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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킹 Oct 24. 2024

비다의 눈 #7

삶과 죽음의 노래 1권

카타콤  

             

파벨 예언서는 마치 시간의 강 속에서 꺼낸 파편을 엮어낸 조각품과 같았다.      
예지수, 사피엔티아의 마지막 멤버, 즉 13의 형제인 그는 예언 속에 등장하는 가장 신비로운 인물이었다. 그의 이름은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의 행적과 영향력은 끊임없이 드러났다. 그러나 파벨과 그가 속한 시대의 한계는 이러한 기록을 어렴풋이, 마치 안개 속에 감추듯 남길 수밖에 없었다.     
천 년 전, 동유럽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파벨은 신부에게 자신의 꿈을 들려주었다. 그때마다 신부는 공책을 꺼내 그의 이야기를 받아 적었다. 하지만 그들은 미래에 펼쳐질 더 넓은 세상을 감지하지 못했다. 산업혁명과 눈부신 과학의 진보는 그들의 상상력을 훨씬 넘어선 것이었으므로, 그저 신이 보낸 기이한 계시로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파벨은 꿈에서 본 비전들을 인간의 언어로 완벽히 표현하기 어려웠다. 당연하게도 당시의 언어와 사고방식에 갇혀 있었다.      
마치 짙은 안개 속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산봉우리를 묘사하듯, 그는 고작 몇 가지 상징과 은유로만 그것을 표현할 수 있었다. 증기기관과 전구, 그리고 공장의 기계 소리가 울려 퍼질 시대를, 파벨과 신부는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그들은 다가올 시대를 “거대한 철의 용”이나 “신의 빛을 담은 유리병”과 같은 신화적인 표현으로 남겼다.      
예지수의 행적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다가올 시대의 혼란과 절망에 맞설 인물이었지만, 그의 발자취는 분명하지 않았고, 그의 존재는 수수께끼처럼 그저 미래를 비춰주는 등불 같은 존재로 그려졌다. 타뉼로와 내가 예지수를 찾기 위해 겪었던 고생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파벨 예언서의 수수께끼를 풀어내기 위해 우리는 과거의 시대와 미래의 비전을 이어주는 실타래를 붙잡고, 그 끝을 찾아 헤맸다. 예지수를 찾는 여정은 마치 끊임없이 움직이는 모래시계 속에서 영원을 탐구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그 불명확함 속에서 우리는 그가 남긴 작은 단서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파벨 예언서 속에서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표현은 처음에는 그저 신비로운 은유로만 보였다. 그 의미를 깊이 들여다보는 동안, 우리는 그곳이 한국, 혹은 적어도 아시아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다. 이 표현은 예지수의 출신지에 대한 중요한 실마리였다.     
그리고 “세상의 보이지 않는 선을 이용해 남의 것을 훔친다.”라는 표현은, 당시에는 마치 마법과도 같은 기술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 그가 해커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그가 "10살도 채 되지 않았을 때 이미 사람들 사이에서 이름을 날렸다."라는 표현은, 우리에게 예지수의 천재적인 능력과 그가 어린 시절부터 기술 세계에서 남다른 명성을 떨쳤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였다.      
"그는 바람처럼 빠르게 움직이며, 세상에 존재하는 줄도 모른 채 지나간다."라는 표현은 그의 해킹 활동을 암시하는 듯했다. 파벨이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예지수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남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었다. 그는 세상의 보이지 않는 선들, 즉 정보와 데이터를 통해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주었다. 파벨은 이를 "세상의 그물을 조종하는 자"라고 불렀다. 그 표현은 당시 기술적 이해의 한계 속에서 그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설명이었다.     
예지수를 또한 "빛나는 구슬을 손에 쥐고, 그 안에서 세상을 들여다본다."라는 묘사로 나타났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그가 디지털 기기, 혹은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는 모습을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파벨의 눈에는 그것이 마치 신비로운 물체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사실 그것은 우리가 아는 전자기기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그 기기를 통해 세상의 정보를 훔치고 조종할 수 있었으며, 그것을 통해 사람들 사이에서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다루는 자"로 불렸다.     
예언서 속 예지수는 거대한 힘을 지닌 자이지만, 누구도 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인물로 그려졌다. 그는 무형의 존재처럼 여겨졌고, 세상에서 흔적 없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가 남긴 작은 흔적들은 파벨의 세계를 넘어서, 그보다 훨씬 더 큰 세계에서의 그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 릴리안 나리의 <참회록> 중 -               

그의 이름은 루카 디 산토. 나폴리 태생인 그는 아마겟돈 이전, 이탈리아 해군에서 근무했다. 하지만 지금은 샤크라를 피해 지하의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 카타콤의 차갑고 습한 돌벽들 사이, 루카는 자신의 하루를 준비한다.      

