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의 노래 1권
도메니코
타뉼로 회장이 이끄는 탠더미어 그룹(Tandemir Group)은 아마겟돈 이전, 최고의 회사였다.
세계 최고의 우주선 제조 업체인 <T-Space>는 자율 비행 기술, 고성능 항공기 설계, 그리고 우주 정거장 건설을 주도하였고, 인공지능 및 로봇 공학의 최전선에 서 있는 <T-Robotics>는 AI 기반의 상업용, 군사용, 의학용 로봇 산업을 주도했다.
세계 최대 군수 기업인 <T-Defense>는 사이버 전쟁 기술과 우주 방어 시스템, 그리고 스마트 병사 장비 개발에 주력했다.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회사인 <T-Media>는 영화, TV, 디지털 콘텐츠, 그리고 VR 및 AR 기반 콘텐츠까지 다양한 미디어를 제작하였다. 특히 정보 통신 기술을 활용해 전 세계적으로 빠르고 정확한 뉴스를 제공하는 역할도 수행하였다. 그리고 생명공학 회사인<T-Biotech>은 유전자 편집, 맞춤형 의학, 바이오 인공장기 및 질병 진단 기술을 선도하였다.
탠더미어 그룹은 이러한 다양한 사업 부문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인류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형성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주도했다.
탠더미어 그룹이 세상의 빛을 상징했다면, 그 반대편에서는 파더스 그룹(Fathers Group)이 있었다.
파더스 그룹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그러나 강력하게 뻗어나가는 기업체로, 그들의 영향력은 마치 세상의 모든 혈관을 따라 흐르는 검은 피와 같았다. 그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나, 그들의 손길은 세상의 모든 주요 결정과 권력의 중심을 은밀히 조종하고 있었다.
그들은 사이비 종교를 기반으로, 세대를 초월해 내려온 일종의 비밀 결사체였다. 그들의 뿌리는 수 세기 전부터 이어져 왔고, 그 기원은 숨겨져 있었다. 공식적인 기록은 없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금융, 정치, 법조, 군사 등 모든 영역에 깊숙이 파고들어 있었다. 이들은 마치 인류 역사 자체를 설계하고 조종해온 보이지 않는 손처럼 작동했다.
탠더미어가 과학과 기술을 통해 미래를 열어가려 한다면, 파더스 그룹은 세상의 숨은 권력을 장악하며 지배 구조를 유지하고자 했다. 그들은 권력의 집중을 원했고, 그 중심에는 인간의 탐욕과 두려움을 이용하는 능력이 있었다.
파더스 그룹의 가장 큰 무기는 뭐니 뭐니 해도 금융이었다. 그들은 세계의 주요 금융기관, 은행, 헤지펀드, 투자회사를 직간접적으로 소유하고 있었다. 그들의 전략은 단순히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금융 시스템 전체를 장악하는 것이었다. 글로벌 경제 위기나 불황은 그들에게는 기회였다. 그들은 인류의 불안과 공포를 자산으로 삼아 수익을 올렸다. 모든 경제가 그들의 손바닥 위에 있었고, 중앙은행부터 민간기업까지 그들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파더스 그룹은 또한, 정치의 뒤편에서 거대한 체스를 두는 체스 마스터였다. 그들은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을 배후에서 조종했으며, 정치적 결정을 좌지우지했다. 선거는 그들에게 일종의 무대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인물을 무대 위로 올리고, 적절한 시기에 그들을 내렸다. 파더스 그룹의 영향력 아래에서 민주주의는 허울 좋은 탈에 불과했고, 그들은 그림자 속에서 세상을 통제했다.
파더스 그룹은 전쟁을 일종의 '비즈니스'로 여겼다. 그들은 비밀리에 무기 거래를 주도하며, 세계 곳곳의 분쟁 지역에 무기를 공급했다. 국가 간의 긴장 상태는 그들에게 수익을 의미했으며, 그들이 필요할 때는 전쟁이 일어났고, 그들의 결정에 따라 평화가 찾아오기도 했다. 그들은 적과 아군을 모두 관리했으며, 혼란 속에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했다.
