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생활]일요일 아침 조깅

남자를 많이 만나다

by 원더혜숙

슈퍼 팜플렛(독일은 슈퍼에서 일주일 단위로 각종 생활용품을 싸게 판다. 새로운 상품을 광고하는 팜플렛이 매주 배달된다.)에 샤워를 하는 남자가 육감적이다. ‘이거 봤어?’ ‘나도 반했어.’ 남편이 웃었다. '다 포토샵이야. 실제로는 그런 몸일 수가 없지.' 기본은 되니깐 이 정도지. 남편이 그런 몸을 가졌다고 잠시 상상했다.

새벽에 오늘 할 일을 끝냈다. 이틀 산책을 뺐고, 기어코 오전에 러닝을 가야 한다. ‘지금 온도는 11도입니다.’ 알렉사(아마존에코)가 말했다. 검은 레깅스에 핑크색 긴 팔 셔츠를 입고 상투머리를 하고 선 캡 모자를 썼다. 일요일 오전 10시, 도로변 주차된 차들이 많다. 새소리가 드문드문 들린다. 이 동네는 연보라, 하얀색 라일락이 집집마다 한두 그루씩 있다. 뒷 정원 사이에 난 좁은 길을 따라 돌았다. 오른쪽 어떤 정원의 연못에 물이 찰랑거렸다. 파란 붓꽃이 울타리 밑을 장식하고, 햇살이 가득하다. 러닝 하기 완벽해.



몸이 가볍다. ‘천천히 나아가자. 경쟁하는 거 아니니깐.’ 누가 민들레를 뜯어 홀씨는 날려버리고 줄기만 버렸다. 납작해져 버린 민들레 줄기가 30센티는 되겠는걸.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돌렸는데 남자와 얼굴이 마주쳤다. ‘할로’ ‘좋은 아침이에요.’ 아침 처음 만난 남자다. 수염과 머리가 덥부수룩하다. 코로나로 남자들은 부쩍 자연스러워졌어. 도로에 도요타 푸리오스가 지나간다. 우리 집 찬데 까맣다. 이 도시는 실버 두 대와 파란색밖에 없을 텐데, 외지 찬가? 살짝 덥다.

벚나무에 까만 버찌가 달렸다. 작은 버찌는 까만 게 터트리면 검붉은 피가 난다. 달짝지근하지만, 그냥은 못 먹는다. 꽃이 잎보다 먼저 피는 왕벚꽃나무가 가득한 시즈오카 순푸공원에 친구들과 돗자리를 펴 놓고 앉았다. 어디선가 야키소바 볶는 간장 냄새가 퍼진다. 만개한 하얀 벚꽃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로 공원은 북적였다. 히로미는 가라아게(닭고기를 녹말을 묻혀 튀긴 일본 튀김요리)를 싸왔고, 료오코는 오니기리를 만들어 왔다. 돗자리까지 누가 챙겨 왔다. 아르바이트에 수업 듣기도 빡빡할 건데, 친구를 위해 정성스럽게 도시락을 쌌다. 고마워. 여기는 환한 벚꽃 길은 없지만 마음을 나눌 친구는 있지 않은가.

1킬로미터

언덕길 끝에 걸음이 불편해 보이는 할아버지가 긴 다리를 자랑하고 천천히 걷고 있었다. 까만 닥스훈트와 함께다. 아침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하루가 달라지는 것 같아. 하는 생각을 하며 기분이 가벼웠다. ‘구텐 모르겐.’ ‘하, 할로.’ 할아버지가 뭐라 그랬다. 못 알아들었다. ‘개가 닥스훈트 맞죠?’ 속도를 늦추고 할아버지를 봤다. 고개를 끄덕인다. 닥스훈트의 배가 축 늘어졌고, 둔해 보였다.

‘닥스훈트 맞죠? 뚱뚱한 것 같아요.’ ‘응, 그렇지. 아들 셋을 낳아서 그래. 저 개가 내 시야를 넓혀줘. ‘그게 무슨 말일까.’ 개 덕분에 밖으로 나올 수 있다는 말이겠지. 할아버지는 ‘즐거운 일요일 보내’라고 인사하고 개를 따랐다.