샤크라는 태양을 싫어하기 때문에 낮이 그의 유일한 구원의 시간이다. 하지만 햇빛이 비추는 곳에서는 또 다른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폐허가 된 도시의 모든 모퉁이에는 트랩이 설치되어 있고, 방사능 구역은 그가 접근할 수조차 없다. 그런데도 그는 식량을 구해야 한다.     

루카가 구하는 음식은 대부분 보존된 통조림, 말라버린 빵, 또는 각종 생명체의 시체다. 그는 때때로 폐허가 된 시장 근처에서 오래된 병조림을 발견하곤 한다. 유리병에 갇힌 피클이나 두껍게 쌓인 먼지를 털어낸 곡물들은 그의 가장 귀중한 보물들이다. 어느 날은 버려진 집들의 벽장을 뒤지며, 오래된 밀가루 자루나 굳은 꿀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때때로 바닷가 근처, 그는 버려진 어망을 찾아 죽어가는 작은 물고기나 조개를 발견하기도 하였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그림자처럼 혼자 조용히 움직였다. 도시는 여전히 무너져 내린 철골과 깨진 유리 조각들로 가득했다. 그 사이를 통과할 때마다 루카는 발소리를 숨기기 위해 낡은 천을 신발에 감고, 부서진 건물의 벽을 타고 조용히 걸었다. 그의 몸짓은 버드나무처럼 유연하며,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빛조차 그를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였다.     

그가 가장 조심하는 것은 샤크라들이 들끓는 구역에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밤에 활동하지만, 낮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들의 존재를 느낄 때면, 루카는 숨을 죽이고, 폐허 속 작은 구멍에 몸을 밀어 넣으며 한참을 기다린다. 언제나 돌아올 때는 그는 지하로 향하는 숨겨진 입구가 샤크라에게 들키지 않았는지를 체크하고 신중하게 접근한다.      

오늘 루카가 지상에 발을 디디는 순간, 그의 폐로 차오르는 공기는 왠지 낯설었다. 지상은 여전히 탁하고 독한 냄새로 가득했지만, 오늘은 그 기운마저도 묘하게 달랐다.      

그때, 갑작스러운 사이렌 소리가 공기를 찢으며 울렸다. 차가운 철이 비명처럼 떨리는 소리, 그것은 오랫동안 잊힌 문명의 기계가 깨어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아마겟돈 전쟁 이후 처음으로 들리는 경고음이었다. 소리는 무자비하게 도시 전체를 울리고, 잔해 위로 음산하게 메아리쳤다. 그것은 도시가 다시 깨어나면서 내지르는 신음처럼, 혹은 더 끔찍한 일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암시처럼 들렸다.     

루카의 가슴은 순간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카타콤으로 다시 내려가려는 충동이 온몸을 감쌌다. 그곳은 언제나 그에게 안전을 약속하는 유일한 피난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경고음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도시가 루카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궁금증이 두려움을 삼켜버렸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루카는 잠시 머뭇거리며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천천히, 신중하게 주변을 살피며 도시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심장은 빠르게 뛰었지만, 그의 발은 소리 없이 움직였다. 그는 가까운 골목으로 몸을 숨기며 천천히 이동했다. 구름처럼 퍼진 먼지 사이로, 오래된 시계탑이 보였다. 그 탑은 도시의 심장이 멈추기 전, 마지막 시간을 알리던 장소였다. 루카는 숨을 고르며 무너진 벽 뒤에 몸을 숨겼다. 그의 눈은 끊임없이 주변을 살폈다.      

샤크라가 출몰할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오늘은 그들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 순간, 사이렌 소리가 딱 멎었다. 도시 전체가 갑자기 깊은 침묵 속에 빠졌다. 하지만 무언가 더 강력하고 거대한 존재가 다가오고 있음을 의미하는 듯했다. 루카는 계속해서 주변을 살피며 조금씩 더 깊숙이 도시의 중심부로 다가갔다.      