파더스 그룹은 미디어를 이용하여 대중의 생각과 행동을 조작했다. 그들이 소유한 언론 매체는 진실과 허구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대중을 조종했다. 탠더미어 미디어가 진실을 전달하고 정의를 외쳤다면, 파더스 그룹의 미디어는 대중의 불안을 자극하고, 그들의 공포를 키워 통제력을 강화했다. 모든 정보는 그들이 허락하는 만큼만 세상에 알려졌으며, 진실은 그들의 그림자 속에 감춰졌다.
파더스 그룹은 탠더미어 그룹과 달리 공식적인 기술 개발보다는 금지된 영역에 손을 뻗었다. 유전자 조작 실험, 인간 행동 통제 기술, 생체 칩 이식 등 인류가 두려워하는 금기의 기술들을 비밀 연구소에서 개발했다. 그들은 인간을 통제하고, 생명을 상품화하는 데 집중했다. 모든 기술은 그들의 권력 유지와 지배 구조에 봉사하기 위한 도구였다.
파더스 그룹의 수장은 ‘파더(The Father)’라고 불렸다. 그의 정체는 미스터리로 남아있었지만, 그는 역사 속에서 마치 불사의 존재처럼 군림하며 세대를 이어 권력을 유지해왔다. 그에게는 명확한 얼굴도, 이력도 없었으나, 그의 명령은 세계 각지에서 법보다도 강력했다. 그가 있는 곳은 항상 어둠이 깃들었고, 그가 결정한 사건들은 결코 공식 기록에 남지 않았다.
파더스 그룹은 세상의 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그들의 방식으로 세상을 지배했다. 그들의 힘은 인간의 두려움과 욕망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고, 그들의 영향력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강력하게 작용했다. 탠더미어 그룹이 빛을 추구하며 새로운 미래를 개척할 때, 파더스 그룹은 그 빛을 뒤엎고 어둠을 확산시키려 했다.
이 두 거대 세력의 충돌은 결국 인류의 미래를 결정짓는 거대한 서사의 일부가 될 운명이었다.
- 릴리안 나리의 저서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 중 -
포탄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동안, 루카는 화염 속을 헤치며 필사적으로 발을 옮겼다. 폭발음은 귀청을 찢었고, 파편들이 비처럼 쏟아지며 그의 몸을 무자비하게 할퀴었다. 그는 헐떡이며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땅은 그가 발을 디딜 때마다 뒤틀리듯 흔들렸고, 그의 앞길은 연기와 먼지로 가득 찼다. 그런데도, 루카는 머릿속에 하나만 생각했다. 무조건 돌아가야 한다.
그는 이를 악물며 마지막 힘을 짜내듯 발걸음을 재촉했고, 마침내 지하에 숨겨진 그의 집에 도착했다. 그의 몸은 상처투성이였다. 팔과 다리는 수없이 까지고 찢겼으며, 얼굴에도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루카는 자신의 고통을 느낄 틈도 없었다. 그의 머릿속은 그가 본 끔찍한 광경으로 가득했다. 바깥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대한 공격, 파괴와 죽음이 뒤섞인 그 광란의 현장을 카타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알려야만 했다. 이것은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경고였다. 루카는 숨 가쁘게 방 한쪽에 놓인 낡은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의 손은 여전히 떨고 있었다. 지하 도시에서 운영하는 개인 소식란에 접속하자마자 그는 바로 키보드를 두드렸다. 손가락 끝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키보드에 묻어났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의 메시지는 간결하고 절박했다.
"긴급 공지: 대규모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방벽 너머에서 적군이 포탄을 퍼붓고 있습니다. 절대 바깥세상으로 나가지 마세요!"
루카가 긴급 메시지를 올리자마자, 화면은 즉각적인 반응으로 가득 찼다. 수십 개의 댓글이 순식간에 쏟아져 들어왔고, 하나둘씩 CCTV에 찍힌 바깥 전장의 이미지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파괴된 건물, 불타는 하늘, 허겁지겁 도망가는 샤크라들…
루카는 댓글을 읽어나가며, 자신이 목격한 바깥세상의 참상을 하나하나 기억 속에서 끌어올려 답변을 달기 시작했다. 그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쏟아지는 포탄을 피해 목숨을 걸고 달려온 그의 몸은 무겁기 짝이 없었다. 심장은 쉼 없이 빠르게 뛰었고, 폐는 따가운 고통 속에서 얕고 급하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직 지하 동지들에게 경고를 전달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메시지는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그의 메시지는 곧 경고문으로 변형되어 사이트 메인 화면의 맨 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제야 루카는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마음속의 긴장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그때, 화면 한쪽에서 새로운 알림이 떴다.
