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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광우 Mar 01. 2023

매일 10킬로미터를 달릴 수 있는 비결

마라톤의 왕도(王道)

 누군가 날더러 취미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난 서슴없이 마라톤이라는 대답을 내놓는다. 하루에 10킬로미터 이상 달리기를 목표로 삼고 있을 뿐 아니라 아주 특별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한 매일같이 그 거리를 달리면서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로 아침에 달리지만 여의치 않은 날은 낮이고 저녁이고 가리지 않는다. 미세먼지가 심각한 날도 비나 눈이 퍼붓는 날도 예외가 아니다. 그때면 근처의 헬스장으로 가서 그 만큼의 운동량을 트레드밀로 해결한다. 하다못해 헬스장까지 쉬어서 그마저 여의치 않는 날이면 아파트의 지하주차장을 맴돌기도 하고 계단을 뛰어 오르내림으로써 운동량을 대신하기도 한다. 그럴 때는 10킬로미터 달리기를 150층 아파트의 계단으로 환산해 지상에서 26층인 우리 집까지를 여섯 번 반복해가며 오르내린다. 그러니 내가 달리기를 멈추는 특별한 상황이라는 건 일 년에 기껏해야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라 말할 수 있다.

 아내는 이런 나를 운동중독이라고 한다. 하긴 아침에 달리기를 하지 않은 날은 하루 종일 강박관념에서 좀체 벗어나지 못할 뿐 아니라 심리적인 불안감에 휩싸일 지경이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게 살아온 날이 벌써 이십 년 가까이 된다.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은 대단하다는 찬사와 함께 이제 10킬로미터를 달리는 일쯤이야 누워서 떡먹기일 거라며 내 체력을 부러워하곤 한다. 그때마다 나의 대답은 한결같다. 나에게 10킬로미터라는 거리는 여전히 달리기 힘든 거리라고.

 그 말에 모두 놀라는 표정을 짓지만 그것이 결코 겸손을 가장한 말은 아니다. 물론 그동안 달리기를 습관화하면서 내 체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폐활량이 늘고, 허리 사이즈가 줄었으며, 허벅지와 종아리의 근육은 발달했다. 덕분에 젊은 시절 감히 꿈도 꾸지 못하던 풀코스마라톤을 세 차례, 하프코스를 오십여 차례 가까이나 완주할 수 있었다. 기록도 그다지 나쁘지 않다. 풀코스의 경우 평균 세 시간 오십분, 하프코스는 한 시간 사십분 대를 기록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내 능력의 한계치가 늘어났다는 의미일 뿐 힘들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달릴 때마다 고통은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찾아와 나를 괴롭힌다. 장거리를 달리다보면 죽을 만큼 힘들다는 사점(死點)이라는 고비가 찾아온다. 그런데 그 지점을 넘어서면 호흡도 편안해지고 근육통도 사라지면서 거의 무아지경에 이르는 러너스하이(Runner's High)라는 쾌락의 지점에 도달한다고 한다. 달린 경력이 길수록 그 시기는 빨리 도래한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난 그 말을 결코 믿지 않는다. 유달리 무뎌서인지는 모르지만 숱한 세월을 달리면서 난 단 한 번도 그 쾌락을 경험한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달리는 내내 나에게는 사점만이 반복해 찾아왔을 뿐이다. 10킬로미터가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닌 만큼 그때라고 그들의 말이 다를 까닭이 없으련만.