그가 오래된 거리의 모퉁이를 돌았을 때, 그는 눈 앞에 펼쳐진 것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루카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도시의 중심부, 옛날 광장에 그가 본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이었다. 낡은 건물들 사이, 수백 개의 최첨단 포격 장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이게 무엇인가?’     

‘새로운 적이 나타난 것일까?’     

수년간 지하에서 은둔하며 살아온 그에게는 너무나도 생소한 것이었다. 루카는 자기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그것들은 분명 그가 아는 옛날의 무기들이 아니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 장비들의 크기와 형태였다. 루카는 한눈에 그것들이 단순한 무기가 아님을 알아차렸다.      

매끈한 금속 재질로 이루어진 구조는 마치 미래에서 떨어진 물체처럼 보였다. 표면은 빛을 흡수하는 듯한 검은색 코팅으로 덮여 있었고, 가장자리는 날카롭고도 섬세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길고 유연한 관들이 무기를 둘러싸고 있었고, 어떤 장비는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듯, 천천히 방향을 바꾸며 사방을 경계했다.     

거대한 기계 팔이 여러 개 달린 일부 장비들은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팔 끝에는 다차원적으로 회전하는 포탄 발사기가 장착되어 있었다. 발사대 주변에는 정체불명의 동력 장치가 소리 없이 회전하며 기계를 지탱하고 있었다. 그 장치에서 나오는 낮은 윙윙거림이 주변의 침묵 속에서 기묘하게 울렸다.     

또 다른 장비는 다층의 레일이 겹친 형상을 하고 있었다. 루카는 그것이 강력한 전자기 레일건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바닥에는 작은 자동화 로봇 장치들이 기어 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거대한 포격 장비들의 주위를 정비하는 듯 보였다. 어떤 장치들은 드론 형태를 하고 있었고, 주변을 탐지하며 저주파의 소리를 발산하고 있었다.      

그들은 루카의 존재를 아직 감지하지 못한 듯했지만, 그는 그 기계와 로봇들이 예민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고 쉽게 방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모든 것이 너무나도 기이했다. 루카는 혼란스러웠다.      

‘이 장비들은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전쟁은 이미 10년 전에 끝난 줄 알았다. 그러나 이 무기들은 전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아니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누구와의 전쟁인가?’     

‘인간들끼리 다시 싸우는 것인가, 아니면 이 세상을 집어삼킨 샤크라들 간의 전쟁인가?’     

루카는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이 의심스러울 뿐이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포격 장비들이 내뿜는 섬뜩한 기운이 그를 스칠 때마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다가오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루카는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본능은 도망가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물러설 수 없었다.     

그 순간이었다. 사이렌 소리가 다시 거칠게 울려 퍼졌다. 이번에는 이전보다 훨씬 더 거세고 긴박한 소리였다. 도시를 가로지르며 울부짖는 경고음이 공기를 갈라, 루카의 귀에 거대한 망치처럼 내려쳤다. 그가 긴장한 채 서 있던 그 순간, 주변에 있던 포격 장비들과 로봇들이 갑작스럽게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동작은 완벽하게 조율된 군대처럼 신속하고 치밀했다.     

루카는 숨을 죽였다. 그 순간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숱한 폭탄들이 하늘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었다. 그것들은 먼 지평선 너머에서부터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마치 죽음의 비처럼 하늘에서 서서히 떨어졌다. 그 순간, 루카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폭탄이 떨어지는 속도는 가차 없었다.     

첫 번째 폭탄이 도시의 먼 건물 위로 떨어졌다. 거대한 폭발음이 그의 귀를 찢었다. 공기 중에 퍼지는 붉은 섬광과 함께 먼지와 파편이 하늘로 치솟았다. 도시의 한 구역이 일순간 불길 속에 휩싸였고, 그 불길은 마치 살아 있는 듯 퍼져나갔다. 몇 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폭발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다음, 그다음…. 폭탄들이 끝없이 지상으로 쏟아졌다.     

도시는 삽시간에 불바다로 변했다. 거대한 파도가 넘실대듯 화염과 파괴의 물결이 도시 전체를 집어삼켰다. 불길은 건물과 거리를 태우며, 나무가 타들어 가고 철이 녹아내리는 모습이 루카의 눈앞에서 펼쳐졌다. 그는 머리 위로 흩날리는 재와 먼지 속에서 공포에 질렸다. 그의 폐로 들어오는 공기는 뜨겁고, 그를 질식시킬 듯했다.     

