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잘 못해서

by 원더혜숙



지원은 남편이 읽기를 바라고, 필요한 건 처리할 수 있게 보험회사, 세금, 월급 명세서 편지를 열어 첫 구절만 읽고 부엌 상판에 올려 둔다. 그녀의 예상대로, 퇴근 후 남편은 중요한 편지를 읽고 그대로 내려뒀다. 부엌 개수대에서 서류에 물이 튀고, 다시 마르기를 며칠, 눈에 거슬리는 서류를 지원은 거실 캐비닛 위의 서류 보관함에 올린다. 이미 백과사전만큼 서류 뭉치들이 두껍게 쌓였다. 아파트 계약서, 보험 증서, 체육 클럽 가입서까지.


지원은 채워 둔 월급 명세서가 세금 정산을 할 때 꼭 어디로 사라지는지 알 수 없었다. 세금 정산을 하며 기억을 짜내며 어디에 뒀는지 찾는 신경이 예민한 남편이 어디에 뒀냐고 추궁할 때 찡그린 얼굴로 서류 보관함을 가리킨다. 그런 일이 한두 번 아니었던 걸 기억하면서도 지원은 버리지 않고 아예 정리를 하지 않지 않는 것이 서류 분실과 수색의 책임 그리고 그의 추궁에서 손 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늦어지면 연체되는 벌금은 재빨리 내고, 남편이 소파에서 휴대폰으로 뭔가를 신나게 보고 있을 때, 더 이상 늦어지면 안 되는 것을 하나씩 꺼내 그의 편안한 주말을 약간의 의무를 쥐어줬다.


“당신, 세금 정산해야 하는 거 아냐?”

“당신, 3층 보수는 언제 할 거지?”

“당신, 집 고치러 사람들이 언제 오기로 했지?”



아이가 둘이라 지원과 남편은 공평하게 학부모 회의를 나눠서 가고, 아이들 방과 후 축구와 기타 수업 챙기기, 가정 통신문 읽기 유치원 상담은 지원이 3년 전부터 전담했다.


4계절 자동차 타이어 교체, 자동차 정기 점검 같은 일은 예약을 해주면 바쁜 남편을 위해 지원은 대신 갔다. 그러나 집수리에 필요한 회사와 일꾼 고용하기, 작업 중에 지시하기, 세무 환급과 보험 일, 집 공증 관련은 남편의 손에 맡긴다.



지원은 자신이 독일이 아닌 모국에서 살았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가장 먼저, 가정 주부라는 앞치마를 입지도 않았을 것이다. 집에 있더라도 자기 계발 교육에 분주했을 것이고, 관공서와 세금 관련 일을 전적으로 자신이 도맡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더 적극적으로 문의하고 남편보다 먼저 일 처리했을 것 같다.


8년 전, 100년이 된 헌 집을 사고 처음 문 수리 일꾼들을 불렀다. 지원은 그들 앞에서 당당하게 남편이 원하는 결과를 생각하고 그 기준에서 작업이 잘 진행되고 있는지 컨트롤하고 또 커피라도 대접하면서 안주인 노릇을 톡톡히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지원은 자신이 남편보다 더 까다롭고, 일꾼들의 작업을 점검하게 되면 좀 더 진행이 늦어질 것이며 그들을 힘들게 할 것을 예상했지만 언어의 장벽 뒤에 가만히 몸을 사리고 있었다. 일꾼들이 시끄럽게 전기 드릴과 망치 소리를 내더라도 지원은 작업이 끝날 때까지 흔들의자에 앉아 고요히 낮잠을 잤다.



학기 중 가정 통신문을 읽고 보호자 사인을 하고 기한에 맞춰 넘기거나, 최소한 아이 식단 주문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등 지원은 챙겨야 할 일이 많았다. 학기 중에는 지나가다 부딪친 학부모와 대화하고 담임 선생님과 학기 동안의 발달을 논의할 기회, 학부모 회의 등 독일어를 해야 할 기회는 많았다. 그와 더불어 지원은 긴장하고 일부러 독일어 원서나 동화책 책을 낭독하는 노력을 했다. 방학 전 지원은 자신의 독일어 능력과 사교 능력이 절정에 달한 것 같아 미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의 안부와 근황을 묻고, 커피 한잔까지 한잔 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애쓰며 힘껏 달리고 나면, 애들 방학이면 지원의 긴장도 풀렸다. 남편과 편하게 영어로 대화하고, 아이들 밥을 챙겨주고 어떤 놀이를 허락해주고 활동을 하는 등의 간단한 소통에서 독일어와 한국어를 섞여서 말한다. 지원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잘 모르는 타인과 긴장하며 말하는 기회가 적다. 독일어 낭독도 쉬고, 독일 텔레비전도 거의 보질 않으니 독일어와도 작별하고 휴식한다.



