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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르세우스 Jan 30. 2024

찜질방에서 생긴 일


안녕하세요, 자녀교육에 진심인 쌍둥이아빠 양원주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제 회상을 담은 일기 형식의 글입니다.  




<찜질방에서 생긴 일>


오랜만에 아내와 찜질방으로 향했다. 나는 찜질방을 썩 좋아하지는 않지만 아내가 좋아하니까 따라가야 한다. 이미 아이들은 한 번 따라오더니 찜질방 투어에서 진작 하차했다.


하남에 있는 찜질방까지 혼자 운전해서 갈 수 있지 않냐고 말을 하고 싶지만 나는 그리 용기 있는 사람은 아니다. 어차피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리고 내가 생각해도 혼자서 찜질방에 가는 건 왠지 모양이 빠져 보인다.


혼자서 밥도 먹고

혼자서 모임도 가고

혼자서 영화도 볼 수 있고

혼자 뷔페도 갈 수 있지만

확실히 나도 혼자서 목욕탕이 아닌 찜질방은 못 가겠다.




나갈 채비를 마치고 7시 반에 집을 나선다. 빨리 갔다가 점심때쯤에는 돌아오는 계획이다. 아이들은 좀 더 잘 테니 일어나더라도 아침을 챙겨 먹을 수 있게 준비만 해두면 된다.


주말이면 언제나 연인이나 가족 단위로 북적이는 곳이지만 이른 아침에 가면 사람이 뜸하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찜질을 할 수 있다고 했던가. 옷을 갈아입고 홀로 가니 코를 어마어마하게 고는 사람들과 가족단위의 손님들이 몇 팀 있다.


잠귀가 밝은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극기훈련 같을 텐데 이곳에서 잠을 잘 수 있는 사람들이 새삼 존경스럽다.





두 시간여 동안 열심히 찜질을 마친 뒤 먼저 카운터에 와서 기다린다. 여기저기 나와 같은 처지인 아저씨들이 서너 명 보인다. 그들도 아마 같은 대상을 기다리고 있으리라. 이곳에 오면 남자의 시간은 느리게 가고 여자의 시간은 빠르게 가는 듯하다.

                                                                                                                                                                                           

가끔 늦게 나왔다며 인상을 있는 대로 쓰는 아저씨들이 있는데 나는 다행히 그 정도의 하수는 아니다. 인상은 나중에 사람 없을 때 쓴다.


<드래곤볼>에 나오는 정신과 시간의 방이 아마도 이런 곳이 아닐까 싶다.                                              




가끔 늦게 나왔다며 인상을 있는 대로 쓰는 아저씨들이 있는데 나는 다행히 그 정도의 하수는 아니다. 인상은 나중에 사람 없을 때 쓴다.


조금 더 아내를 기다리고 있던 차에 연세가 지긋하신 할아버지가 갑자기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카운터로 다가온다.


대뜸 "신발장 키가 열리는데?"라고 외친다.




반말로 묻는 말에 직원도 퉁명스러운 듯 답을 한다.

"안에서 쓰신 비용을 옆에 있는 키오스크에서 정산을 하셔야 신발장을 여실 수가 있어요"


직원의 대답을 들으며 '아.. 그렇구나. 굉장히 혁신적인 시스템이네'라고 생각하면서 단순한 해프닝이라 생각하려던 차에 돌아온 할아버지의 대답이 놀라웠다.


"신발장 안에 지갑이 있어서 그래"


응?

뭐지?

그걸 왜 거기에?


직원 두 명은 잠시 대뇌활동이 멈춘 듯할 말을 잃는다. 그 어떤 매뉴얼에도 이런 경우의 수는 아마 없었을 거다. 인공지능이라면 아마 알았을까? 다른 사람들도 할아버지가 왜 그러셨는지 궁금한 표정이다.


하지만 직원도 만만찮다.

"신발장은 키오스크 결재가 돼야 열 수 있다니까요"

그건 할아버지 사정이고 일행이 있을 테니 나오면 알아서 해결하라는 소리 같다. 귀찮음이 묻어난다.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도 만만찮다.

"그러니까 저걸 열어야 결재를 하지"라고 말이다. 차분하게 말씀하시지만 살짝 빈정이 상하신 듯하다. 그 또한 이해할 수 있다.   


잠시간의 해프닝은 직원이 마스터키로 신발장을 열어주며 끝났다. 구경꾼들은 신기하다는 듯 그 상황을 홀린 듯 구경하다가 다시 스마트폰 세상으로 귀환했다.


하지만 나는 그 장면을 보고 마냥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할아버지가 그렇게 하신 이유가 조금은 이해가 되어서였다. 나 역시 밖으로 나오기 전에 찜질복에다 열쇠를 넣어둔 채 수거함에 던져버렸기 때문이다. 씻고 나온 뒤에야 내 손목에 있어야 할 옷장 키가 보이지 않음을 깨달았다. 지갑도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은가.


옷장에서 잃어버릴까 봐 걱정되어 지갑을 신발장에 넣어둔 할아버지의 마음이 순간적으로 이해가 갔다. 오히려 센스 있어 보였다.




아내는 모든 상황이 끝난 뒤 곧바로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위풍당당하게 밖으로 나왔다. 쯧쯧.. 이 좋은 구경을 못하다니 안타깝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상황을 설명해 주며 내가 할아버지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고 말을 하는데 아내가 한심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한다.


"예전에 기억 안 나? 오빠 예전에 찜질복에 집 열쇠 안 꺼내고 수거함에 넣었다가 그거 찾느라 한 번 난리 났었잖아"


아뿔싸.

그랬지.

나는 찜질방에서 사고를 치는 상습범이었다.

할아버지보다 더한 사람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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