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목표가 생기면 앞만 보고 힘차게 달려가는 무소 같다. 고교 3년생. 나의 목표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 아니 남들이 말하는 in Seoul 하는 것이 내 목표였던 것 같다. 그 해는 수능 난이도 조절에 크게 실패해 많은 수험생들이 턱없이 낮은 성적을 받았다. 그런 아이들은 꽉 찬 버스에 비집고 들어가지 못한 승객처럼 덩그러니 떨어져 지방대에 갔다. 나도 그런 무리에 속했다.
성적은 그에 미치지 못했지만, 어른들의 "꿈은 크게 꾸고, 목표는 높이 잡으라"는 말에 혹했던 것 같다. 그 말대로 고3이 되자 높은 목표를 세우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목표 외의 모든 것이 하찮아 보였다.
고등학생 때 자취를 했었다. 학교 정문 바로 옆에 위치한 그 자취 집에는 나 말고도 우리 반의 전이, 그리고 안쪽 끝에는 영이 그리고 다른 앞 집에는 남희가 자취했다. 처음으로 나만의 공간이 생겨 너무 행복했다. 그 행복감을 나는 매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 아침을 해먹는 걸로 표가 났다. 매일 아침 먹고 싶은 것을 해먹고 학교에 갔다.
누군가 행복한 모습은 유독 슬픈 사람의 눈에 잘 들어오는가 보다. 내 옆방에 들어온 전이는 우리가 서로 말을 텄을 때, 작은 눈을 크게 뜨고 내게 말했다. “부모님을 보내놓고 슬퍼서 아침에 뭘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못 했는데, 옆방에서 도마질 소리가 나더니 고소한 계란 부침 냄새가 나는 거야. 그때 얼마나 먹고 싶은 줄 아니. 도대체 뭘 만든 거야?” “뭐, 언제? 나 맨날 일찍 일어나서 밥하고 뭐 부치는걸? 아마도 계란 샌드위치지 않을까? 그거 자주 만들어 먹어.”
그런 전이는 나와는 달리 주말에 집에 가면, 일요일 늦은 밤에 부모님을 대동하고 자취방에 돌아왔다. 굳이 안 가도 되지만 나는 반찬과 용돈이 필요해서 집에 갔다. 일요일은 묵직하게 반찬이 든 종이가방을 들고, 그걸 혼자 먹을 생각에 기뻐서 빨리 자취방에 돌아갔다. 그 방에서 나는 언제든,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해먹을 수도 있었고, 무엇보다 방해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때 이미 홀로, 있는 법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무섭고 외로워했던 전이와 친해져서 밥을 같이 먹고, 밤늦게까지 수다를 떨기도 했다. 시험 기간이면 빨래터에 앉아서 레츠비를 마셨다. 달달한 커피 한 모금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걸 느끼면서 짤순이에서 나온 거품 물이 하수구로 빨려 들어가는 걸 구경했다.
그 시간이 지나고 우리는 고3을 맞았다. 각자 다니는 학원이 달랐고 이제는 다른 반이었다. 우리 둘의 공통점이 준 것보다, 우리는 각자 다른 것을 바라봤는지도 모른다. 나는 친구들을 멀리하고 방에 틀어박혀 공부만 하려고 했다. 전이는 자주 예전처럼 친구들과 어울렸다.
중간고사를 며칠 앞둔 어느 오후, 전이가 혜진이를 자취 방에 데리고 왔다. 유쾌하고 똑똑하며 사교성까지 좋은 혜진이는 전이의 친구로 잘 어울렸다. 둘 다 그만큼 밝았고 학업 고민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둘이 샤시문에서 어른거렸다. 비닐봉지가 바스락거렸다. 난 내 방의 문을 열어뒀다. 합판 한 장으로 가린 전이의 방과 내 방은 모든 소리와 냄새를 공유했다. 둘은 방문을 열어두고 바스락거리며 봉지에서 재료를 꺼냈다. 떡볶이를 한다고 했다. 집이 가까운 혜진은 집에서 요리를 안 해 본 듯, 그녀보다 경험이 많은 전이에게 어떻게 하는지 물었다. 혜진이가 전이에게 가스불을 어떻게 켜는지 물어봤을 때는 피식, 하고 웃음이 났다. 뭐가 재밌는지 혜진이는 떡볶이 재료를 준비하면서 키득키득, 떡볶이가 끓는 동안에도 전이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큰 소리로 웃었다.
공부를 하려고 했지만 내 감각은 그들에게만 쏠렸다. “전이야, 우리 라면 사리도 넣을까?” “냄비 넘칠 텐데.” "에라 모르겠다. 넣자.” 결국엔 넘쳐서 꺄악 소리를 지르며 허겁지겁 행주를 찾고 수습했다. 그 야단법석은 마치 투닥거리는 라디오 쇼 같았다.
내가 듣고 있다는 걸 감추려는 듯 살짝 방문을 닫았다. 하지만 떡볶이 냄새와 함께 그들의 웃음소리는 여전히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책을 들여다보면서도 자꾸 귀를 기울였다. ‘무슨 이야기로 저렇게 웃는 걸까?’ 낮은 볼륨 속에서도 ‘이게 맛있니, 저게 맛있니’ 하는 말이 들려왔다. ‘어떤 떡볶이를 만든 거지?’ 정작 맛이 궁금한 건 둘째였고, 함께 있는 그들이 부러웠다. 나는 읽던 페이지를 몇 번이고 다시 넘기며, 그들의 웃음소리에 계속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쟤네들은 시험 걱정은 안 되는 것일까? 저렇게 웃을 시간에 한 자라도 더 보는 게 맞는 거 아닌가? 그런데… 나도 저기서 웃고 떠들고 싶다. 지금이라도 헛기침을 하며 아는 척하고, 한 마디만 하면 함께 놀 수 있을 텐데… 글자가 한 개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신은 그들이 하는 말과 냄새, 그리고 그들의 미래를 걱정이 복잡하게 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안 된다. 나는 목표가 높다.’ 나는 엉덩이를 좀 더 단단히 의자에 붙이고 괜히 다른 책을 꺼냈다. 이제 그들도 방문을 닫아 더 이상 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혜진이가 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면 이 고문이 사라질 것이니깐.
그때, 좋은 대학에 가려면 성적을 올려야 하고, 그러려면 내가 가진 시간을 전부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친구, 우정은 목표보다 덜 중요했다. 아니, 시간 낭비에 불과했다.
한참이 지난 지금, 그들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그 즐거운 시간을 보낸 전이와 혜진이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내가 공부를 빼먹고 그들과 웃고 떠들었더라면, 내가 지방대보다 더 못한 곳에 갔을까.
생간 컨대, 내가 투자한 시간과 대학의 수준은 크게 상관이 없었다. 더 나아가, 대학과 인생이 정비례하는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목표를 세우고 그대로 실천해도 반드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로 나는 그때 한눈팔지 않고 목표대로 살았지만, 매일 밤 가위에 눌렸다. 그렇게 좋아하던 자취방이 감옥처럼 느껴진 건,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을 포기하고 오로지 공부에만 매달렸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행복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좋아하는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나누고, 즐거운 휴식을 취하는 것이 목표를 이루는 것보다 더 중요했다. 나는 여전히 무소처럼 앞만 보고 나아가지만, 이제는 가끔 길가의 풀을 뜯는 법도 배웠다. 그 소중함을 잊지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