산에서 새가 운다. 왼쪽 들판은 말끔하다. 풀을 다 깎았다. 햇빛에 말라버린 푸른 회색빛 풀은 가지런히 누워있다. 멀리서 오뚝이 중년커플이 걸어왔다. ‘할로.’ 비 오는 날 인사를 하지 않고 지났던 커플인가? 햇빛은 기분에 이다지도 영향을 주는구나. 길가에 연보라색 수국이 피었다. 이제 오르막길이다. ‘평평한 길’ 표지판에 방향이 없다. 설마 내가 가는 오르막길을 가리키는 건 아니겠지.

3킬로미터

2미터 높이까지 쌓은 반듯한 나무 탑 옆에 그들의 나뭇가지들이 지저분하게 널려 있다. 서 있으면 커 보이던 나무도 이렇게 토막 내면 짧게 보인다. 트랙터가 건너편 길까지 가르마를 냈다. 그 사이로 바람이 내게 왔다. 길가에 무성하던 나무가 사라져서 허전하다. 그래도 남아있는 나무 녹색 이파리는 빛이 투과해 환히 비치도록 맑다. 나를 위해서 달리는 건데, 쉬엄쉬엄해도 되지. 멈추자 땀이 맺혔다.


전나무 밑 둥지는 잔가지만 남겨두고 나뭇잎이 없다. 머리에만 이파리가 붙어서 가분수처럼 어색하다. 울창한 숲에서 아래는 햇빛을 못 받으니깐 그럴까. 아님 키만 크려고 스스로 잎을 떨어뜨린 걸까. 앞으로만 나아가려면 옆을 못 보고 옆만 보면 높이 크지 못하는 것인가.


숨을 참고 있는 나를 어린 전나무 무리가 갓길에서 맞아준다. 선명한 트랙터 자국이 산 깊숙이 나 있다. ‘꿩이다.’ 비둘기처럼 회색인데, 꼬리가 길다. 구구 구하지도 않고, 푸드덕 날아가는 폼이 비둘기와는 달리 날쌔다. 아까 전나무 숲에서 봤던 한 쌍이다. 여기서 뭘 하는 거지?


48분. 언제 5킬로를 지났을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내리막길, 이 길을 쌩쌩 달려 본 지 오래다. 속도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 달리기를 오랫동안 하고 싶을 뿐이야. 개미가 바짝 마른 길을 정신없이 지나간다.



6킬로미터

자이언트 트랙터가 내 뒤를 쫓고 있었다. 비켜섰다. 잘 생긴 청년이 고맙다고 손을 흔들었다. 별말씀을요. 트랙터는 자전거 길을 다 채웠다. 안 비켰으면 깔려 죽을 수도 있었어요. 도로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들어온 남자가 나를 한 번 힐끗 봤다. 티셔츠를 벗을 건가 보다. 하늘 위로 눈을 고정했다. 하늘이 푸르다.

도로에 까만 가죽옷을 차려입은 바이커가 여섯이나 지나갔다. 이어서 사이클 자전거 탄 남자 둘이 타이트한 옷을 입고 근육질 다리로 야무지게 페달을 밟았지만 차에게 밀린다. 파란 차를 모는 젊은 여자는 얼른 비켜 서려는 듯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웅웅했다. 노란색 오픈카가 지나간다. 바야흐로 오픈카와 클래식 차의 전성기다. 여름이면 차고에서 잠자고 있던 낡은 차를 끌고 드라이브를 가는 독일인을 종종 본다. 남편은 햇빛이 뜨거워 모자를 써야 하면서도 오픈카를 타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지만, 멋이지.


빨간 유모차를 끌고 아담한 키에 아기 엄마. 할로 어.. 할로. 크리스티나다. 올 초부터 일을 다시 시작해서 만날 기회가 전혀 없었는데, 파란색 나시를 입은 그녀의 얼굴은 밝았다. 계속 가. 근데 너네 잘 지내지? 우리야 잘 지내지. 너네는? 건강 조심하렴. 안녕. 날은 좋고, 그녀 얼굴도 좋다.

8. 03킬로미터 1:02:23

왼쪽 고관절이 아프다. 멈추자.

힘들고 아프면 멈추는 법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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