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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 전문가를 향한 위대한 발걸음

by 페르세우스



안녕하세요, 자녀교육에 진심인 쌍둥이아빠 양원주입니다.



저는 최근 살림남으로서 또 한 번 적잖은 성장을 이뤄냈습니다. 지난주에 처가댁의 김장에 투입되어 많은 내공을 쌓고 와서입니다.




제 친가는 어머니께서 이모들과 외삼촌이 함께 모여서 하는 김장이 있지만 거리가 멀어서 제가 직접 가거나 따로 김치를 얻어오지는 않습니다. 대신 상대적으로 거리가 가까운 처가에서 김장을 하시고 그 김치를 가져와서 먹고 있죠.


근래 몇 년 동안 장인 장모님께서는 가까운 곳에 사시는 오랜 지인 세 집과 함께 평일에 날짜를 맞춰서 텃밭에다 베이스캠프를 차리고 작업을 하십니다. 그 일을 품앗이 형식으로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하는 방식이죠.




둥이들이 어렸을 때는 얻어먹기나 했지 따로 김장을 도와드리지는 못했습니다. 날짜가 정해지면 저 혼자서 김치를 받으러 내려가고 정해진 곳에 배달한 뒤 집으로 돌아오는 정도였죠.



그러다가 아이들이 많이 자라서 손이 덜 가기 시작한 3년 전부터는 본격적으로 저도 업무에 투입되기 시작했습니다.

김치통이 채워지면 옮기고 닦고 닫고 쌓고

새로운 김치통을 올려놓고

배추는 옮기고 양념은 퍼 나르는 등

초보자들이 하는 소소한 일들을 많이 해왔습니다.




보기와는 달리 귀하게 자라지는 않았으나 김장에서만큼은 매우 초보자여서입니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더 사정이 바뀌어 제 역할이 좀 더 많아졌다는 연락을 장모님께 받았습니다. 일종의 승진이죠. 일정이 바뀌는 통에 한 집이 김장날에 불출석을 하시게 되어 일손이 모자란다는 이유에서였죠.



이른 아침에 출발해서 텃밭에 도착해 보니 이미 김치 만들기는 한창입니다.

예전에 오면 인사를 드린 뒤에 '뭘 할까요?'라고 물어보고는 했지만 몇 번 해보고 나니 뭘 해야 할지 알아서 움직일 수 있게 됩니다. 서당개 삼 년 설이 왜 나왔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죠.





본격적으로 제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여러 소소한 일을 하기 시작합니다. 단순한 일이 마치고 나서 손이 잠깐 쉴 때는 곧바로 고무장갑을 끼고 김치통배추에 양념을 넣는 일도 합니다.


작년에 처음 잠깐동안 속 넣기를 할 때는 장모님은 물론이고 다른 어머님들마저도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양념을 너무 많이 넣는다', '양념을 너무 적게 넣는다'라는 등의 따뜻한 조언을 들었는데 이번에는 웬일인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제가 그만큼 성장했다는 의미겠지요.


그리고 제가 이번에 해야 할 역할은 두 가지가 더 있었습니다. 먼저 일하시는 어른들을 위한 주전부리인 치킨도 따로 챙겨가는 것이 하나였고요. 어르신들의 말벗을 해드리기 위해 애를 썼죠. 저를 겪은 분들은 아시겠지만 제가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가장 힘들어하는 일이 오디오가 끊어지는 순간입니다.


어른들이 말씀이 끊어지시면 제가 부지런히 이야기를 퍼 나릅니다. 그야말로 손도 발도 입도 모두 바쁜 날이었죠.





제대로 시작할 때부터 일을 거들어드릴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김장을 하는 텃밭에서 처가에 들렀다가 또 서울 처제네에 들렀다가 집으로 가야 하니 이동하는 시간만 해도 네 시간은 훌쩍 넘어가버려서였습니다.


점심을 먹는 시간을 빼면 고작해야 두 시간 정도만 일을 하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더 잽싸게 여러 일을 도우려고 애를 썼습니다. 다행히 부지런히 움직인 덕에 김장 당일 날에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해봤고 손이 제법 빠르다는 칭찬까지 들었으니 예전의 제 모습과 비교하면 괄목할 만한 성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우리 집과 처제네의 통까지 모두 김치를 담고 나니 장모님을 비롯해 어른들 모두 빨리 차에 싣고 올라가라며 성화십니다. 언제나 어른들은 자식들 걱정이신데 내려오면서 빨리 하고 빨리 가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제 마음이 죄송스러워지는 순간입니다.




처제네에 김치를 날라주고 집에 돌아와서 김치를 정리하고 나서야 제 오늘의 임무가 끝났습니다. 되돌아보니 물론 다른 일도 힘들지만 김치통 나르는 일 또한 여간 힘든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올해 김장에 저는 또 한 번 깨알만큼 도움을 드리고 많이 얻어왔습니다.


내년에 시간이 맞아지면 새벽에 내려가든지 전날에 내려가서 도와야겠습니다. 김장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들어간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동안 너무 쉽게 얻어먹은 듯해서 죄송한 마음도 들었고요. 올해는 작년보다 더 감사한 마음으로 김치를 먹으리라는 소소한 다짐도 해봅니다. 아이들에게도 김장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다시금 알려줘야겠어요.



어찌 되었든 김장대첩을 잘 마치고 와서 다행입니다. 저 대신 서울을 잘 지키고 있던 아내에게 이번 김장에서 내가 전천후로 활약했다고 이야기를 하니 겨울철 아이스아메리카노 마냥 쿨한 아내는 이렇게 말합니다.

"원래 김장은 속 넣는 일이 제일 쉬워"


내년에는 기필코 저 human과 함께 내려가서 김장 속 넣기 배틀을 해보리라 속으로 전의를 불태워봅니다.


한 줄 요약 : 김장에 대한 기여도가 높을수록 김치가 더 맛있게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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