"시장님이 당신을 찾고 있습니다."
그 순간, 루카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시장이? 왜 나를 찾는 걸까?’
그의 손은 키보드에서 멈췄고, 색다른 긴장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
전투의 긴장감이 대기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아이기스와 동료 로봇들이 거대한 방벽과 미로 앞에서 잠시 멈춰선 사이 아군의 전차와 장갑차들이 먼지와 쇳소리를 일으키며 대열을 이루고 다가왔다. 그리고 방벽을 향해 포신을 겨누었다. 하늘이 울릴 듯한 폭음과 함께, 전차들은 일제히 집중 포격을 시작했다.
천둥 번개가 내리치는 듯한 불꽃들이 방벽을 타격했으나, 그 거대한 성벽은 요지부동이었다. 세상 모든 전쟁을 견딜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이 단단히 서 있었다. 게다가 적들의 반격이 곧바로 시작하였다. 방벽 너머로부터 불길한 붉은 빛이 깜빡거리더니, 수천 개의 불덩이가 하늘을 가르며 날아올랐다. 불꽃들은 별처럼 하늘에 퍼져나가더니, 곧 아군의 진영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눈 깜짝할 사이, 불의 비가 아군을 덮쳤고, 그 순간 땅이 흔들리며 요란한 폭발음이 연달아 터졌다.
아이기스는 자신의 몸체에 스치는 격한 뜨거움을 느끼며 즉각적으로 움츠러들었다. 포연 속에서 형체를 잃어가는 전차들, 아군들의 비명이 퍼져나갔고, 혼돈은 순식간에 전장을 휩쓸었다. 동료 로봇은 일제히 뒤로 물러나며, 은폐물이 될만한 곳이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몸을 피해 납작 엎드렸다.
아이기스는 여전히 지수의 답변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 어떤 소식도 없었다. 더 이상 지체할 여유는 없었다. 그의 인공 신경망은 전투 데이터를 분석하며 빠르게 결정을 내려야 하는 압박을 느꼈다. 적들은 거대한 방벽 뒤에 숨어 그들을 노리고 있었고, 아군은 거의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는 곳에 고립된 듯한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전투기와 드론은 이미 파괴되었으니 공중 지원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 결국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을 직감했다.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해야만 했다. 답을 찾아내기 위해 몸으로 부딪쳐야만 했다. 위험은 뻔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이기스는 미로를 다시금 살폈다. 그의 인공지능은 빠르게 하나의 가설을 세웠다. 전쟁 전, 이 미로는 그저 단순한 길이었을 것이다. 샤크라들이 도시와 외곽을 오가며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경로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미로의 끝에는 거대한 방벽으로 통하는 좁은 문이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 문은 지금 적들에 의해 폐쇄되었을지 모르지만, 평화 시절에는 자유롭게 열려 있던 관문이었을 것이다.
아이기스는 이를 확신했다.
‘미로를 통과하면 반드시 도시로 들어가는 문이 있을 것이다.’
그는 날렵하게 몸을 돌려, 미로 속으로 홀로 뛰어들었다. 미로는 숨겨진 위험과 알 수 없는 길들로 가득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의 본능을 자극했다. 아무런 정보 없이 길을 찾으려는 것은 미친 짓이었지만, 아이기스는 내장된 판단 시스템을 믿었다. 좁은 골목을 스치며 지나가는 동안, 그의 감각은 주위의 미세한 움직임과 변화를 빠르게 포착해나갔다.
얼마쯤 갔을까, 아이기스는 어느 순간, 그의 발을 통해 미세한 진동을 감지하였다. 그와 동시에 벽 사이에서 길고 날카로운 칼날들이 빠른 속도로 튀어나왔다. 칼날은 번개처럼 빠르게 아이기스를 향해 날아왔다. 금속이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그의 귀에 들렸고, 칼날은 그의 머리 위로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뒤이어 천장에서 쇠사슬이 갑자기 내려와 그를 옭아매려 했다. 그는 곧바로 몸을 돌려 그 쇠사슬을 피한 뒤, 벽을 타고 점프하여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한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조금 더 전진하자, 바닥의 금속판이 불쑥 열리며 초고온의 화염이 뿜어졌다. 고열의 불길은 아이기스의 몸체를 녹이려 했다. 그러나 그는 빠르게 반응했다. 열기가 닿기 전에 그는 벽을 타고 뛰어올라 미로의 양쪽 벽 사이를 재빠르게 이동하며 위협을 피했다. 그의 센서는 그 순간, 화염이 분출되는 구역을 계산했고, 그는 그 경로를 벗어나 앞으로 질주했다.
