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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혜숙 Apr 29. 2024

강냉이와 할머니

할머니를 따라간 건지 아니면 엄마 몸뻬 바지를 끌고 간 건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할머니를 따라갔다는 가정으로 기억을 더듬는다. 할머니는 괴팍하고 소리 잘 지르는, 오빠들만 편애하는 사람이지만 어쩌면 내 기억 속에 다른 것들이 끼워져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할머니는 키가 작았다. 1미터 35는 되었을까. 그래도 힘은 장사였다. 갈비, 소갈비 말고, 솔나무 잎이 마르고 떨어지면 그걸 우리 동네에서 갈비라 불렀다. 불을 때던 시절, 아궁이에 불을 짚일 때 유용하던 갈비를 할머니는 산에서 해오는데, 갈비를 긁어모으는 것이 신기했다. 산허리까지 살금살금 올라가서 작대기로 갈비를 조금 모아 뭉친다. 그리고 그걸 아래로 밀듯이 떨어뜨리면 산 아래에는 갈비 산이 쌓였다. 그걸 그러모아 큰 거적때기에 싸서 어깨에 짊어진다. 세상에 이럴 수가나, 세상에 기이한 일들, 이라는 제목의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나오던 중국인들이 자전거 양쪽으로 엄청난 양의 판자나, 종이를 싣고 가는 그런 식으로, 뒤에서 보면 할머니가 아니라 자루가 걸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할머니는 그 큰 포대기를 짊어지고 대문의 작은 문으로 들어오려다 퐁 하고 튕겨 나간 적이 여러 번 있었다. 


“할머니 얼마 있어?” 돈맛을 알게 된 내가 할머니에게 용돈을 달라고 하는 건가. 아니다. 오빠가 그걸 물어봤을 거다. 오빠야 그걸 요구할 자격이 있는 고추 달린 손주 놈이었으니깐. 자루를 뒷간에 내려놓고 할머니는 속바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본다. 나와 오빠의 시선이 할머니의 바지, 속바지 그리고 꼬깃꼬깃 펴는 천 원짜리로 옮겨간다.


할머니는 장에 내다 판 삽주 뿌리로 짭짤하게 용돈을 벌었다. 천 원짜리가 부채처럼 두텁게 펼쳐졌다. 거기에서 할머니는 오빠 한 장, 나 한 장씩 줬을 거다. 돈이 좋아서 흰동이 엉덩이를 팡팡 때리고 폴짝폴짝 뛰어서 마당을 돌아다녔는지 모른다. 


그날은 장날이다. 할머니는 동네 어귀, 윗동네 아랫동네 할 것 없이 논두렁이란 논두렁이를 다 헤치고 캔 삽주 뿌리 한 포대를 짊어지고 장에 가는 날이다. 삽주 뿌리는 약이 되었고 당시에는 시장에 내놓기만 하면 잘 팔리는 없어서 못 파는 식품이었다. 일명 도깨비 풀이라고 하는 식물의 뿌리를 겨울이나 봄 동안 캐어낸다. 그래서 할머니의 두꺼운 외투와 누빔바지, 쪽 찐 머리에는 도깨비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할머니를 따라나섰던 흰동이도, 나도 그걸 마루에 앉아 빼느라고 한참 걸렸다.

 

할머니가 버스를 탈 수 있었을까. 할머니에게 수레 같은 게 있었을까. 5킬로 그램은 족히 될 만한 포대를 들고 2km 떨어진 읍내 장에 걸어간다는 게, 그 잘막한 할머니에게 가능한 일이었을까. 우리 할매라면 가능했다. 나는 그때 갓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거다. 우리 할매는 손녀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따라가는 나를 나무라지는 않았다. 동네 다른 친구들은 없고 오빠들은 이제 컸다고 여자애가 따라나는 걸 유독 귀찮아했다. 따라오면 돌까지 던지고, 숨기도 하고 또 긴 다리로 성큼성큼 도망가기도 했으니, 긴긴 겨울 내가 할 일은 할머니 꽁무니를 따라 들판으로 다니는 것뿐. 그 결실을 보러 시장에 가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엄마보다 장사 수완이 좋았던 것 같다. 만족한 금액, 딱 만 원! 이 아니면 절대로 포대를 내어주지 않았다. 당시의 만 원은 생각보다 큰 액수였고, 만 원이라고 해도 약방이었던지 아니면 엑기스를 만들던 엑기스 가게이던지 아니면 그 효험 좋은 한약 재료를 알아보고 끓여 마실 줄 아는 사람들은 눈에 불을 켜고 가져가려 했다. 만 원. 할매는 언제나 만 원이었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더 이상 할머니를 따라다니지 않고 이제 친구들이 생겼을 때까지 줄곧. 