휴가는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면 다시 학교에 돌아가는 아이들처럼 지원의 마음이 움츠러든다. 독일어 자신감이 소멸한다. 푹 쉰 뇌는 잘 써 왔던 단어도 망각하고, 문법을 엇갈리게 배치하고, 적합한 단어를 머릿속 단어장에서 느리게 꺼냈다. 지원은 그런 모습, 바보 같은 모습을 타인에게 보여주는 게 싫다. 실수하고,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다른 식으로 했어야지 후회하고 다른 시뮬레이션을 반복해서 진행한다. 그런 자신이 부끄럽다. 그런 자신이 싫어서 실수를 방지하려고 긴장한다.



학기 초에는 학부모나 이웃을 만나면 피한다. 되도록이면 그들과 대화할 시간을 줄인다. 길을 가다 멀리서 지인이 멀리서 보이면, 설사 그들과 식사도 한번 했고 오랫동안 대화한 경험이 있더라도 우회하거나 할로만 하고, 그들이 다른 말을 꺼내 전에 얼른 자리를 뜨거나, 대화 중에 다가오는 그들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져 선다. 지원은 조만간 다시 절정기가 올 것이고, 자신 있게 타인을 환영할 날이 오겠지만 그 당시는 자신 없다.



얼굴 붉히는 그런 경험 서너 번이 지원을 다시 궤도에 복귀시켰다. 학기초의 학부모 회의를 거치고 사람들을 많이 만나면 만날수록, 초반의 긴장과 스트레스는 어디로 증발했냐 싶게 지원은 누구보다 그런 상황과 사교를 즐겼다.


지원은 자기 마음이 콩알만큼 작아졌다가 큰 바위만큼 커졌다가 하는 걸 본다. 절벽에 매달려 수십 년을 버티는 큰 바위 마음일 때는 낯선이 와의 만남이 미묘하게 설렜다. 낮은 열에도 파삭거리고 갈라지기 시작하는 프라이팬 위의 콩알 마음일 때는 사람을 피해 에돌았다. 지원은 자신이 어떤 쪽에 더 가까운지 모르겠다.



휴가 후, 지원은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아미가를 포옹으로 맞았다. 바네사는 언제 만나도 마음 편하고 깔깔거리고 웃을 수 있는 지원의 친구이다. 둘은 커피를 마시면서 서로의 중요한 이슈를 나누었다. 대화가 무르익을 무렵, 바네사가 말했다.


“스페인 휴가 다녀오고 둘째 아이 입학 심사를 받았어. 결과가 너무 충격이야.”


독일에서는 초등학교 입학 전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 조건이 적합한지 시험한다. 언어와, 숫자 세기, 가벼운 운동 감각, 시력 테스트, 간단한 그림 그리기 등등. 그것에서 부모들은 아이가 심사관의 말을 잘 알아듣고 반응하는지 알아보는, 외국인 엄마의 경우 아이들의 독일어 수준을 체크하는 중요한 시험대이다.



“스페인 휴가 갔다 오고 나서는 독일어로 전환하는데 시간이 걸리잖아.”


지원은 바네사를 위로하는 당연한 말을 꺼냈다. 바네사가 그걸 모르는 건 아니다. 다만 둘째의 소극적인 평소 행동들과 그런 결과치가 그녀를 신경 쓰게 한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스펀지처럼 말랑한 뇌를 가진 아이들도 휴가 후에 독일어 환경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하물며 어른이야 더 그럴까. 지원은 아이는 너그럽게 이해하면서도 스스로에게는 그날 당장 독일어 원서를 백 쪽이라도 낭독해서 정상 궤도에 올리겠다고, 잠에서 깨어 바로 활동하고 몰두할 수 있다는 듯이 자신을 구석으로 몰았다.


경직된 마음이 상황을 악화시키고, 억지로 가속하면 도리어 해가 되어 스스로를 더 위축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다. 기계의 공회전이나 컴퓨터 프로그램의 몇 초간 점점 로딩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지만 지원은 자꾸 잊는다. 몸에 밴 버릇을 남의 살 베어내듯 떼기 어렵다는 걸 지원은 빈번히 느낀다.


keyword
이전 02화친구가 생겨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