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였을까?
낮에 동네에서 놀 친구들이 없다는 것을... 일곱 살 5월쯤 지났을 때... 내 또래 친구들이 유치원에 다닌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잘은 기억 안 나지만 나이차이가 많이 나서 형은 나와 놀아주지 않았다. 학교에 가고 없기도 했다. 5살 정도까지는 엄마 쫓아다니며 놀았지만, 6살 즈음... 동내 친구들과 독립적으로 놀 수 있게 되었다. 부모님은 심방이며, 전도며 바쁘셨고, 교회가 안정되기 전까지 엄마는 시장에서 옷장사를 계속했기 때문에 매일 쫓아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나마 같이 놀던 친구들이 다들 유치원에 간 터라... 난 혼자가 되었다. 나의 7년여의 삶 동안 배움의 기회라곤 주일학교 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개척교회여서 이쁜 누나 하나가 우리를 모아놓고 놀아주는 정도였다. 나만 유치원을 다니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난 울기 시작했다.
아빠, 엄마는 내가 우는 것을 싫어한다.
마음이 아파서 싫다기보다는 그 고집이 보통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순히 우는 수준이 아니다. 머리를 농에 박고, 큰 소리를 내서 운다. 가능한 소리를 크게 부딪치고, 최대한 아픈 척을 크게 한다. 그런 나를 아는지라 부모님은 날 의식하지 않는다. 아니 의식 않는 척을 한다. 아무도 봐주지 않으면 그렇게 울다 잠들고, 일어나서 다시 울기 시작한다. 자해공갈 수준이다. 그러다 보면 부모님은 매를 들고 나의 버릇을 고치기 위해 혼을 내신다. 그때부터는 본래의 목적을 잊고 아파서 우는 건지 서러워서 우는 건지 모르는 상황이 된다. 그러다 보면 결국 내가 이기고 엄마는 두 손을 들고 만다. 스무 살 즘일까? 어른이 되어 울어도 소용없다는 깨닫기 전까지 부모님과 나의 이런 소모적인 전쟁은 계속되어 왔다. 갈수록 강도는 강해졌고... 결국 그럴 거였으면 머리를 더 박기 전에 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그때 이후로 머리가 나빠진 것 같다. 결국 승리한 나는 어머니가 아시는 유치원에 낙하산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난 그때의 기억이 부분 부분 남아 있다. 어쩌면 당시 느꼈던 감정들이 자기 멋대로 기억 장치에 남겨졌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나의 기억에는 내가 공채가 아닌 특채였다는 것과 DC를 무진장 받아서 들어갔다는 기억이 남아있다. 사실 말이 좋아 DC이지 그냥 부탁해서 거의 공짜로 다니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목사자식인데 돈을 다 지불하고 다닐 수 없는 형편 때문이라는 것도 인지하고 있었다. 가방이나, 유치원 옷 같은 것들... 일 년도 못 다닐 유치원을 위해 굳이 그런 걸 다 살 필요는 없었으나 내가 아이들과 복장이 다르다는 사실은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내 복장이 허름하거나 못 봐줄 만 한건 아니었을 것이다. 엄마는 옷장사를 하면서 가능한 이쁘고 좋은 옷을 나에게 입히려고 하셨으니까... 다만, 내 기억에는 내가 다른 아이들과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다르다'는 건 '틀리다'처럼 느껴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럼에도 그때는 눈치를 보지 않았다. 돈이라는 것과 무관한 나였으며, 나에게 주어진 꿈만 같은 기회가 마냥 감사할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 당시의 그 어떤 좋은 추억거리보다 이런 느낌과 기억이 남아 있는 건 당시 내가 처음으로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 인 것 같다.
'목사자식인 나는 남들과 좀 다르구나...'
그것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대한 가치 판단은 서지 않은 채...
여하튼 금전적인 문제는 부모님 몫이었고, 난 어렵게 얻은 기회에 열심히 배우면 되는 거였다.
뭐, 어딜 가나 두드려지긴 했나 보다. 공부를 잘했다기보다는 그냥 유치원 때의 나는 '좀 나대는' 아이였다. 지금이야 유별난 애들을 치료도 하고 상담도 하지만, 당시 사고 많이 치는 아이들은 그저 조금 더 까부는 아이 정도로 여기고 특별 관리 대상 정도로 여겨졌던 것 같다. 하지만, 부모님과 주변에서는 활기찬 개구쟁이고 적극적인 아이라 칭찬 해 주었던 것 같다. 어찌 되었든 조금 과한 적극성 덕분에 뒤늦게 들어간 유치원에서도 잘(?) 적응하였고, 급기야 졸업공연(모자 장수와 원숭이)에서 주인공을 하게 되었다.