더 깊이 들어가자, 이번에는 자석 덫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벽 안쪽에 숨겨진 강력한 자석이 발동되면서, 아이기스를 강력하게 끌어당겼다. 그가 균형을 잃고 벽에 붙을 뻔한 순간, 그는 자신의 에너지를 조정하여 강력한 전자기 방출로 겨우 벗어났다. 하지만 안심도 잠시, 바닥, 벽, 천장에서 돌연 여러 개의 구멍이 열리며 파편 폭발이 일어났다. 날카로운 금속 조각들이 사방에서 튀어나왔고, 아이기스를 향해 비처럼 쏟아졌다. 그는 즉각적으로 전신 방어 시스템을 활성화해, 그의 몸을 덮친 파편을 막아냈다. 그러나 충격은 그를 뒤로 물러서게 만들었고 파편들은 그의 갑옷에 흠집을 냈다. 그가 다시 발을 앞으로 뻗으려는 순간, 천장에서 고열 레이저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하얀빛을 내뿜으며 빠르게 회전하는 레이저는 그의 경로를 차단하려 했지만, 아이기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짧고 날렵한 몸놀림으로 경로를 예측해 빠져나갔다.
마침내, 그는 끝에 다다랐다. 수많은 함정을 극복하며 그의 앞에 나타난 문. 그것은 도시로 통하는 입구일 터였다.
그러나 그가 한 걸음 다가서려는 찰나, 육중한 발걸음 소리가 미로의 끝에서 울려 퍼졌다. 그의 앞을 가로막은 거대한 로봇. 이 로봇은 파더스 그룹이 지원하는 유명한 로봇 공학 회사 ‘레그리온 코퍼레이션’에서 개발한 최신 전투 로봇이었다. 모델명은 ‘RV-98’ 일명 어벤저로 알려졌다.
어벤저는 강력한 육박전 능력을 자랑하는 모델로, 무시무시한 크기와 강력한 기동성을 동시에 갖춘 무적의 병기였다. 몸체는 두꺼운 방어막으로 보호되어 있고, 다리에는 강력한 추진 장치가 달려 있어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손에는 고열 절단기와 플라즈마 캐논이 장착되어 있어, 적을 가까이서나 멀리서나 무력화할 수 있었다.
아이기스와 어벤저가 서로 마주한 순간, 두 로봇 사이의 긴장감은 공기마저 무겁게 만들었다.
어벤저는 어둡고 차가운 광택을 내며, 웅장한 경고음을 내질렀다. 그는 육중한 몸을 한껏 굽히며 전투 태세를 갖추었고, 눈에서는 붉은 광선이 번쩍였다.
아이기스는 잠시 이 거대한 적을 분석했다. 어벤저의 육박전 능력은 이미 전설이었다. 엄청난 크기에도 불구하고 기동성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뛰어났고, 고열 절단기는 어떤 방어 장치라도 쉽게 무너뜨릴 수 있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아이기스는 그의 인공 신경망을 최대치로 가동하며 어벤저의 움직임을 분석하고, 약점을 찾으려 했다.
격렬한 소리와 함께 어벤저가 먼저 움직였다. 거대한 금속 주먹이 허공을 가르며 아이기스를 향해 날아들었다. 아이기스는 빠르게 몸을 옆으로 굴리며 그의 주먹을 피했다. 주먹이 바닥을 강타하자 미로의 금속 지면이 크게 울리며 움푹 들어갔다. 아이기스가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어벤저의 다음 공격이 날아들었다. 이번엔 고열 절단기였다. 붉은 불빛을 내뿜으며 회전하는 절단기가 그의 몸을 향해 빠르게 다가왔고, 아이기스는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어벤저의 공격은 날카로웠으나, 틈도 있었다. 아이기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어벤저가 균형을 잡기 위해 잠시 멈칫한 순간, 전력을 다해 앞으로 돌진했다. 그의 발이 미로의 바닥을 강하게 박차고, 그 힘을 이용해 어벤저의 몸통을 향해 돌진했다. 아이기스의 충격파가 어벤저의 갑옷에 강하게 부딪히며 금속과 금속이 부딪치는 끔찍한 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어벤저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그 거대한 몸은 흔들리며 버텨냈고, 반격에 나섰다.