‘살아야 한다.’      

그 생각만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루카는 본능적으로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그의 발은 아스팔트 위에서 허둥대며, 넘어질 듯 휘청거렸지만 그런데도 그는 멈출 수 없었다. 그의 온몸은 공포와 절박함으로 타올랐다. 주변의 폭발음이 연달아 터지며 그를 뒤쫓았다. 귓가에서는 폭발의 굉음이 천둥처럼 울려 퍼졌고, 땅은 그가 뛰는 속도에 맞춰 진동했다.      

루카는 광장 옆 부서진 건물 더미로 몸을 던지듯 숨었다. 무너진 잔해 사이로 몸을 최대한 낮추고 숨을 헐떡였다. 그의 심장은 마치 가슴을 뚫고 나올 듯 요동쳤고, 온몸의 근육이 경직되어 있었다. 그는 숨을 고르며 바깥을 살폈다.     

광장은 불길 속에서 뒤틀렸고, 포격 장비들은 이제 저마다의 목표물을 향해 거대한 포신을 돌리고 있었다. 폭탄들은 여전히 쉬지 않고 지상으로 내리꽂혔다. 그 와중에 로봇들은 빠르게 움직이며 포격 장비를 조준하고 있었다. 루카는 잔해 너머로 이 모든 것을 지켜보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사로잡혔다.      

‘이 전쟁은 대체 누구의 전쟁인가?’      

그는 아직 대답을 알지 못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 도시는 이제 다시 지옥으로 변하고 있었다.     

포격 장비들이 반격을 시작했다. 첫 번째 포탄이 발사되는 순간, 광장의 땅은 거대한 짐승이 뒤척이는 듯 흔들렸고, 공중에는 포격의 굉음이 천둥처럼 메아리치며 불꽃의 궤적이 하늘에 그려졌다 사라졌다. 로봇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그들이 포탄을 포격 장비에 넣고 재장전하는 과정은 무서울 만큼 정확하고 효율적이었다. 그들의 동작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조율되어 있었고, 각 포탄은 쉬지 않고 쏘아 올려졌다.      

그때였다. 하늘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붉은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루카는 숨죽인 채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폭탄이 땅을 떨어지는 순간 강렬한 섬광과 함께 정확히 장비를 강타했다. 포격 장비는 거대한 불기둥 속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거대한 구조물은 순식간에 부서져 날아갔고, 금속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며 불타는 잔해가 공중으로 흩날렸다. 그 충격에 땅은 다시 한번 크게 흔들렸다.      

루카는 얼굴을 감싸며 바닥에 몸을 낮췄다. 로봇들 또한 심각한 피해를 보았다. 그들의 금속 몸체는 폭발의 충격으로 뒤틀리고, 부품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몇몇 로봇은 포격 장비의 잔해 사이에 깔려 신음하듯 끼익하는 소리를 냈다. 한 로봇은 팔이 잘려 나간 채 바닥에서 부서진 부품들을 쥐락펴락하며 녹색 오일을 흘렸다. 그 오일은 마치 피처럼 바닥 위로 퍼졌고, 기계 생명체의 마지막 남은 생명력을 흘려보내는 듯 보였다. 루카는 잔해 너머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며, 무너진 포격 장비와 죽어가는 로봇들의 절망적인 몸부림을 눈에 담았다.     

*************     

아이기스는 동료 전투 로봇들을 이끌고 거친 파도를 헤치며 무사히 해변에 발을 디뎠다. 그러나 물방울이 아직 그들의 금속 표면에서 미끄러져 내리기도 전에, 하늘은 총알로 가득 찬 먹구름처럼 그들을 덮쳤다. 아이기스는 본능적으로 몸을 낮추고 빠르게 움직였다.      

모래사장은 그 어떤 피난처도, 방패도 되어주지 못했다. 허허벌판처럼 펼쳐진 해변은 그들을 적에게 무방비하게 드러냈다. 그러니 멈출 수 없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속도를 내며, 적의 공격을 뚫고 이곳을 벗어나야만 했다. 뒤에서 들리는 금속의 비명, 파열음이 끊임없이 울렸다.      