어떨 때는 한 포대, 어떨 때는 두 포대를 팔았다. 만 원짜리를 척하고 건네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꼭 오천 원짜리와 천 원짜리를 섞어서 그렇게 두툼하게 주면, 할머니는 돈을 셀 줄 몰랐으니 그게 더 많은 줄 알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삽주 뿌리를 팔아 치우고 걸어가는 길 시장 모퉁이에는 김이 하늘 높이 올랐다. 그때만 해도 엿장수의 요란한 음악도 있었고, 갈치요 풀빵이요, 골라 골라잡아 크게 소리치는 옷장사꾼들도 있었다. 그 복잡하고 좁은 시장통에 경운기를 끌고 오는 농부도 있었고, 시장통에는 아침이면 소 경매가 이뤄지니 사람들로 들끓었다. 


멍석을 깔아 놓고, 어쩜 저렇게 더럽고 기름진 기계에서 하얗고 고소한 강냉이가 터져 나올까 싶을 만큼 까만,,,,,, 강냉이 기계가 돌아가고 있었다. 강냉이 아저씨는 담배를 한쪽으로 꼬나물고, 둥근 부분을 불에 가까이 대고 살살 돌렸다. 아는 사람들이 지나면 고개를 들어 눈짓으로 인사했고, 아이들이 가까이 오면 멀리 떨어지라고 헐어빠진 목장갑을 낀 손으로 손사래 쳤다. 그 사이 담뱃재가 폴폴 날렸다. 아이들 여럿이 둘러 모여 앉아, 좀 떨어져서 쿨한 아저씨의 행동을 하나하나 지켜본다. 그리고 소쿠리에 떨어져 있는 하얀 강냉이, 저 강냉이는 어떡할까. 누가 집어먹어야 할 텐데… 군침을 삼킨다. 


강냉이 아저씨에게는 모든 게 착착 맞는 법칙이 있었던 게다. 우리가 강냉이를 흘린 강냉이를 날름날름 주워 먹는 사이, 그는 기계만큼 크고 긴 소쿠리에 비밀 봉지를 느긋하게 씌운다. 그걸 한쪽으로 비켜 두고 기계를 잠시 잡더니, 무슨 버튼을 하나 눌렀다. 하나, 둘, 셋 펑~하고 강냉이가 탄생했다. 펑 소리와 난 연기 속에서 나는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었다. 하늘로 치솟은 연기는 서서히 사라지고, 코끝에는 고소하고 사카린의 달짝지근한 향이 그윽했다. 아,,, 강냉이 향은 어쩜 이렇게 좋을까. 소복이 쌓인 강냉이, 노릇한 강냉이에 손을 뻗어 그냥 하나 훔쳐 먹고 싶다고 생각한 아이들이 나 말고도 많았다. 


우리 차례를 기다린다. 우리 차례가 되면, 강냉이 대신 쌀을 가져온 할매가 보얀 쌀을 강냉이 아저씨에게 건네주면, 내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올해는 설에 쌀강정을 할 거다. 우리 엄마가 만든 엿은 우리 동네에서 제일 맛있다. 그걸로 강정을 하면 더 맛있다. 


흰둥이가, 아니라 헨동아,,, 희원이 아니라 기운아, 라고 길고 가늘게 불러 대던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아들만 좋아한 할매라도 겨울 도랑에 가서 말간 토종 밤을 주워 와서 우르르 쏟아 놓고 자고 있던 내 얼굴에 장난스럽게 척하고 내려놓았던 할머니. 산에서 갈비를 긁어오는 것처럼 도랑이고 논이고 부지런한 발이 닿은 곳이나 눈이 닿는 곳마다 쓸 만한 물건을 죄다 주워 놓고 모아 놔서 방안이 지저분했다. 할머니와 방을 공유한 나는 그게 너무 답답하고 싫었지만, 그녀는 엄연히 내 생애 첫 룸메이트. 그녀의 함박웃음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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