어벤저는 강력한 팔로 아이기스를 움켜쥐려 했다. 거대한 손이 그의 어깨를 붙잡는 순간, 아이기스는 즉각 반응했다. 그는 몸을 비틀며 어벤저의 손아귀를 벗어났고, 그와 동시에 그의 오른팔로 어벤저의 팔 관절을 공격했다. 그의 타격은 정확했고, 어벤저의 팔이 잠시 멈칫하며 느려졌다. 그러나 어벤저는 곧바로 몸을 추스르고 곧바로 반격하였다. 고열 절단기가 다시 한번 아이기스를 향해 휘둘러졌고, 그 뜨거운 열기가 그의 피부에 닿았다. 아이기스는 눈을 부릅뜨고, 마지막 순간에 몸을 살짝 돌려 절단기를 가까스로 피했다. 그러나 그의 피부는 절단기의 열기에 의해 일부가 녹아내리며 흠집이 생겼다. 그의 시스템에 경고가 울려 퍼졌다.
그런데도 아이기스는 멈추지 않았다. 어벤저의 허리 부분이 약점임을 간파한 그는 그곳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달려들었다. 그의 주먹이 어벤저의 허리를 강타하며, 파편들이 흩날렸다. 어벤저는 그 충격으로 크게 흔들렸고, 미로의 벽에 부딪히며 금속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어벤저는 쓰러지지 않았다. 그 거대한 로봇은 다시 일어서며, 더 강력한 공격을 준비했다. 어벤저의 눈이 다시 붉은 빛을 내뿜으며, 플라즈마 캐논이 그의 팔에서 번쩍였다. 캐논이 발사되자, 그 뜨거운 에너지가 미로의 공간을 가르며 아이기스를 향해 돌진했다. 아이기스는 그 순간을 감지하고 전력을 다해 옆으로 굴렀다. 캐논이 미로의 벽에 충돌하며, 거대한 폭발음이 울렸다. 그로 인해 벽이 파손되고, 파편들이 사방으로 날아들었지만, 아이기스는 그 속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했다.
아이기스는 다시 기회를 포착했다. 어벤저가 다시 한번 균형을 잡기 위해 움직이는 순간, 그는 전속력으로 적에게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어벤저의 중앙 제어 장치가 있는 가슴 부분을 목표로 했다. 그의 주먹이 그곳을 강타하자, 어벤저의 거대한 금속체가 흔들리며 균형을 잃었다. 아이기스는 그 순간,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거대한 폭발음이 갑자기 사방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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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지수는 마침내 사령선 구축함에 구출되었다. 그는 곧장 백업 시스템실로 향했다. 전투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고, 그의 손길이 닿아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데이터들이 쉼 없이 깜빡이며, 복구대기 중인 정보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하지만 그가 복구한 정보들이 모니터에 하나둘 떠오를수록 그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전투의 세부 사항이 그에게 폭풍처럼 몰려들었다. 각종 손실 보고와 작전 실패의 흔적들이 데이터로 구현되어 그의 눈앞을 채웠다. 그는 실시간으로 아군의 전황을 파악하며, 전략을 수정할 지점을 분석했다. 하지만 가장 큰 충격은 예상보다 더 많은 전투 로봇과 장비들이 손실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숫자가 그의 눈앞에서 점점 늘어날 때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공허함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지수는 잠시 손을 멈추고 모니터를 응시했다. 전장에서 부서진 로봇들은 단순한 기계가 아니었다. 그들은 수없이 테스트하고, 살아 있는 동료처럼 애정을 쏟았던 존재들이었다. 그들이 전장에서 쓰러지는 모습을 상상할 때마다, 지수는 마치 전우를 잃은 것 같은 슬픔을 느꼈다. 데이터로만 남은 그들의 기록이 화면에 남아있을 때, 그는 그 무게를 온전히 견뎌야 했다.