그가 이끄는 전투 로봇들이 하나둘씩 쓰러져 갔다. 단단하고 완벽해 보였던 로봇의 몸체가 총탄의 비를 맞고 서서히 부서져 나갔다. 어떤 로봇은 팔을 잃었고, 어떤 이는 다리가 날아갔으며, 또 다른 로봇은 모래 속에 부서진 채 처박혔다. 그들의 파란 빛 눈동자가 하나둘씩 꺼져가는 것을 아이기스는 목격할 수 있었다.      

아이기스와 그의 동료들은 마침내 백사장을 벗어나 돌무더기 사이로 몸을 숨겼다. 흩어진 돌들은 자연이 빚어낸 방패였다. 적의 총탄이 여전히 돌 위로 튀어 오르며 울렸지만, 아이기스의 대원들이 하나둘씩 몸을 바싹 숙이며 다가왔다.     

이제는 반격할 때였다. 아이기스가 손에 든 것은 ‘펄스 라이플(Pulse Rifle)’이었다. 그가 조준하고 트리거를 당기자, 총구에서 고도로 압축된 에너지 펄스가 폭발적으로 발사되었다. 한번 발사할 때마다 전장이 번쩍였고, 공기는 찢기는 듯한 소리로 진동했다. 이 에너지 펄스는 공기를 가르며 순간적으로 적에게 도달했고, 강력한 충격파를 동반하며 적의 장갑을 갈라버렸다. 더욱이 전자기 충격이 함께 발산되며 적의 시스템을 교란하고, 그들의 방어 시스템을 일시적으로 마비시켰다.      

아이기스의 옆에서 '카론'이라는 동료는 저격용 무기인 ‘타키온 캐논(Tachyon Cannon)’을 꺼냈다. 타키온 캐논은 시간을 초월하는 입자인 타키온을 이용해 탄환을 발사하는 무기로, 그 속도는 빛의 속도와 맞먹었다. 트리거를 당기면 거의 바로 타키온 입자가 적에게 날아갔고, 그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타격을 입혔다. 적들은 자신들이 맞았다는 사실조차 깨닫기 전에 무너져 내렸다. 이것은 반응 속도뿐만 아니라, 목표물에 정확하게 명중하는 무자비한 정밀도를 자랑했다. 카론의 반격이 빛을 발했다. 쉴 새 없이 기관총을 갈기던 적들이 하나둘씩 그의 공격에 쓰러졌다.      

뒤쪽에서 또 다른 동료 ‘레이나’는 ‘플라즈마 리피터(Plasma Repeater)’를 손에 쥐고 있었다. 트리거를 당기자 붉게 빛나는 플라즈마 구체들이 물결치듯이 적을 향해 뿜어져 나갔다. 이 구체들은 목표물에 닿는 순간 폭발하며 강력한 열과 폭발력을 동반했다. 적들은 공격을 피하려고 필사적으로 몸을 피했다. 하지만 그녀는 적의 예상 경로를 따라 플라즈마를 유도했다. 그 결과, 적들은 어디로 도망가든 불타는 열기에 휩싸였다.      

적의 공격이 점차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아이기스는 그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전투의 흐름이 유리하게 기울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이 기세를 몰아 적을 끝장낼 때가 왔다고 판단했다.     

“이제 육박전이다! 모두 준비하라!”     

동료 전투 로봇들이 그의 명령에 즉각 반응했다. 각자 근접전용 무기를 장착하기 시작했다. 아이기스도 자기 팔에 장착된 특수 합금의 검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외쳤다.      

“돌격! 앞으로!”     

그는 온몸의 힘을 모아 돌무더기를 박차고 전진하였다. 모래와 돌이 그의 발아래서 흩어졌다. 그가 적을 향해 돌진하자, 그를 따르던 동료들이 일제히 함성을 터뜨리며 그 뒤를 따랐다. 전투 로봇들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은 마치 한 몸처럼 동기화되어 있었다. 적들이 그들의 모습에 당황한 눈빛을 보냈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가 휘두른 첫 번째 검격이 적의 방어막을 찢고 지나가며, 파열음을 격하게 냈다.     

동료들 역시 각자의 무기를 휘두르며 적에게 달려들었다. ‘제논’은 그의 거대한 메카닉 팔을 휘둘러 적을 압도했고, ‘노바’는 빠르고 유연한 움직임으로 적의 약점을 노렸다. 이들은 각자 다른 무기와 전술을 사용했지만, 모두가 하나의 목적을 공유하고 있었다. 샤크라의 완전 박멸.     

