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 기억

by WonderPaul

지난 늦가을부터 일주일에 한 번은 친구와 회사 근처에서 점심을 먹는다. 그녀는 지난 직장에서 만난 절친한 빵친구다. 그녀와 다시 점심 친구가 된 일은 2025년 가장 특별한 이벤트로 꼽을 수 있다. 각자 회사 중간쯤에서 만나 밥을 먹고 나면 테이크아웃 커피를 손에서 몇 분 돌리다 헤어지기도 빠듯하지만, 회사와 무관하게 편하게 만날 한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


게다가 좋아하는 빵을 교환할 수도 있다. 당연하다. 우리가 친해진 것도 다 빵 덕분이었으니. 지난 12월에는 최근 맛본 동네 빵집 사진을 보여주자마자 그녀는 빵 주문을 부탁했다. 역시 빵순이끼리는 많은 말이 필요 없다. 말 그대로 양손에 빵 봉지를 들고 칼바람 부는 거리를 걸으면서 얼마나 뿌듯했던지. 그날 2kg이 넘는 빵을 샀다는 소식을 전하자 그녀가 늦은 밤 조심스러움이 넘치는 메시지를 보냈다. 빵을 내용물이 안 보이는 깊은 봉투에 담아서 가져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회사 사람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데, 이유는 나눠 먹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 마음을 왜 모르겠어. 나는 이미 방 한쪽에 놓여있는 깊은 빵 봉투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이렇게나 잘 통하는 빵순이다.


소화력도 대사량도 하루하루가 다른 40대로서 이제 빵도 더 좋은 걸로 엄선해야 먹을 수밖에 없다. 좋아하는 걸 마음껏 먹을 수 있는 때가 이미 지나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나이가 들면서 변하는 건 참 많다. 최근에는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는 말을 실감한다. 물리적 거리가 중요하다는 사실은 비단 친구 관계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뭐든 거리가 중요하다. 무엇보다 회사와의 거리는 더욱 중요하다. 에휴. 어쨌든, 인천 끝 마을에 사는 사람으로서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친구도 얼마 없는데, 빵순이 친구를 만날 수 있는 제철이 찾아왔으니 충분히 누리자.


겨울은 우리 가족에게 중요한 계절이다. 공교롭게도 생일이 겨울에 모여있는데, 이때가 지나면 케이크 보릿고개가 찾아오기 때문에 생일 주인공이 고르는 케이크도 그만큼 중요하다. 주인공 취향대로 고르긴 하지만 다른 가족들 입맛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가장 먼저 생일을 맞은 동생은 겨울 제철 키리쉬를 선택했다. 곧 내 차례인데, 아직 고민 중이다. 아주 훌륭한 초콜릿케이크를 찾고 싶다. 몇 해 전 먹었던 오뗄두스 후람보아즈 쇼콜라케이크가 참 맛있었는데, 우선 후보에 올려 두었다. 겨울엔 아무래도 초코케이크를 벗어나기 힘들다. 사시사철 맛있지만 초콜릿은 겨울이 제철이다.


몇 주 동안 장바구니에 넣었다 뺐다 반복했던 핫초코를 결국 주문했다. 핫초코야말로 이렇게 시린 겨울에 마셔야 가장 맛있으니까 기회가 있을 때 잡아야지. 칠리와 시나몬이 들어가 끝맛이 독특한 핫초코로 주문했다. 누구와도 나누지 않고 혼자 먹을 생각이었지만 동생에게, 빵친구에게 하나씩 나눠 주었다. 오랜 고민 끝에 마침내 손에 쥔 핫초코. 따뜻한, 그보다는 조금 뜨거운 핫초코를 천천히 불어 마시면서 책장을 넘기는 촉각을 핫초코에 대한 기억으로 남겼다.

소금빵도 겨울이 가장 맛있다. 겉바속촉을 잘 유지할 수 있는 계절인 데다, 차가운 바깥 공기와 대비되는 소금빵 온기가 천천히 퍼지면 맛을 더 오래 음미할 수 있다. 지난주에 동생이 우리 가족 최애 소금빵집에서 갓 나온 소금빵을 한 자루 사 왔다. 워낙 인기가 많은 빵집이라 그동안 헛걸음도 여러 번 했는데, 운 좋게도 빵이 나오는 시간에 맞춰 방문했던 것이다. 1월의 행운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저녁을 배불리 먹고 다닥다닥 붙어 앉아서 이불을 덮고 소금빵을 먹으면서 가루 좀 흘리지 말라고 서로 잔소리한 기억을 머릿속에 잘 남겨두었다.

밤이 길어서일까. 요즘 추리 콘텐츠가 좋아졌다. 챗놈(동생은 chatGPT를 이렇게 부른다.)에게 겨울에 추리소설이 좋아지는 과학적 근거를 물었더니 그럴싸하게 답했다. 추위, 어둠, 긴 밤은 인간의 경계수준, 막연한 불안, 긴장감을 높이고 추리소설은 혼란스러운 사건이 논리와 질서로 정리되기 때문에 불안을 자극하면서도 동시에 해소해 주는 장르라도 말했다. 미학적으로도 계절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고 했다. 아무래도 외딴 저택, 밀실, 눈 내린 마을, 밤은 겨울이 제격이니까.


여름에는 정유정을 읽듯이, 이번 겨울에는 토마스 쿡을 다시 읽는다. 토마스 쿡을 읽고 나서는 <악인의 서사>를 전자 서점 책장에 넣어두었다. 12월에 공개된 나이브스아웃 3도 재미있게 봤다. 유튜브 채널에서도 애거서 크리스티 원작의 고전 영화를 본다. 앤서니 버클리의 <독 초콜릿 사건>을 읽고 싶은데, 밀리의 서재에도 크레마 클럽에도 없다. 동네 도서관에서 찾아봐야겠다.


나이가 들면 기억할 수 있는 정보도 적어지니까 좋은 기억은 저장소에 넣기 전에 좀 더 정성을 들여 포장해야한다. 점심 메이트는 멀리에서 손 흔들며 다가오는 표정으로, 겨울 케이크는 박수 소리로, 핫초코는 책장이 닿는 촉감으로, 소금빵은 잔소리로, 추리물은 범인이 보이는 창문으로, 새로운 꼬리표를 붙여 겨울 기억 저장소에 넣었다. 내년 겨울에 다시 꺼낼 때 이번에 저장한 모든 기억을 신선하게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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