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는 아내의 생일 주간이었는데요. 생일 주간이라는 표현은 우리 가족들이 재미 삼아 쓰는 말입니다. 생일이 있는 한 주는 서로 좀 더 잘해주자는 의미를 가지고 암묵적으로 시행하는 가정 내 정책이죠.
원래 저나 아내나 생일선물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할 나이는 아닙니다. 그동안 원하는 선물을 주로 먼저 물어보기도 하고 돈으로 주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평소에도 서로 뭘 받고 싶다고 딱히 말하지는 않는다는 점이죠.
그런데 올해 아내 생일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바로 흑백요리사 식당 음식선물입니다.
지난 글에서 올렸듯 저희 가족은 <흑백요리사>의 열혈팬입니다. 각자 가장 좋아하는 셰프들은 다르지만 아내의 원픽은 정지선 셰프였죠. 남성들이 주류인 요리계, 특히 중화요리 분야에서 여성으로 버텨내고 일가를 이루어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동안 방송에서 보여줬던 남다른 카리스마 또한 인상적이기도 했죠.
아내가 이 정지선 셰프가 운영하는 '티앤미미'라는 식당에서 밥을 먹어보고 싶다고 해서 이 생일선물 미션은 시작되었습니다.
문제는 <흑백요리사>에 출연하셨던 분들의 식당에 손님들이 어마어마하게 몰린다는 점이었습니다. 일부 식당은 새벽 4시부터 와서 기다리는 분들도 계시다는 기사가 나기도 했었죠. 다른 식당들도 크게 차이가 없었기에 이 미션이 더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는 했습니다.
그런 상황이어서 아내의 소원이 쉽게 이루어질지는 미지수였죠.
궁리 끝에 제가 묘수를 냈습니다. 야간근무가 끝나고 교대를 한 뒤 곧바로 식당으로 달려가기로 말이죠. 아침 8시에 근무 교대를 하니까 식당이 있는 홍대에는 9시쯤 도착할 테고 그때 가서 미리 번호표를 받아놓으면 무난히 점심을 먹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죠.
그리고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식당이 오픈하는 시간인 11시에 맞춰서 오면 저 한 사람만 2시간을 할애하면 되니까 아주 합리적인 투자처럼 보였습니다.
사실 줄을 서서 음식을 먹는 방식을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 시간도 아깝고 나중에 사람이 없을 때 와서 먹으면 되지 않냐고 생각해서였죠. 굳이 줄을 섰던 기억이라면 아이들 장난감이었던 터닝메카드를 선착순으로 살 때 그때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제 시간과 노력을 생일선물로 받고 싶다고 하니 어쩌겠습니까. 해야겠죠.
교대 근무를 마치고 곧바로 지하철을 타고 식당을 찾아갔습니다. 찾기 어렵지는 않더군요. 호텔 로비 4층에 식당이 있었기에 신기했습니다. 도착해서 주위를 둘러보니 로비에 있는 소파에 이미 스무 명 가까운 사람들이 앉아서 휴대폰을 보거나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죠.
호텔 손님인 듯도 하고 일찍 오셔서 순번을 받기 위해 계신 분들 같기도 한데 줄이 만들어져 있지 않아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죠. 불안함을 애써 감추고 식당 앞을 서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10시 10분부터 웨이팅 번호를 나눠주겠다는 안내문을 보고 좀 신경이 쓰이기는 했죠. 점점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거든요.
10분 정도 지난 9시 반정도 되었을까요. 갑자기 식당에서 직원 한 분이 나오시더니 이렇게 외칩니다.
줄을 서세요!
예상보다 빠른 웨이팅 등록에 당황하신 분도 보였습니다. 저는 소파에 앉아있지 않고 근처를 하이에나처럼 배회하고 있었기에 빠르게 줄을 설 수 있었습니다. 순식간에 줄을 선 사람들만 50명 가까이 되었습니다. 식당 입구에서부터 호텔 카운터까지 이어지는 놀라운 행렬이었죠. 다행히 저는 눈치와 동작이 빠른 편이어서 9번째 순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식당의 테이블이 15석이었는데 첫 번째 타임에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던 거죠. 이 기쁜 소식을 아내에게 알리고 원래 약속된 시간에 출발하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여의치 않으면 그냥 집 가까운 곳에서 먹자고 했었거든요.
아싸 성공!
나가는 길에 보니 이미 벌써 웨이팅이 마감되었다는 팻말이 붙어 있었습니다. 흑백요리사 셰프들이 운영하는 식당들이 요즘 순식간에 예약이 차버린다는 기사는 실제로 사실이었습니다.
앱으로 순번을 받고 카카오톡 메시지까지 받고 나니 안심이 되더군요. 덕분에 제게는 1시간 반의 자유시간이 생겼습니다. 근처에 있는 카페로 가서 일기도 쓰고 책도 읽고 그날 써야 할 글도 미리 작성하기로 합니다. 커다란 숙제를 끝내고 생긴 여유시간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더군요.
아내와 아이들이 시간에 맞춰서 도착해서 합류했습니다.
곧바로 식당으로 갑니다. 순번에 맞춰서 들어가서 음식을 고르기 시작했습니다. 정지선 셰프가 딤섬 요리로 이름을 날렸고 아이들도 좋아하는 메뉴인지라 다양하게 시켜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거리상 자주 갈 수 있는 곳은 아니지만 특별한 날, 특별한 기분을 내는 데는 꽤 훌륭한 선택이었죠.
지금까지 이렇게 생일선물을 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나름 괜찮았습니다. 선물 받은 사람의 만족도도 높았고요. 게다가 제가 깊게 고민하지 않고 몸으로 때울 수 있는 방식이기도 하니까요. 여기까지 오는 과정이 마냥 쉽지는 않았지만 모두 맛있게 먹었으니 그 가치는 한 셈입니다.
굳이 아쉬움이라면 정지선 셰프가 이날은 매장에 아직 출근하지 않았기에 얼굴을 보고 올 수는 없었다는 점이었죠.
이렇게 글과 사진으로 증거를 남겨놨으니 나중에 말다툼할 일이 생길 때가 생기면 오늘의 수고로움이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