'모자장수와 원숭이'_모자장수가 잠을 자는 동안 장난꾸러기 원숭이들이 모자를 훔쳐간다. 원숭이들은 잠에서 깬 모자 모자장수 흉내를 내며 그를 놀리기 시작한다. 고민하던 중 모자 장수는 원숭이들에게 그가 있고 있던 모자를 벗어던지는 시늉을 하고, 원숭이들이 흉내를 내며 던진 모자를 다시 주워 간다는 지혜로운 모자장수 이야기다.
다른 기억은 거의 없는데... 한두 가지 기억이 난다.
하나는, 공연 도중 치욕스럽게도 '남대문'이 열렸던 것이다. 열연 중에 매우 창피해서 지퍼를 올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다시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훗! 7세, 나는 남자였다.
다른 하나는, '원숭이탈'이 갖고 싶어 공연이 끝나고 울었던 기억이다. 주인공은 수염을 그리는 분장을 하고 아빠양복을 멋들어지게 입어 단연 주인공스러웠다. 반면 원숭이들은 타이즈로 된 원숭이 옷에 도화지로 탈을 만들어서 썼었다. 난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원숭이탈이 너무 갖고 싶어서 울었다. 왜 그랬을까... 싶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난 주인공이 얼마나 고독한 것인지 공연뒤의 허탈함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그것이 너무 두려웠었나 보다.(웃자고 해본 말이다. ^^)
큭! 7세, 나는 고독을 알았다.
원숭이 가면은 결국 선생님이 하나 구해 주셨다.
곁다리 낙하산으로 들어간 유치원 졸업무대에서 난 그렇게 주인공으로 열연하며 유치원 졸업장을 받기에 이르렀다. (80년대 유치원 졸업은 자랑거리이다.)
돌아보면, 친구들과 선생님들께 미안하고 감사한 일이다. 제 돈 다 내고 다닌 친구들은 알게 모르게 자신들이 누려야 할 것들에 피해를 받았을 수도 있고, 등록비도 안내는 주제에 여기저기 사고 치고 다닌 날 구박 한 번 안 하시고 예삐 여겨주신 선생님들... 월급은 그대로였을 텐데 어디서 사고뭉치 하나가 들어와서 추가적인 수고를 감당한 것이기에... 내가 혜택을 누리는 것이 누군가에게 피해가 되지 않았어야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알게 모르게 피해가 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엄마는 나에게 전혀 그런 식의 주의를 주지는 않았다.
"넌, 공짜로 다니는 거니까 사고 치면 안 된다" 던가,
"눈치 보며 적당히 먹어라!"는 식의 주의 말이다.
오히려 엄마는 더 당당하고 더 떳떳해 보였다.
말 그대로 쏘쿨! 들어갈 때 상황이야 어떻든 그건 어른들의 일이었고, 애들은 그런 걱정할 것이 아니라는 거였다. 공짜로 들어갔든, 곁다리로 들어갔든 나로서는 누릴 서비스를 마음껏 누리면 되는 것이었다. 그 덕에 난 그리도 떳떳하게 사고를 쳤나 보다.
하지만, 엄마의 그런 떳떳함에도 불구하고 난 우리 형편이 일반적인 수준이 아니라는 것과 그로 인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기 불편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흠... 7세, 난 가난을 알게 되었다.
유치원때와 달리 머리가 좀 커져서는... 가난으로 인한 불편함은 더 많아졌고, 그로 인한 욕구불만도 많아졌다. 혹여 유치원 입학과도 같은 일은 어디 소문날까 봐 창피해서 용납하지 못했다. 또래 아이들에 비해 눈치도 많이 보게 되었다. 사춘기보다 빨리 성장통을 겪은 듯하다. 착한 형은 부모님이 안된다고 하면 조르는 것을 그치고 쉬이 체념했다. 나도 처음엔 그랬다. 엄마 아빠가 "이쁘다~이쁘다~" 하면 정말 이쁜 줄 알고 이내 마음을 달래곤 했는데 머리가 크고 나서 그것이 정말 이쁜 게 아니고 부모님께 철저히 세뇌되어 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나의 방황과 반항은 핵처럼 분열하기 시작했다.
