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물놀이에 따라갔다가 중학교 동창을 만났다. 한 번도 친해본 적 없었지만 그래도 반가워할만한 동창이었다. 얘기 중에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묻길래 도서관에서 일한다고 했다. 사서라고 말할걸. 애매하게 왜 도서관에서 일한다고 했을까 뒤늦게 아쉬웠다. 그 애가 와, 잘 어울린다. 너 책 좋아했잖아. 그랬다.
에피소드 하나 더. 결혼 전에 남편 친구들에게 인사하는 자리가 있었다. 나더러 어디 다니냐고 물었다. ‘도서관이요.’ 직장을 물어본 게 아니었던 걸까? 이어 ‘무슨 공부하세요?’라는 질문이 돌아왔다. 남편 또한 내 나이와, 사는 동네, 도서관에 다닌다는 정보만 듣고 나를 만나러 오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고 했다. ‘ 스물아홉 살에 아직 공부하는구나.‘
어떤 사람들에겐 도서관이 곧 책이고 어떤 사람들에겐 곧 공부렷다. 그 이분화된 이용 패턴이 숨 막힌다. 나는 책이 만드는 연결을 생각하며 도서관에서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일하다 보니 연결이 만드는 회복, 회복이 만드는 평화, 평화가 만드는 사회까지 꿈꾸게 됐다. 책은 목표가 아니라 그냥 도구다. 도서관에서 하는 공부는 다른 게 아니라 삶을 위한 공부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자랐다. 꽤 많은 사람들은 무엇도 평가하지 않는 도서관에서 평가를 위한 공부를 하며 밤늦게까지 머무르다 간다. 나(도서관)는 열한 시까지 불 켜진 학습실을 지켜보면서 쓸쓸하다. 사랑받고 싶은 것 같다. 도서관도 사랑받고 싶다.
사랑받는 느낌은 언제 오는가? 사랑한다고 말할 때, 다정하게 대해줄 때, 내 마음을 알아줄 때, 같이 가자고 할 때 등등. 사랑을 주는 사람들은 학습실 밖에 있다. 응당 누려야 할 것을 누리면서 고맙다고 말할 때, 반가워할 때, 기대할 때, 도서관은 사랑받는다고 느낀다. 도서관이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줄 알아야 예산도 적당히 주련만, 사랑도 못 받는 주제에 달라는 게 왜 그렇게 많냐는 듯 빠듯도 않게, 한참 모자라게 준다. 도서관이 삶이 아니라, 책 아니면 공부에만 매달리며 예산도 못 받는 사이, 책도 아니고 공부도 아닌 사람들이 도서관에 있지도 않은 문턱을 넘지 못한다. 도서관은 쓸쓸하다.
거기에 불을 지피는 건 주말을 제외한 빨간 날 운영시간 안내하는 상황이다. 자료실은 9 to 6인데 학습실은 8 to 23이다.
그 사실에 대해서 더 붙일 말이 없다. 그게 우리 도서관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한다. 나라는 사람이 가진 사서 정체성을 완전히 가로지른다. 한 방향을 바라보지 못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내가 얼마나 괴로운지는 나만 알겠지. 그렇게 안 맞으면 떠나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 최종 면접을 볼 때 누구나 받는 그 질문 ’왜 공무원이 되려고 하느냐 ‘는 질문을 받았다. 공공이라는 안정성 안에서 내가 꿈꾸는 도서관을 만들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펼쳐가겠다는 아름다운 의미를 다른 워딩으로 대답했던 것 같다. 고로 떠날 수 없다. 되어 가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