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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키드 Aug 20. 2019

우울과 불안 사이

극단이 아니라 사이에 서고 싶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일상이 있다. 변하지 않는 일상이 아니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반복되는 그 일상 말이다. 정확히는 ‘일상’이라고 부르기 보다 ‘루틴’이라는 영어단어로 부르는 게 적절할 듯하다. 나의 루틴 중 하나는 기사를 읽는 일이다. 아침마다 주요 포털에 들어가 헤드라인으로 소개된 기사를 쭉 훑고 어떤 기사는 정독한다. 그러던 중 하나의 기사가 눈에 띄었다. 청년 세대와 장년 세대의 정서 연구 결과를 소개하는 뉴스이다. 헤드라인을 굳이 기억해보자면 <한국청년세대는 우울감, 장년 세대는 불안에 시달려>라는 타이틀이다. 익숙한 제목이다(?) 굳이 기사를 보지 않아도 추정할 만한 내용이다. 우리나라에서 아프지 않던 이가 있단 말인가.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 제목도 있지 않았던가. 아픈 게 일상이 된 나라, 그 나라가 내가 사는 땅이다. 



아침부터 굿 뉴스도 아니고 베드 뉴스에 눈길을 갔던 이유는 나 또한 이 정서를 익숙하게 체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전문적인 치료를 받지는 않지만, 우울과 불안은 익숙한 잠재된 정서이자 현실적 감정이다. 저 밑바닥에서는 이 정서가 꿈틀거리고 때로 적절한 기회를 보고 있으면 튀어나와 괴롭힌다. 그런데 기사를 읽으면서 오히려 나는 내심 안도했다. 왜냐고? 아이러니하게도 나 하나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주변에 누구도 자신이 이 불쾌한 정서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내면의 고통은 외면의 고통 보다 타인에게 드러내기 힘들다. 그렇기에 끙끙 앓다가 덧나고 곪아 버린다. 나는 우울증약을 복용하고 있다는 주변 이를 누구도 알지 못한다. 하물며 상담이나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는 이를 들어본 적도 없다. 그런 사람이 없어서라기 보다 다들 쉬쉬하고 숨기기 바쁠 것이다. 




익명의 통계로 조사해야 마음이 아픈 이들은 고개를 든다. 그렇지 않으면 내면의 고통을 선뜻 공개하는 사람은 없다. 사회적으로 잊을 만하면 기사로 상기되는 질병 중 하나가 조현병과 같은 정신 질환이다. 통계적 수치로 확인하면 이 질병의 범죄율은 평범한 이의 범죄율보다 현저하게 낮은데도 불구하고 앓던 이가 범죄라도 저지르면 굉장히 크게 부각된다. 그런데 사건의 화제성에 비해 그 휘발력도 강하다. 며칠 시간이 흐르면 언제 그랬듯이 우리는 잊는다. 사실 모든 기사가 그렇다. 시간의 무게를 견디고 계속해서 살아남는 기사는 없다. 매일매일 사건이고 사고니 누가 하나의 사건의 의미를 추적하겠는가. 



우리 사회에서 조현병뿐만 아니라 우울증, 공항장애와 같은 질병이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오히려 마음의 병이 창궐하는 사회가 바로 우리사회라 말할 수 있다. 조사에 따르면 OECD 국가 중 우리나라의 우을증 발병률은 1등이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적극적으로 정신적 치료를 받는 비율은 이들 국가 중 꼴등이다. 문득 나는 ‘너도 미쳤고 나도 미쳤고 우리 모두 미쳤다’는 <앨리스> 채셔고양이의 말이 떠올랐다. 모두 아프니 아픈 거 티내지 않는다고 할까. 그러나 나는 우울증과 불안을 보고하는 기사에서 그리고 조현병에 따른 범죄 보고 등에서 어떤 징후를 본다. 마음의 고통을 고백하는 이들은 우리사회의 카라니아인 셈이다. 옆에 동료보다 민감하게 병이 들고 보고하는 그 목소리에서 사회가 병들고 가족이 병드는 현실을 목격한다. 



앞선 기사 말미 연구자의 코멘트가 붙었다. 청년과 장년이 겪는 부정적 정서를 조절하기 위해서 ‘자기통제’가 중요하다고.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게 골칫거리 아닌가. 하나마나한 조언 앞에서 잠시 나는 고개를 떨궜다. 대단한 답변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맥아리 없는 그 응답 속에 출구 없는 갑갑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전문가의 영역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아픈 이가 너무 많다. 기사 말미 게시판에 달린 댓글 속에서 수많은 이가 자신의 증세를 고백한다. 나 또한 한때는 저 불쾌한 정서가 현실에서 튀어나와 무력감에 시달렸다. 



마음의 병에 완치 따위는 없다. 경감 정도가 최선이라고 믿는다. 내가 이를 위하여 가진 마음가짐은 자기애였다. 사회적 관계에서 발생한 무력감을 이겨내기 위해 상처난 자존감, 자존심, 자부심 따위를 신경쓰기 보다 자신을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 설사 그것이 나르시시즘이 될지언정 말이다. 우리는 사회적 존재이기에 그 관계에서 파생한 다양한 긍정적, 부정적 정서와 감정을 느끼고 산다. 긍정적 감정이야 무슨 문제랴. 문제는 부정적인 것을 완화하는 일이다. 관계에서 얻을 이 감정의 대안도 중요하겠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지녀야 하는 감정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생활에서 자기애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잘 먹고, 잘 자고, 잘 운동하는 등 노력한다. 그리고 글쓰기도 자기애를 위한 실천의 하나다. 이 실천 속에서 오늘 나는 우울과 불안 사이 어딘가에 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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