싸움은 이제 치열한 혼전으로 변했다. 불꽃과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전장을 가득 메웠다. 샤크라들은 흉포한 본능과 야생의 힘을 가진 인간의 변종이었다. 살점이 굳어져 철과 같은 갑옷을 이루었고, 손톱과 이빨은 무자비한 무기가 되어 모든 것을 찢어발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의 붉게 빛나는 눈동자는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차 있었고, 전장을 피로 물들일 각오를 품고 있었다. 샤크라들은 그들의 속도와 맹렬함으로 적들을 압도해왔고, 그 누구도 그들의 잔혹함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 전투는 달랐다.     

샤크라들이 아무리 강력할지라도, 그들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한계를 가진 변종일 뿐이었다. 그들이 상대하는 것은 인간 병사가 아니었다. 차가운 금속과 최첨단 기술로 무장한 기계 군단, 그것도 아이기스와 그의 동료들이었다. 로봇은 감정 없이, 오로지 효율적이고 무자비한 전략으로 적을 상대했다. 샤크라들의 야수 같은 본능은 이 차갑고 정밀한 전투 로봇 앞에서 그리 오래 버티지 못했다.     

아이기스가 특수 합금으로 된 칼을 휘두르자, 샤크라들의 단단한 피부는 힘없이 찢겨나갔다. 그들의 거친 발톱이 아이기스의 강철 몸체에 닿자마자 맹렬한 불꽃이 튀었으나, 실제적인 손상을 입히지 못했다. 샤크라가 아무리 흉포하게 덤벼들어도, 기계들은 무자비한 정확성으로 그들을 하나둘씩 쓰러뜨렸다. 샤크라들은 전장의 곳곳에서 쓰러져 갔다. 그들의 잔혹한 외침이 점차 약해지며 모래 위에 피와 떨어져 나간 몸뚱이들이 뒤엉켰다.     

샤크라의 눈빛 속에서 두려움이 피어났다. 그들은 결코 패배를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들이었지만, 지금 눈앞의 전투는 그들의 본능을 배신하고 있었다. 아이기스와 그의 동료들이 주는 충격은 그들에게 완전한 절망으로 다가왔다. 결국, 적들의 전선은 붕괴하였다.     

아이기스가 마지막 샤크라를 베어 넘기며 전투는 일단 승리로 끝났다. 그의 칼끝에서 흘러내리는 적의 핏방울을 내려다보며, 그는 짧게 숨을 골랐다. 전장은 고요해졌고, 적의 흉포한 기운도 이제는 흔적만 남았다. 샤크라들의 거친 숨소리와 야수 같은 외침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 순간, 먼 곳에서 또 다른 굉음이 들려왔다. 아군 병사들이 장갑차, 탱크와 함께 전장으로 도착한 것이다. 그들은 대부분 인간 병사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대형 장비들과 함께 늘어서 승리의 자취를 목격했다.     

그러나 아이기스는 승리의 여운에 젖을 겨를이 없었다. 그는 전투로 생긴 상처와 약간의 스크래치에도 불구하고 바로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목표는 도시의 중심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아이기스는 선봉에 섰고, 동료 로봇들과 인간 병사들은 그를 따라 빠르게 진군했다.      

아이기스는 샤크라와 싸우며 그를 짓누르던 하나의 의문이 있었다.      

‘왜 샤크라들은 그들의 전투 로봇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아이기스는 그들이 최첨단 장비를 충분히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전투 중 내내 로봇을 한 대도 볼 수 없었다.     

‘그것은 단순한 전략적 선택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걸까?’      

아이기스는 그런 의문을 계속 품으려 도시를 향해 전진하다가 갑작스럽게 멈춰 섰다. 그 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거대하고 압도적인 방벽이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었고, 그 방벽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아 있었다. 거대한 금속과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이 방벽은, 단순한 방어 구조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도시를 살아있는 존재처럼 둘러싸고 있는 갑옷 같았고, 그 안에 무엇이 숨어 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곳은 모든 것을 차단하고 감추려는 듯한 침묵 속에서 아이기스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더 기이한 것은 방벽 아래로 이어지는 수많은 미로 같은 구조물들이었다. 방벽과 연결된 좁고 구불구불한 미로는 규칙을 따르지 않은 혼돈의 산물처럼 보였다. 길은 복잡하게 얽혀 있었고, 어디로 향하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한눈에 봐도 그 미로는 단순한 방어선을 넘어, 침입자를 혼란에 빠뜨리고 무너뜨리기 위한 치밀한 함정이었다.      

