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질문 앞에서, 나는 오랫동안 틀린 길을 걸어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세상이 그렇게 속삭였다. 행복은 저 높은 산의 정상에 있다고. 좋은 집, 비싼 차, 높은 직위, 많은 돈. 그 모든 것들을 차례로 손에 넣고, 마침내 정상에 올랐을 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다고.
그래서 나는 숨 가쁘게 산을 올랐다. 때로는 내 옆 사람을 밀치기도 했고, 때로는 길가에 핀 예쁜 꽃들을 보지 못한 채 오직 정상만을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정상에 오른 많은 이들이 그곳에서 허망한 표정을 짓는다는 걸 이제야 안다. '이게 전부였어?' 정상에서 느끼는 성취의 기쁨은 잠깐이고, 그들을 기다리는 건 또 다른 산을 올라야 한다는 압박감이거나,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다는 허무함뿐이다.
이제 나는 인정한다. 행복은 목적지가 아니라는 것을. 정복해야 할 대상이나 성취해야 할 결과물이 아니라는 것을. 행복은 '상태'이며, '과정'이다. 산 정상에 꽂힌 깃발이 아니라, 산을 오르는 내내 우리의 발걸음을 가볍게 하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그 모든 순간 속에 깃들어 있다.
그리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그 행복의 상태에 이르는 가장 확실하고 완전한 길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배움'이라고. 배움이 행복으로 가는 여러 길 중 하나라는 뜻이 아니다. 배움의 과정 그 자체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형태의 행복이라는 뜻이다.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말한 '몰입(Flow)'을 생각해 본다. 어떤 행위에 깊이 빠져들어 시간의 흐름이나 나 자신에 대한 생각조차 잊어버리는 상태. 그는 이 몰입의 순간이야말로 인간이 가장 행복을 느끼는 '최적 경험'이라고 했다.
내 배움의 순간들을 떠올려본다. 어려운 책의 논리를 끈질기게 따라가다가, 어느새 주변의 소음이 전혀 들리지 않게 되었던 경험. 서툰 손으로 코드를 짜고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창밖이 어두워진 것도 몰랐던 경험. 새로운 그림을 그리거나 악기를 연습하며 점심 먹는 것조차 잊어버렸던 경험.
이 모든 것이 바로 '몰입'의 순간이었다. 이때 나는 '내가 행복해져야지'라고 의식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라는 존재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리고 그 무아(無我)의 경지에서, 가장 순도 높은 행복을 경험했다.
세상이 말하는 행복은 대부분 '나'를 끊임없이 의식하게 만든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나는 얼마나 대단한가. 하지만 몰입의 행복 속에는 '나'가 없다. 오직 내가 사랑하는 대상과 나 사이의 완전한 합일만이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배움이 주는 첫 번째 행복이다.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자의식의 감옥에서 벗어나 완전한 자유를 느끼게 하는 것.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라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의미'에 대한 의지임을 발견했다. 삶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내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아는 사람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풍요로워졌지만, 많은 사람들이 '의미의 상실'로 고통받는다. 내가 하는 일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 나의 존재가 이 세상에 왜 필요한지 알지 못해 공허해한다. 내가 느꼈던 그 막막함의 근원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나만의 나침반을 따라가는 주체적인 배움은, 이 의미의 상실이라는 병을 치유하는 가장 강력한 백신이다. 내가 나의 취향에 따라 무언가를 배우기로 '선택'하는 그 순간, 나는 나의 삶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내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인간의 어리석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지혜를 얻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식물을 기르는 법을 배우는 이유는 작은 생명을 돌보며 책임과 성장의 기쁨을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소설을 쓰는 이유는 세상의 소외된 목소리들을 위로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 '이유'들이 모여, 내 삶의 방향성이 되고 이야기가 된다. 나는 더 이상 세상이 정해준 의미를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존재가 아니다. 나의 하루하루에, 나의 선택 하나하나에 나만의 고유한 의미를 새겨 넣는 능동적인 창조자가 된다.