그러나 슬픔에 잠겨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는 깊은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다잡았다. 알렉세이에게 중요한 보고를 전달해야만 했다. 지수는 전투 상황과 작전 변경사항을 빠르게 정리한 뒤, 반드시 유의해야 할 점을 꼼꼼히 기록해 나갔다. 이 전투에서 더 이상의 과한 손실은 막아야만 했다.
지수는 상황 보고서를 알렉세이에게 보낸 후, 곧바로 거대 방벽과 미로에 대한 해킹에 들어갔다. 라디안폴리스 도시 관리 시스템에 접속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수많은 데이터가 화면에 쏟아져 나왔다. 그는 자신만의 정교한 해킹 툴을 이용해, 도시의 구석구석을 훑어 내려가며 미로와 방벽에 대한 정보를 추적했다. 그의 손가락은 키보드 위를 쉼 없이 움직였고, 눈은 모니터에 쏟아지는 정보들을 날카롭게 분석했다.
하지만 그가 찾던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미로와 방벽, 이 모든 전장의 핵심적인 방어 시스템은 철저하게 어둠 속에 숨어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데이터 오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더 깊이 파고들수록 그는 알 수 없는 불길한 기운을 느꼈다. 도시에 관한 모든 정보는 투명하게 열려 있었으나, 미로와 방벽에 대한 정보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는 시스템을 다시 한번, 그리고 또 한 번 뒤집어 보았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아무것도 없었다.
예지수는 잠시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모니터에 박힌 채였지만, 마음은 이미 그곳을 떠나 있었다.
‘이건 오프라인이다.’
그 순간, 그의 마음에 냉혹한 깨달음이 내려앉았다. 이 시스템은 그가 해킹할 수 없는 곳에 있다. 그곳은 오프라인으로 철저히 독립된 공간에서 운영되고 있었다. 아무리 뛰어난 해커라 해도, 물리적으로 분리된 시스템에 접근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불가능했다.
예지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 같았으면 몇 분이면 해결될 일이었다. 그는 도시에 관련된 모든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고, 이 방벽과 미로를 조종할 방법도 간단히 얻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상황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그늘 방벽과 미로를 관장하는 중앙 시스템이 어디에 숨겨져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미로의 설계와 방벽의 작동 메커니즘을 알아내려면, 그 시스템이 자리한 물리적 장소를 찾아야 했다. 그것은 아마도 이 도시의 가장 깊은 곳에, 누구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는 머릿속에서 도시의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곳곳에 숨겨진 통로와 지하실, 폐쇄된 공간들…. 지수는 아마도 도시의 가장 중요한 비밀을 숨기고 있는 고대의 저장고 같은 곳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
‘카타콤!’
그 이름이 떠오르자 그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즉시 단말기를 열고 카타콤에 관한 모든 기록과 정보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오래된 역사와 현대의 탐험 기록들, 그리고 지하에 얽힌 무수한 전설들이 스크린을 가득 채웠다. 카타콤은 그저 지하 묘지가 아니었다. 그곳은 고대 문명이 남긴 복잡하고 정교한 건축물로, 수 세기 동안 비밀스럽게 숨겨져 온 지하의 거대한 미로였다.
예지수는 깜짝 놀랐다. 그가 알고 있던 카타콤은 단지 일부에 불과했다. 사실, 나폴리의 지하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공간이 존재했다. 수많은 통로와 방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고, 그 깊이는 도시의 지하 저편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는 카타콤의 구조를 더 깊이 탐구했다. 고대 사람들은 이곳을 이용해 은밀히 이동하거나 피난처로 사용했으며, 지금까지도 그 비밀 통로는 잘 보존되어 있었다. 그는 해변 절벽 동굴과 카타콤이 연결된다는 사실을 보고서에서 발견했을 때, 퍼즐의 조각이 맞춰지는 듯한 묘한 느낌이 들었다.
‘이것이다.’
카타콤은 그가 찾던 실마리였다. 그곳이 방벽을 넘어 도시의 심장부로 이어질 수 있는 열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의 손끝이 다시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적을 속이고, 그들의 허를 찌를 수 있는 완벽한 무대였다. 그는 눈 앞에 펼쳐진 카타콤의 지도를 분석하며, 자신이 마련할 수 있는 전략을 하나하나 구체화해 나갔다.
