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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르세우스 Dec 01. 2022

김치를 먹고픈 자여, 김장의 무게를 견뎌라



 저는 그리 귀하게 자란 편이 아닙니다. 그런데 공교롭게 김장과의 인연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께서 직장생활을 하시다 보니 아가끔씩  외가댁에 가서 간단한 심부름을 하고 맛있게 먹고 돌아오는 정도의 경험만 있었죠. 친가 쪽도 할머니께서 제가 어릴 적에 작고하셨기에 아쉽게도(?) 김장에 참여할 기회가 많지 않았습니다. 물론 김장에 대한 어머니의 입장은 다르시겠지만요.


 결혼을 한 뒤에도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본가에서는 따로 김장을 하지 않으셨고 처가에서는 김장을 하시지만 친분이 있는 네 집이 함께 모여서 각 가정의 김장을 도와주는 식의 품앗이로 하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직 아이가 어린 저희의 손이 크게 필요하지 않았죠. 매년 김장을 하실 때쯤이면 제가 하는 일은 처가에 들러 김장김치를 받은 뒤 안성 처 외조부님 댁과 서울 처제 집에 배달해주고 집으로 돌아오는 역할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공교롭게 제가 김장 업무에 본격적으로 투입되는 상황이 생겼습니다. 장인어른께서 무리를 하셨는지 컨디션이 무리한 활동을 감당하시기 녹록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지난 주말, 저는 배송기사의 역할에서 승진을 하여 김장에 직접 참여하는 영광스러운(?)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김장을 하는 날 이른 아침, 저는 처가인 충북 청주의 모처로 향했습니다. 두 시간여 만에 김장하는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날씨가 생각보다 훨씬 포근한 편이어서 야외에서 작업을 하는데도 그렇게 춥지 않아 그야말로 김장하기에 딱 좋은 날씨였습니다.    

11월 말에 22도는 실화냐?





 일단 도착하자마자 장모님을 비롯한 어른들과 인사를 나누기가 무섭게 밭으로 곧바로 투입됩니다. 김장에 쓰이는 것 말고 추가적으로 배추와 무를 가져오기 위해서입니다. 처가 어른이 아닌 다른 어르신의 밭으로 이동합니다. 10분 거리를 초면인 밭주인이신 어르신과 이동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열심히 대화를 시도합니다. 밭에서 무와 배추를 뽑은 뒤에 차에 담고서 다시 작업현장으로 돌아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체험! 김장의 현장 속으로 들어갑니다. 쌓여있는 80포기의 배추를 보니 시간이 오래 걸리겠다는 막연한 걱정부터 들기 시작합니다. 절여진 배추와 빨간 대야에 담긴 양념을 보니 이미 어제부터 준비를 하시느라 어른들께서 고생이 많으셨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안타깝게도 경력직이 아니다 보니 제가 김장 속을 직접 채워 넣을 기회가 주어지지는 않습니다. 사진에서 보듯 이미 네 분의 어머님들께서 각자 위치를 잡으시고 속 넣기 작업을 하고 계셨거든요. 제가 오늘 진짜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었습니다.


ㅇ 김치가 김장통에 채워지면 옆으로 옮겨서 깨끗이 닦고 뚜껑 닫기

ㅇ 새로운 김치통 가져다 놓기

ㅇ 김장양념을 떠서 속 넣는 테이블 위로 옮겨드리기

ㅇ 절인 배추를 속 넣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기

ㅇ 어른들이 심심하시지 않게 말벗해드려서 싹싹한 모습 보여드리기




그렇게 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동시에 김장김치를 담는 과정도 유심히 지켜봅니다. 언젠가는 저도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배추 속을 채워 넣는 날이 오기를 바라면서 말이죠. 새 김치통에 차곡차곡 쌓이는 김치를 보니 전부다 제가 먹을 김치는 아니지만 뭔가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마치 테트리스를 하듯 크기를 맞춰서 김치통을 가득 채워 넣으면 뚜껑처럼 초록색 배춧잎으로 위를 덮습니다.




80포기 정도 하셨다고 하는데 배추가 커서 양이 꽤 많습니다. 배추 하나의 속을 넣는데 얼마나 걸리시나 궁금해서 장모님께서 작업하시는 걸 찍어봤는데 역시 손놀림에서 재야고수의 향기가 느껴집니다. 딱 1분 20초 컷입니다.

2배속 김장 영상




10시부터 참여하기 시작한 김장 활동은 12시 반 정도가 되어서야 끝이 납니다.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양념에 쪽파를 넣어서 파김치를 만드는 것으로 모든 김장김치를 만드는 활동은 마무리되었습니다.




담긴 김치들을 차에 싣습니다. 이 일은 어른들도 도와주셔서 수월하게 마무리합니다. 김치통은 옷에 묻을 수 있다 보니 허리의 힘보다는 팔의 힘으로 들 수밖에 없어 더 무겁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도 일단 오늘 고생해서 만든 김치들을 차에 다 싣고 나니 마음은 한결 편해집니다.



그런 뒤에 텃밭에 마련된 임시공간으로 가서 수육을 만들어서 장인 장모님을 포함해 어르신 여덟 분과 함께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맛있게 먹었으면 당연히 뒷정리도 해야겠지요. 장모님과 도란도란 함께 설거지도 마치고 나니 이제 정말 김장을 하는 판타지 세계를 떠나 현실세계로 돌아갈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장모님께서 감사하게도 남동생 네 김장김치까지 챙겨주신 덕분에 내려갈 때는 가볍게 갔지만 집으로 돌아올 때는 많은 김치통과 따뜻한 마음까지 더해져 묵직하게 돌아왔네요.


 직접 작업을 하지는 않고 잔심부름만 했지만 어릴 때와는 달리 김장이 참 손이 많이 가는 힘든 행사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줄 요약 : 이번 김치는 훨씬 더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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