배움은 흩어져 있던 나의 삶의 조각들을 '의미'라는 하나의 실로 꿰어 아름다운 태피스트리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자신의 삶이 의미 있다고 느끼는 사람만큼 행복한 사람은 없다.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우는 인간의 욕구 단계 가장 꼭대기에 '자아실현의 욕구'를 놓았다. 자신의 모든 잠재력을 남김없이 발휘하여, 자신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이 되고자 하는 욕구. 이것이 충족될 때, 인간은 가장 큰 만족과 행복을 느낀다.
배움은 이 자아실현의 욕구를 일상 속에서 가장 안전하고 꾸준하게 채워나갈 수 있는 방법이다. 우리는 배움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고, 그 한계를 아주 조금씩 넓혀나간다. 어제는 불가능했던 일이 오늘은 가능한 일이 되는 기적을 매일 체험한다.
이 '성장'의 감각은 우리에게 깊은 자신감을 준다. 세상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든, 나는 분명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내적 확신. 이 확신이 있는 사람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외부의 칭찬에 교만해지지도 않고, 외부의 비난에 쉽게 좌절하지도 않는다.
행복이 '가진 것(having)'의 영역이 아니라 '되어가는 것(being)'의 영역에 있다면, 성장을 멈추지 않는 삶이야말로 가장 확실하게 '행복한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이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85년간 진행된 연구는 인간의 행복과 건강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돈도 명예도 아닌, '따뜻하고 건강한 인간관계'라고 결론 내렸다. 우리는 타인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느낄 때 가장 큰 안정감과 행복을 느낀다.
많은 사람들이 배움을 지극히 개인적이고 고독한 행위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배움은 세상과, 그리고 타인과 우리를 연결하는 가장 강력한 다리 역할을 한다.
내가 어떤 분야에 대해 배우기 시작하면, 세상에 그 분야를 나보다 먼저, 혹은 더 깊이 사랑했던 수많은 사람들과 연결된다. 책을 통해 우리는 몇백 년 전의 철학자와 대화를 나누고, 그림을 통해 우리는 이름 모를 화가의 고뇌와 기쁨을 느낀다. 배움은 시간을 초월하여 우리를 인류라는 거대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만들어준다.
또한 배움은 지금, 여기의 우리를 타인과 연결한다. 같은 책을 읽은 사람들과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북클럽.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땀 흘리는 동호회. 내가 알게 된 지식을 누군가에게 설명해 주고, 그 사람이 '아하!'의 순간을 맞는 것을 보며 함께 기뻐하는 순간. 나의 배움이 타인에게 가 닿아 그의 삶에 작은 파문을 일으킬 때, 우리는 이기적인 만족을 넘어선 이타적인 충만함을 경험한다.
몰입, 의미, 성장, 연결. 심리학과 철학이 말하는 행복의 핵심 조건들은 놀랍게도 '배움'이라는 과정 속에 모두 녹아들어 있다.
이제 나는 이 글의 가장 중요한 결론에 도달했다. 배움은 행복을 위한 수단이나 도구가 아니다. 배움은 그 자체가 가장 완전한 형태의 행복이다.
우리는 더 이상 행복을 미래의 어느 날로 유예할 필요가 없다. 로또에 당첨되기를, 승진하기를, 은퇴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행복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당신의 손이 닿는 곳에 있다.
지금 당장, 당신의 마음을 끄는 책의 첫 페이지를 넘기는 그 행위 속에 행복이 있다. 지금 당장, 궁금했던 다큐멘터리를 재생하는 그 클릭 속에 행복이 있다. 지금 당장, 서툰 발음으로 새로운 언어의 첫 단어를 내뱉는 그 용기 속에 행복이 있다.
행복은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용기 내어 '실천'하는 것이다. 그리고 배움은 그 행복을 실천하는 가장 구체적이고 확실한 방법이다.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의 삶은 이전과 결코 같을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