 덕분에 달리기를 하기 위해 집을 나설 때마다 내 발걸음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것 마냥 천근만근이 된다. 오죽하면 마라톤 중에서 가장 힘든 거리가 42.195Km의 풀코스도 100Km나 200Km의 울트라코스도 아닌, 달리겠다고 마음먹은 그 위치에서 달리기를 시작하려는 지점까지 가는 거리라는 말에 적극적으로 공감하게 되었을까? 그런 까닭에 매일 아침 내 몸속에서는 오늘 하루쯤 쉬는 게 어떠냐며 유혹하는 본능적 자아와 어떤 일이 있어도 참고 뛰어야한다는 이성적 자아가 다툼을 벌인다. 다행인 점인 아직까지는 이성적 자아가 좀 더 강한 의지를 발휘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그 배경에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나만의 피눈물 나는 노력이 자리하고 있다. 어떡하든 하루의 정해진 목표를 채우기 위해 별의별 수단이 다 동원된다. 대표적인 것이 달리는 도중에 달린다는 사실을 잊으려 애를 쓰는 것이다. 원래 고통이란 그 느낌을 인지할수록 더욱 심해지고 무의식적으로 회피하려든다. 달리기가 힘들다고 느낄수록 더욱 힘들어져 당장 멈춰서고 싶어지는 것이다. 반면 그 지긋지긋한 고통에게도 약점은 존재한다. 놈은 멀티태스킹에 다소 취약한 면모를 드러낸다. 적어도 다른 생각을 하는 동안 병행해서 찾아오는 경우는 드물다. 그 말은 고통의 순간 억지로라도 다른 기억을 되살릴 수만 있다면 그걸 잊을 수 있다는 뜻이다. 지워지지 않는 펜으로 쓴 글을 덧칠로 지워버리거나, 컴퓨터 파일의 내용을 덮어쓰기 함으로써 파일삭제의 효과를 내는 것과 같은 방법이다. 실연의 아픔을 새로운 사랑으로 이겨내는 것 또한 동일하다. 또 이럴 때 생각의 구조가 복잡하면 할수록 그 효과는 크다. 복잡할수록 몰입도가 높아져 고통의 영역을 담당하던 뇌세포가 그쪽으로 집중하게 될 테니까.

 고통이라는 느낌으로부터 뇌세포들을 쫓아내기 위해 내가 주로 사용하는 방법은 글감을 떠올리는 것이다. 달리기가 시작되면 난 새로운 글의 소재를 발견하기 위한 두뇌활동을 개시한다. 소재를 찾은 후에는 어떠한 내용을 쓸 것인지 얼개를 그리고 그 첫 문장은 어떻게 시작하며 끝은 어떻게 맺을지를 고민한다. 어떤 날은 아내와 함께 할 여행계획을 짜기도 한다. 여행지의 아름다운 풍경과 맛있는 음식들을 머릿속으로 그리는 사이 시간은 의외로 수월하게 지나간다. 때로는 제법 긴 시(詩) 한 편을 미리 메모해서 그것을 외며 달리기도 한다. 시를 외는 것은 글쓰기에 많은 도움을 줄 뿐 아니라 노화로 인해 하루가 다르게 퇴화되어가는 기억력을 강화시키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그런 방법들마저 잘 통하지 않으면 괜히 천 단위 만 단위의 숫자들을 서로 곱하고 나누는 셈을 하기도 한다. 성공하든 않든 그러다보면 어쨌든 상당한 시간이 흘러가고 어느새 목표지점에 도달해 또 하루를 이겨냈다며 안도하는 한숨을 내쉴 수가 있다.

 사람은 끊임없이 쾌락을 추구하는 동물이다. 쾌락은 편안함을 통해 누려지는 감정이다. 편안함은 익숙함에서 생겨나고 익숙함은 습관화를 통해 배양된다. 한번 습관에 배이면 잘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연유한다. 문제는 쾌락이 반복에 쉬 싫증을 낸다는 점이다. 몇 차례만 되풀이되어도 쾌락은 금방 흥미를 잃어버려 훨씬 강도가 센 변화된 다른 것을 요구한다. 변화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낯설음이라는 불편을 감내해야하고 그 과정에서 또 고통이 수반된다. 결국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순환현상이 일어난다. 세상에 힘들지 않은 일이 없는 건 이 때문이다. 힘든 마라톤도 습관화라는 과정을 거쳐 익숙해지면 편안해져 수월할 것 같지만 결코 그러지 않은 것 역시 이런 논리에서 출발한다.

 그렇다면 건강을 위해 달리기를 계속할 수 있는 특별한 비결은 딱히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저 몰입할 수 있는 나만의 무언가를 찾아 고통을 줄이거나 피하면서 의지력을 키워나가는 것만이 최선이다. 그렇다고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다. 어제도 그제도 힘들었지만 다 견디고 이겨낼 수 있었다는 자신감과, 그렇게 이겨냄으로써 얻은 성취감과 보람을 잊지 않는다면 의지력은 배가될 것이기 때문이다. 고통이 클수록 결과물은 더욱 값지며 그걸 이겨낸 행복감은 훨씬 크다. 그걸 명심하는 한 고통과 맞서려는 용기는 더욱 충만해지고 두려움은 사라질 것이 분명하다. 비단 달리기뿐 아니라 그 어떤 목표라도 그곳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 왕도는 없다. 숱한 갈래길을 두고 각자에게 알맞은 걸 선택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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