아이기스는 순간 당황했다. 그동안 수많은 전투를 치렀고, 수십만 년의 인간 전투 역사를 꿰뚫고 있었지만, 이런 전장은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이곳은 분명 그 어떤 전통적인 전략이나 전술도 통하지 않는 곳이었다.     

아이기스는 스스로 되물었다.      

‘이곳은 무엇을 숨기고 있는가?’     

‘왜 이 미로는 존재하는가?’     

그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모든 규칙과 전술을 초월한 전장, 그곳에서 아이기스는 새로운 적과 싸워야 할 것이었다.     

*************     

지수는 잠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늘을 가득 메우던 적의 드론들이 모두 파괴되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항공모함이 점점 더 기울어지고 있음을 몸으로 느꼈다. 곳곳에서 화염에 휩싸였고, 연기는 점점 더 짙어져 가며 숨을 조여왔다.     

지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드론을 무력화시킨 성취감보다 그에게 더욱 뼈아프게 다가오는 것은 자신이 의존해왔던 시스템의 상실이었다. 항공모함의 상태가 급속도로 악화한 것처럼, 그의 시스템도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몇 번이나 오버클록 상태로 밀어붙였고, 결과는 잠깐이나마 성공적이었지만 대가도 만만치 않았다. 화면은 깜박거리며 지속해서 오류 메시지를 띄웠고, 그가 애써 구축해온 데이터와 네트워크는 점점 무너져가고 있었다. 기계가 고통을 느낄 수 있다면, 바로 이런 순간일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배는 빠르게 기울어지고 있었고, 화염은 점점 더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지수는 시스템의 실시간 동기화를 명령하고 서둘러 구명정을 향해 달려갔다.      

기울어진 갑판을 타고 뛰어내리듯 내려가는 동안, 마음 한구석에는 항공모함을 포기하는 아쉬움과 모든 것을 잃어가는 듯한 무력감이 얽혀 있었다. 하지만 더 큰 아쉬움은 그가 가져갈 수 없는 많은 것들이었다. 수많은 장비와 데이터, 그리고 시스템은 배와 함께 물속으로 사라질 운명이었다.      

구명정에 몸을 실으며, 지수는 허겁지겁 휴대용 노트북과 패드를 붙잡았다. 이것이 그가 간신히 구할 수 있었던 전부였다. 그는 잠시 노트북과 패드를 응시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지만, 지금은 이것마저도 소중하게 여겨야 했다.      

구명정은 거센 파도를 헤치며 바다 위로 나아갔고, 지수는 가라앉는 배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그때, 패드가 활성화되면서 화면이 잡혔다. 아이기스가 보낸 실시간 영상이었다. 지수는 구명정 위에서 숨을 헐떡이며 패드의 화면을 응시하였다.      

거대한 방벽과 깨알같이 얽히고설킨 미로들…. 그 복잡함과 신비로움이 지수의 기억 속에 잠재해 있던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리게 했다. 마이클 로버츠. 파더스 그룹의 핵심 군사 참모이자 미로 게임의 대가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의 기업은 방벽과 미로를 최첨단으로 구현하여, 보안 시스템과 군사 전략에서 엄청난 혁신을 끌어냈다.     

패드의 화면에서 펼쳐진 복잡한 미로와 방벽은 마이클 로버츠의 작품이 현실로 변모한 것이었다. 그의 기법과 혁신이 지금, 이 순간, 전투의 필드에서 살아난 거였다. 지수는 머릿속으로 그의 이름을 되새기며, 이 미로를 해결하고 방벽을 넘기 위한 전략을 세워야 했다. 마이클 로버츠의 유산이 남긴 도전이, 이제 지수의 앞에 펼쳐진 새로운 전투의 전장이다. 그리고 지수는 한 가지 의문을 품었다.     

‘그가 샤크라가 된 것인가? 아니면 샤크라의 인질이 된 것인가? 왜 그는 파더스와 함께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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