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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숙소] 곽재구, 사평역에서

by 원더혜숙

작년 봄과 여름 사이, 여느 날처럼 블로그에서 시(詩) 동냥을 했다. 시를 읽고 분석해도 눈에 들어오지 않은 날들, 그중에 어떤 시가 들어왔다. 정확히 그 시적 공간이 거기를 가리키는 줄 모르겠지만 중국 변방을 연상시켰다. 초원과 사막. 이상하게도 이 둘은 내게 비슷한 공간 같다. 그곳은 초원에 가까웠다. 초원과 나, 나와 자연밖에 없는 아득한 공간에서 고개를 들어 별을 마주했을 것이다. 거기에 낙타도 있었다. 짊어진 배낭도 있었다. 낯선 여관이거나 찻집에서 차를 마시는데 그 찻잔으로 별이 톡 떨어졌다. 그런 이미지를 가진 시였다. (다 뒤져도 못 찾았습니다. 그런 시 아시는 분 제게 연락 좀 해주세요.) 중국 운남의 따리(大理) 고성에서 달이 너무 아름다워 서글펐고, 구수한 커피 한 잔에 그냥 울적했던 그 순간과 맞닿아 있었다. 그 이미지가 일 년 동안 숨어 있다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그게 곽재구 시인의 시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 시와 그의 시를 ‘아련하다’라는 새끼줄로 엮고 싶었다. 즉 문명에서 벗어나 나와 자연만이 마주한 아늑하고 아득해서 아련해진다. <사평역에서>는 지극히 문명적인데도 독자를 요원한 초원이나 광야로 데려다 놓는다.







사평역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 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 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눈이 내린다. 대합실에 앉아 난로를 보고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을 지켜본다. 딱 이 부분이 그 따리의 서러운 날을 연상케했다. 또 어느 날 배고픔과 갈증에 온몸으로 마른침을 삼키던 기차역 대합실을 상기했다. 경찰 두 명이 어슬렁거리며 역을 순찰했다. 중년 여성은 다리를 절뚝거리며 왼쪽 간이 슈퍼에서 오른쪽 바에 무엇인가를 가지러 갔다가 다시 돌아갔다. 그리고 바에서 맥주잔을 닦는 중년의 남자. 그 앞의 키 높이 의자에 앉아서 이민 온 것처럼 가방 두세 개를 옆에 두고, 아시안 음식에 맥주를 마시던 젊은 러시안 남자와 동유럽 여자. 그들의 목적지는 어디며 무슨 연고로 우리들이 이 장소에 모였는지를 생각해 보던 순간이 떠오른다. 이 강렬한 이미지가 독자를 아련하게 만들고 난로 앞으로 손을 쬐려고 모이게 한다. 인트로가 좋은 시의 전형이다.


아무런 이유 없이, 함의도 없는 이 장면과 다르게 사실 <사평역에서>는 초지일관 북극을 가리키는 나침반 같다.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 항쟁의 시대적 아픔과 이어서 풀이해야 한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에서 막차는 실제적인 막차이기보다는 마지막으로 귀가할 수 있는 희망의 막차,로 해석하면 시의 면모가 달라진다.

“송이 눈”은 개인적으로 아름답고 포근하게 다가오지만, 막상 사람들에게는 밤새 내린 ‘송이 눈’은 막차를 아예 오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될 수도 있으며, 현실적 비참한 상태를 감각적으로 변형한 시어다.

막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각기 다르다. 몇은 졸고, 몇은 쿨럭거린다. 같은 현실을 바라보는 그들의 반응은 이처럼 다르다. 화자는 톱밥 난로의 온기를 느끼며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톱밥을 넣는다. 마치 이 힘겨운 시간들이 조금 나아지길 바라는 그가 할 수 있는 최소한 노력인 것처럼 보인다.


‘눈꽃의 화음’은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잘못되어 가고 있는 현실들이 중첩적으로 서로 화음을 이루며 나아가니, ‘자정’은 눈이 완전히 쌓여 절정이 되는 순간이고, ‘설원’이 된다, 함은 눈으로 완전히 덮여 아무것도 변할 것이 없는 비참한 현실을 말하니, 여기가 이 클라이맥스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톱밥을 난로에 던지는 일이었다.

그러나, 자정이 넘으면 설원에서처럼 사방에서 눈이 몰아치고 기댈 나무 한 그루조차 없다. 화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눈물을 난로에던지’는 게 고작이다. 애석함, 속수무책 한 심정이 느껴진다.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침묵했다. 어떤 사람들은 졸았다. 사실을 외면했다는 의미로도 해석 가능하다. 그리고 술에 취한 것은 현실을 잊기 위한 도피적 행위 중에 하나이다. 굴비 같은 귀한 생선을 들고 가는 것처럼 사과를 광주리 들고 가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행위다. 그렇게 귀향함은 소중하고 진실한 공간 고향까지 위선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극단의 극단을 달리는 게다.

이 시와 기형도 시인의 <입속의 검은 잎>을 연결해서 읽으면 그 심상과 시적 화자의 울적함이 더욱 잘 전해질 듯하다.

개중에 아름다운 시어를 뽑아보자.


수수꽃 눈 시린”앞뒤 다 떼어내고 수수꽃 눈 시린의 어감에만 폭 빠졌다.

“톱밥 난로” 장작 난로, 석유난로, 전기난로 중에서 톱밥을 불을 지피는 난로가 제일 낭만적이다. 시인이 직접 경험한 것일까. 찾아낸 말일까.

“싸륵싸륵” 백석 시인의 <나탸샤와 흰 당나귀>에서 ‘눈이 푹푹 나리고’의 청각 이미지가 어딜 가도 따라다녔다. 이제는 눈꽃이 쌓이는 걸 보면 “싸륵싸륵’ 이라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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