그 많던 자신감(나댐)도 사라져 버렸다. 가난으로 인한 불편함이 싫고 창피하기도 했다. 남들 다 하는 것을 하지 못해서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하더라도 돈을 다 주고 못 다니는 나의 처지가 싫었다. 그럼에도 엄마는 피아노 학원 선생님께 부탁하여 날 공짜로 학원에 다니게 했고, 다니고 싶던 태권도 학원도 사정하여 DC를 받고 다녔다. 문방구에 가서는 외상을 하고 준비물을 사주기도 했다.
뭐 급하면 그럴 수도 있고, 목사자식이라 혜택을 받아 기왕이면 싸게 다니면 좋았을 수도 있겠지만, 그냥 우리 집이 돈이 없어서 할인을 부탁하고 목사자식이라는 것으로 동정심에 외상을 받아야 하는 것이 싫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살 것이지 남들 하는 대로 다하고 살려니 그렇지...'라고 핀잔을 줄지 모르겠다. 하지만, 자식을 둔 부모라면 다른 아이들 하는 것을 똑같이 아니 더 잘 못해주는 심정을 이해할 것이다. 그리고 사춘기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이 일이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는 것을 조금은 느끼지 않을까?
목사 사모도 엄마이고, 그 아들에게도 사춘기는 온다.
잘은 몰라도 사회, 문화가 발전하면서 다뤄야 할 악기도, 가보아야 할 곳도 많아진 것을 보면 지금 가난한 사춘기 학생들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 같기도 하다.
난 과학시간에 필요한 과학상자도 못 샀고, 입회비와 활동비가 필요한 보이스카웃에 들어갈 수 없었다. 보이스카웃은 목사 DC가 안 되는 터였으리라... 발명에 소질이 있어서 추천을 받아도 돈이 문제였고, 노래도 곧잘 해서 합창반에 뽑혔지만 활동비를 낼 수 없어서 포기했다. 처음엔 엄마의 회유와 설득으로 이런 것들을 포기했지만, 6학년이었나...? 반장선거를 앞두고 반장이 되면 이래저래 부모님이 학교도 많이 와야 하고 돈도 많이 들었던 관계로 스스로 쿨한 척 반장을 포기하기도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반장이 될 자격을 포기한 것이라 해야겠지만...
안타깝게도 나의 경제개념은 'DC, 외상, 거저, 공짜'부터 습득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제 돈 다 주고 무언가를 사면 무진장 손해 보는 느낌이다) 동네 곳곳이 외상집이었다. 외상값이 얼마 되지 않을 때는 이것저것 당당하게 외상 했는데... 금액이 좀 많아지면서 엄마가 외상을 갚아 줄 때까지 어딜 다닐 수가 없었다. 물론 집안 사정을 다 아시는 분들이기에 돈 달라고 닦달하는 경우는 없었지만 그냥 뭔가 찜찜하고 눈치가 보였던 것 같다. 조금 오버하자면, 빚쟁이의 마음이 이런 마음일까...? 돈 얘기만 나오면 주눅이 들고 자신감이 없어진다. 그래서 그런지 학자금 대출, 신용대출... 뭐 이런 일로 은행에 갈 때면 왠지 위축되고, 경찰서 다음으로 은행이 무섭다.
그 덕에 어느 순간 난 나의 삶의 전반에 걸쳐 가난이 엮여 있으며 이것이 나도 모르게 나의 행동을 눈치 보고 소심하게 만드는 장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학원도 과외 활동도 돈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순간 다닐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날 위해 우리 집의 어려운 사정을 말하고 배려를 받아서라도 나를 다른 아이들처럼 해주고 싶었던 엄마의 마음을 아는 순간 다 싫어졌다. 그럴수록 더 열심히 해서 공부도 잘하고, 부모님 말씀 잘 듣는 그런 아들이 되었으면 많은 성공한 사람들의 에세이처럼 참 훈훈하게 이야기가 전개될 텐데... 난 그런 착한 주님의 자녀와는 거리가 멀었다. 차라리 공부나 과외활동에는 흥미 없고, 하고 싶은 대로 돈 쓰고 잘 노는 그런 캐릭터... 그게 나였다.
주저리 썼지만 사실 원인과 결과를 정확하게 연결 짓기는 어렵다.
정말 가난했기 때문에 내가 위의 모든 것을 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처한 상황이 싫어 그걸 핑계 삼아 부모님을 더 난처하고 마음 아프게 하려 했던 것도 없지 않아 있었던 것 같다.
아빠가 돼서야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난 정말 나쁜 아들이었다.
불편한 이야기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가난을 알게 되고 난 이런 피해의식에 서서히 잠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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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거리
1) 우리 집은 가난하다 생각하는가?
2) 목사가 부자라면 어떨 거 같은가?
3) 탕자와 아버지, 그 형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