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우리 세 명은 함께 태어났다.
어제 마음도, 외모도 아주 예쁜 선생님께 아주 멋진 선물을 받았다. 선생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런 분이 내게 건넨 선물은 바로 <엄마 도감>. 첫 문장부터 내 가슴을 울렸다. 아이의 시선에서 엄마를 바라본, 놀라운 그림책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읽어 본 그림책들은 모두 엄마의 시선에서 아이를 바라보거나 아이에게 하고 싶은 말, 즉 세상 그 무엇보다 널 사랑한다는 말을 여러 가지로 표현하는 그림책들만 봤는데 이런 책이 있다니 세상에나 마상에나.
맞다. 나도 아이가 태어나던 날 엄마로 태어났다. 남편을 만나 여자친구라는 귀여운 호칭이 생겼고 프러포즈를 하고 난 후 웨딩박람회에 가서 스드메 계약을 한 이후로 예비신부님이라는 호칭을 얻었다. 결혼을 준비하며 내 이름 뒤에 따라오는 세 글자가 어색했지만 싫지 않았다. 원지윤 신부님. 결혼을 하고 여러 이름들로 불렸다. 아내, 며느리, 옆집 새댁. 그렇게 불리는 것이 조금 익숙해질 때쯤 아이가 찾아왔다. 예정일이 지나도 기척이 없어 무심코 샀던 임신테스트기. 두 줄을 보고 어안이 벙벙해서 병원을 찾았다. 수납을 하는데 아기수첩에 간호사님이 정성스레 써주셨다. 원지윤 산모님. 신부에서 새댁, 그리고 산모가 되었다. 그렇게 열 달을 산모로 불렸다. 아이가 태어났다. 첫 예방접종을 맞히는 날. 김서준 어머님. 엄마가 된 순간 내 이름 세 글자는 어머님이라는 넓고 아름다운 이름 뒤에 흔적도 없이 숨어버렸다. 누군가의 엄마라는 이름이 행복하기도 했지만 버거운 순간들도 있었다.
아마도 처음부터 잘하려고 너무 힘을 준 탓이리라. 엄마로 태어난 지 십 년이 지나서야 깨닫는다. (이제는 조금 힘 뺄 줄 알게 된 나름 열 살 엄마.ㅎㅎ) 엄마도 딱 아이의 개월수만큼만 클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땐 몰랐다. 난 능숙해야 했고 허둥대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엔 너무도 나약한 엄마였다. 엄마도 처음이라면서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으며 나 자신에게 화가 날 때도 있었다. 그런 시간들이 흘러 지금 열 살 엄마가 되었다. 십 년이라는 시간이 말처럼 쉽게 흐르진 않았다. 지름길도 없었고 정답도 없었다. 나만의 길과 나만의 방식을 찾아야 했다.
나도 엄마로 태어나 목을 가누고 뒤집기를 하고 기어 다니다가 콕 이마를 찧기도 하고 앉다가 뒤로 발라당 넘어가기도 했다. 보행기도 탔다. 서서 바라보는 세상은 또 달랐다. 용기를 내어 한 발을 뗐다. 그러다 넘어져 울기도 하고 엄마를 부르기도 했다. 첫 기관에 가는 날 아이와 함께 울었다. 내가 모르는 아이의 세상이 생기는 것이 두려웠다. 그것도 잠시 아이가 유치원에 가면 나도 아르바이트에 갔다. 그렇게 나도 아이가 모르는 내 세상이 생겼다. 우리는 점점 자랐다. 지금도 자라고 있다.
내가 보는 유일한 TV 프로그램은 주말드라마다. 하루 종일 틀어놓을 만큼 드라마를 좋아했던 두 할머니의 정서를 닮아서인지, 드라마를 보면 할머니들을 만나는 시간처럼 안정감을 느낀다. 두 남녀의 결혼을 완강히 반대하는 남자주인공 엄마가 나왔다. 우리 아이가 남자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이 되었는지, 갑자기 "엄마는 빠져~!!!!!!"라고 했다. 순간 남편과 나는 웃음이 빵 터졌고 그렇게 우리는 한참을 웃었다. 한참을 웃다가 점점 마음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서운하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하고 언제 이렇게 컸나 싶기도 하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 맞아. 아이도 나도 남편도 자라고 있지. 오은영 박사님 말에 의하면 육아의 최종목표는 독립이라던데.'
서운해하는 기색을 알아차린 남편이 양팔을 벌리며 말했다.
"여보, 이리로 빠질 준비 하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