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는 아이들에게는 특별하고 신나는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평일에 학교를 다녀온 뒤 '잔소리 없는 날'을 긴급하게 시행한 덕분이었습니다. 잔소리 없는 날은 동명의 어린이소설을 함께 읽고 2년 전부터 만들어 운영하고 있는 일종의 비정기 이벤트입니다.
보통 잔소리 없는 날이 되면 게임을 실컷 할 수 있습니다. 숙제도 할 필요도 없죠. 처음에는 게임만 7시간을 넘게 하는 등 정말 경악할 수준이었지만 이제는 최소한의 자신이 할 일 정도는 알아서 하자는 약속으로 유지되고 있는 제도입니다.
아들을 카이스트에 입학시킨 유정임 작가의 <아이가 공부에 빠져드는 순간>에서도 언급되는 개념입니다. 일명 '폐인데이'라고도 하죠. 아들들이 시험을 마치면 사흘 내지 나흘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폐인처럼 살 수 있는 시간을 주는 방식입니다.
유정임 작가의 말에 따르면 아들들이 힘든 학창 시절을 이 폐인데이를 통해서 이겨낼 수 있었다는 말을 했었다고 합니다.
거기에서 착안해서 시행하는 날이 바로 '잔소리 없는 날입니다. 정기적으로 한 달에 한 번씩 주말로 날짜를 정해서 하다가 지금은 방식을 좀 바꿔서 하고 있습니다. 이 기회를 쿠폰으로 지급해서 아이들이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올해는 6월 말에 아이들의 생일선물로 직접 제작한 쿠폰을 선물해 줬죠.
종류별로 한 장씩 해서 네 장, 총 두 세트를 만들어서 지급(?)했습니다. 이 쿠폰을 아이들은 필통에 잘 넣어 다니다가 필요할 때 사용합니다.
이게 사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행동 같지만 특히 고학년으로 달려가는 아이들에게는 효과가 아주 어마어마하게 좋습니다. 웬만한 물질적인 선물은 저리 가라죠.
1. 학교나 학원 땡땡이는 가기 싫으면 무조건 하루를 쉴 수 있습니다.
2. 게임 2시간 이용권은 할 일을 마치지 않고 게임이 고 싶을 때 쓸 수 있고요.
3. 화내지 않고 1분간 웃어주기 권은 엄청 제가 화가 났을 때 아이들이 씁니다.
4. 잔소리 없는 날 사용권은 무슨 일을 하든 잔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이 네 카드 모두 사전신고가 사용에 대한 부모의 동의를 받는 즉시 발효된다는 규칙이 정해져 있습니다.
다만 이런 방식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아이가 언제라도 이 쿠폰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부모가 협조를 해주느냐인데요. 보통은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원할 때는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다며 쥐어줘 놓고 막상 쓰겠다고 할 때는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며 다음에 쓰라고 만류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죠.
물론 정말 그런 상황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아이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을 최대한 미안한 표정과 함께 잘해줘야겠죠.
만약에 아이의 선택권을 존중해주지 못한다면 이 쿠폰은 생각 없이 던지는 '언제 밥 한 번 먹자'라는 흔한 공수표와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아이들과의 약속은 어겨도 괜찮은 약속이 절대 아닙니다. 아이들이 약자이며 미성년이라고 해서 부모가 했던 약속을 가볍게 어겨버린다면 아이들이 결국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딱 하나뿐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게 될 리 없겠죠. 그런 점에서 이 방법은 효과도 좋지만 부모의 전폭적인 협조나 강력한 의지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 쿠폰은 아이들과 횟수와 내용을 조율해서 돌아오는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선물로도 활용할 예정입니다. 중학생이 되니까 조금은 변화가 필요하기는 하겠죠. 그리고 내년에도 아이들과의 약속을 잘 지키는 부모가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그런 모습들 하나하나가 다른 어떤 보물보다도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좋은 가치이자 정신일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