그는 도시 곳곳의 중요 군사시설을 목표로 삼았다. 적들의 병참기지는 물론, 지휘 본부와 통신시설, 그리고 무기고가 그의 우선 목표였다. 이 기지들을 무너뜨리면 적은 혼란에 빠질 것이 분명했다.
그는 카타콤의 복잡한 미로 속을 통해 적의 후방으로 은밀히 침투하여, 일제히 공격을 감행할 계획을 구상했다. 그 어떤 경로로도 예측할 수 없는 전방위적 침투, 바로 그것이 그의 전략의 핵심이었다.
첫 번째 공격은 적들의 통신망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통신시설을 타격함으로써 그들은 서로의 위치와 상황을 전달하지 못할 것이다. 이어서 병참기지를 타격하면, 그들의 보급로는 끊어질 것이고, 혼란 속에서 적군은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그는 이 공격들이 빠르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속도와 치밀함이 이 전투의 승패를 결정할 것이다.
지수의 손가락은 지도를 따라가며 중요한 포인트를 표시했다. 그는 자신만의 게릴라전을 완벽하게 계획하기 위해, 적의 약점을 하나하나 분석하고, 그들의 동선과 방어 패턴을 예측했다. 그리고 그 모든 정보를 카타콤의 복잡한 지형과 교차시키며, 적들이 그가 어디서 공격해 올지 감조차 잡지 못할 정교한 전술을 짜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갑작스러운 굉음이 지수의 신경을 마구 흔들었다. 시스템실에 울리는 소리가 너무 커서 온몸이 흔들리는 듯했다. 그는 머리를 들었다. 창밖으로 눈을 돌리자, 함대가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전함들이 하늘을 찌를 듯한 굉음과 함께 수백 발의 포탄을 쏟아내고 있었다.
‘뭐지?’
지수는 혼란스러웠다.
‘무슨 이유로 다시 사격이 시작된 것인가?’
혼란 속에서 그는 본능적으로 모니터를 주시했다. 화면에는 거대한 폭발이 방벽과 미로에 집중되고 있었다. 순간, 지수는 깨달았다. 알렉세이의 명령이었다. 그가 방벽과 미로를 향해 포격을 명령한 것이었다. 미로를 무너뜨려 적의 방어선을 무너뜨리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 공격은 사실 포탄의 낭비에 불과했다. 거대 방벽이 이 정도의 공격으로 무너질 리가 없었다.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그때, 그의 눈에 한 모니터에서 붉은 경고등이 깜박이는 것이 보였다. 그 경고는 그에게 경악과 공포를 동시에 안겼다. 화면 속 빨간 경고 표시의 이름은 바로 아이기스였다. 예지수는 숨을 멈췄다. 아이기스가 홀로 미로 속에 갇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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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는 긴장 속에 집을 나섰다. 그는 지하 도시의 심장부로 향했다. 루카는 대중교통 수단인 ‘델타 튜브’를 이용했다. 델타 튜브는 지하 도시를 가로지르는 주 통로로, 긴 원통 모양의 캡슐이 초고속으로 이동하며 사람들을 나르고 있었다. 이 튜브는 지하 도시 전체에 뻗어 있었으며, 마치 사람의 혈관처럼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이동했다.
내부는 차분한 푸른빛의 조명이 깔려 있어, 무채색의 지하세계 속에서 조금이나마 안도감을 주었다. 루카는 캡슐 안에 앉아 튜브의 고요한 진동을 느끼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는 시장을 생각할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이 도시의 첫 지도자이자 영웅. 우리들의 구세주.
루카는 시장을 직접 만나게 될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캡슐은 가볍게 진동하며 종착점에 다다랐다. 튜브에서 내리자, 지하 중앙 도시의 복잡한 교차로가 그를 맞이했다. 어둡고 차가운 공간이었지만, 델타 튜브의 출입구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루카를 맞이한 것은 시장실로 안내할 수행원이었다. 그는 말없이 루카에게 손짓하며 길을 안내했다. 루카는 점점 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수행원과 함께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의 발걸음은 무겁고도 조심스러웠다.
마침내 시장실에 도착했을 때, 밝은 빛과 함께 맞이하는 한 인물을 보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도메니코입니다."
시장은 차분한 미소를 띠며 루카에게 손을 내밀었다. 루카는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하지만 곧 자신도 손을 내밀며 억지로나마 배시시 웃었다.
"네, 안녕하세요, 시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