 버스를 탈지 자키자키를 사 먹을지를 고민했다. 보통은 자키자키가 이겼다. 짭짤하고 바삭거리는 자키자키는 마지막 손가락에 남은 짠 양념까지 쪽쪽 빨아먹을 만큼 맛있었다. 오십 보 걸으며 하나를 녹여 먹고, 백 보 걸으면 하나를 녹여먹었다. 자키자키는 바삭거리는 맛을 즐겨야 하지만, 녹여먹으면 양념 맛이 좋았다. ‘그냥 한주먹을 입에 넣어서 와그작 먹을까? 그러면 나중에 집에 도착할 즈음에 먹을 게 없잖아. 새터 입구까지만 이렇게 먹고, 그 다음은 한걸음에 두 개를 먹자.’ 걸으면서 모노로그를 찍었다.  



봄 햇살에 쑥이 나왔고 논은 파릇 파릇 해졌다. 녹은 땅에서 보리가 올라왔다. 다른 땅에는 양파가 뽀족히 바람에 흔들렸다. 봄기운은 비닐 아래서 풍성해지고 비닐을 앞으로 밀었다. 그 작은 틈으로 바람이 들어가고, 그 아래는 잡풀이 꿈틀거렸다. 그 오후, 자키자키는 입에서 녹고 따뜻한 봄 햇살이 등을 비췄다. 나의 걸음이 늘어졌다. 



비닐하우스가 서너 채 들어선 새터 입구에 도착하자 열어둔 비닐하우스에서 훈훈한 향이 훅 밀었다. 딸기 비닐하우스는 일반 비닐하우스와 달랐다. 비닐보다 더 딱딱한 아크릴에 그걸 지탱하기 위한 철 구조가 필요했다. 그건 초기 투자가 크다가 했다. 그래, 우리 집은 소농이니깐, 벼농사, 양파, 수박 농사나 하는 거지. 딸기 향을 맡으면 딸기 집 하는 애들이 부러웠다


비닐하우스를 지나면 비닐 뚜껑을 열어 놓거나 문을 열어둔다. 비닐하우스에 송송히 맺힌 물방울이, 코끝으로 들어왔다. 벌과 꽃의 입맞춤처럼 달콤했다. 딸기들이 나를 유혹하는 것 같았다. “들어와, 여기 들어와서 한 번만 달콤한 나를 먹어줘. 두 개 세 개 마구마구 넣어봐.” 


'그냥 하우스에 들어가서 딱 하나만 따먹으면 어떨까?' 상상은 할 수 있다. 신선해서 단단한 빠알간 딸기 하나를 입에 넣고 음,,, 싱싱함에 감동된 얼굴. 나는 이내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러나 다시 다음 것, 다음 것 또 다음 것으로 따서 입에 넣는다. 하나를 삼키기 전에 손을 뻗고, 눈은 그다음 딸기섶 치마를 들춘다. 아, 여기 숨었네. 이파리 아래 숨은 빨간 딸기를 훔친다. 입으로 쏘옥. 아 맛있다. 우리 집은 왜 딸기를 안 키울까. 그렇다면, 내가 맨날 가서 딸기를 따 먹을 텐데… 나는 항상 하우스 입구에서 보이는 호스와 검은 비닐 위에서 빨간 딸기를 흘낏 보고, 향만 훔쳤다. 



그러나 그날만은 달랐다. 어느 날, 나는 점방에서 자키 자키 한 봉지를 사고, 아이들이 뽑기를 하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점방 주인 할머니는 아이들이 바글바글한 가운데, 안방에 앉아 상반신만 내밀고 잔돈을 바꿔주거나 가격을 묻는 아이들에게 고성을 질렀다. 그날은 어린이 손님들이 작은 점방을 가득 채웠다. 문턱 안으로 줄줄이 늘어선 아이들은 연신 뽑기를 했고, 과자를 사거나 종이 인형을 사거나 저만의 용건으로 부산스러웠다. 


할머니의 시선을 가린 곳에, 못 보던 과자가 있었다. 껌 두 개를 옆으로 붙이는 크기의 상자에는 동그란 사탕 같은 게 그려져 있었다. 라면과 자키자키, 자갈치를 좋아하던 나는 사탕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이 웬걸, 그저께부터 팔리지 않고 있는 그 상자가 확대되었다. 아무도 사 가지 않는, 다른 과자들 사이에 끼여 있는 그 이상한 사탕이 나를 유혹했다. “나를 주머니에 넣어. 나를 한번 먹어봐. 못 먹어본 맛이잖아. 지금 할머니가 안 보고 있어. 재빠르게 넣고 가게를 슬그머니 나가면 돼.” 그 순간, 나는 재빨리 잠바 주머니에 그걸 집어넣었다. 집어넣고 나자, 가슴이 콩닥콩닥했다. 아무도 안 쳐다보는데 나오면서 할머니가 나를 잡을까. “이 도둑년 잡아라.” 하고 안방에서 벌떡 맨발로 쫓아올 것만 같았다. 


점방을 나와 오른쪽으로 꺾으면 성당이 있었다. 성당 건물 꼭대기에는 예수님이 손을 아래로 향하면서 내려봤다. “아, 잘못했습니다. 맛만 볼게요.”속으로 사죄하고 평소보다 열 배는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누구도 나를 볼 수 없는 금호 강변에 닿았다. 금호강은 봄철이라 물이 세차게 흘렀다. 아무도 없다는 걸 알았지만 나는 뒤로 돌아보고 또 돌아보았다. 할머니가, 마녀 같은 표정으로 도둑년이라고 부르고 금방 저 모퉁이를 돌아올 것 같았다.


나는 주머니에서 살포시 그 작은 상자를 꺼냈다. 무엇이 들었을까. 상자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사탕 같은 것 같은데, 그림으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상자를 살짝 열어서 사탕을 꺼냈다. 딱딱한 콩 같은데 울퉁불퉁했다. 흰 표면이 반들반들했다. 입안에 넣었다. 설탕에 약간 짠맛이 났다. 짠 설탕 사탕은 딱딱해서 이물감이 들었다. 손에 뱉었다. 그리고 강에다 던져 버렸다. “에이 퉤퉤 맛도 없네.” 훔친 것인데 맛이 없다니, 당장 상자를 금호강 갈대숲으로 던져버렸다. 닫지 않은 상자에서 사탕이 여러 개 튀어나와 얼음에 부딪치고 그 맑은 물에 퐁당하고 빠졌다. 입안에는 아직도 사탕의 달달한 감각이 남아 있었다. 


다시는 도둑질을 안 해야지. 좋아 보이는 물건도 실제로 가지면 썩 좋은 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정당하게 치르지 않은 물건은 몸을 벌벌 떨게 만들었다.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을 거야. 하고 손을 탈탈 털고 자키 자키를 한 주먹 꺼내서 와그작와그작 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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