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너무 빨리 만난 아이

PK/MK 에게 신앙이란...?

by 텐웰즈 원쓰


일찍 하나님을 경험하고 신앙을 세워 나가는 아이를 볼 때면 교회에서는 칭찬 일색이다. 교회에도 열심히 나오고 기도도 잘하니 얼마나 착한 아이인가? 그러고는 묻는다.


"너 공부 잘하니?"
"넌 신학 할 거지?"

고등학교 올라가서 내 성적은 더 떨어졌다.

반면 신앙생활과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관심은 높아졌다.

내 성적을 신앙생활과의 상관관계로 엮어서 말씀하시는 분들도 많았다.


'교회 열심히 다니는 학생은 공부도 잘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교회 생활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성적을 잘 받아야 한다'

좋은 말씀들이시긴 한데...

역으로 나를 보시며 대부분의 어른들은 걱정을 하셨다.


'저러다 대학 떨어지면 교회 탓하며 후회한다'

'재수하면 폐인 된다'

'지방대학 가면 대학 생활에 빠져 신앙생활을 등진다'

등등의 감사한 걱정들을 나를 위해 건네셨다.


그러고 보니 학교에서도 비슷한 말들을 들었던 것 같다.

'교회 가면 성적 떨어진다'

'수련회, 교회 갈 시간 있으면 영어 단어 하날 더 외워라.'

'그래, 넌 대학 상관없는 마음껏 해도 돼...'

등의 협박들 말이다.

생각해 보니 당시 학교보다 교회에서 더 인정받고 배움이 많다 느꼈던 것 같다.


학교에서는 그다지 두드려지는 것 없던 내가 교회에서는 칭찬받는 일이 많았었기 때문이었다. 찬양팀도 하고 학생부 임원도 하고, 주중에 성경공부와 공예배에 빠지지 않았다. 심지어 대학 입학을 앞두고 고3 수험생 기간 동안 난 금요 기도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수능시험 바로 전주 금요 기도회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많은 분들이 자신의 자녀들과 교회의 고3 친구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아직 몇 해나 남은 자녀들의 수능과 진로를 위해서도 기도하고 계셨다. 하지만, 그 자리에 나와서 기도하는 나를 이해하시지는 못하는 눈빛들이었다. 물론 격려와 기도도 많이 받았다.


수능을 치렀고 당시 400만 점 중 마지막 모의고사 대비 총 100점 상승 대박! 을 이루었다.


하지만, 중하위권 성적의 교회 열심히 다니던 학생이 중위권 성적이 된 일은 교회에서나 일반에서나 큰 자랑거리는 아니었다. 대학교는 문 앞에도 못 갈 줄 알았던 내가 대학을 갈 수 있게 된 일, 대박 나서 서울 집에서 2시간 걸리는 수도권 대학교에 갈 정도의 실력이 된 것... 이런 나의 이야기를 누구도 *간증이라 여겨 주지 않았다. 나조차도 당시에는 주제도 모르고 왜 더 좋은 대학에 붙지 못했는지 원망했다. 은혜가 없었다면 대학이라곤 구경도 못했을 나인데... 은혜는 그새 잊히고 금방 원망하고 또 슬퍼한다. 마치 엘리야처럼...


중고등학교 때 나와 신앙생활을 함께하던 또래 중 아직까지 함께 있는 친구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크지 않은 우리 교회만의 특징일지 모르지만 약 30% 정도 되는 것 같다. 그나마도 요즘에 비하면 나은 편이다. 중 고등부 교사를 수년째 하고 있지만 온전히 중 고등부를 졸업하고 청년부에 올라가는 학생의 비율은 과장해서 50% 남짓이다. 그전에 초등부에서 중 고등부에 올라와 50% 이상 떨어져 나가는 것을 포함하면 이미 30% 정도 수준이다. 이 아이들이 군대, 직장 생활하면서 10% 남짓 남는 것 같다. 간혹 청년이 되어 교회를 찾아오는 친구들도 있긴 하지만, 어린 시절 예수님을 아는 친구들이 교회를 등지는 경우는 매우 흔해졌다. 대부분은 교회를 탓하거나, 사역자나 교사들을 탓한다. 학교 교육과 비슷한 것 같다. 부모들은 쉽게 학교나 교회에 그 탓을 돌리고는 한다.


'교회 교육 시스템과 지원이 부족하다'
'교역자와 교사의 자질이 문제이다'

심지어,

'우리 아이의 신앙 교육을 위해 더 크고 좋은 교회로 옮기려 한다'


는 의식 있으신(?) 집사님들도 보았다.

그러면 마음의 부담이 좀 덜어져서 그럴까?

그나마도 신앙 교육을 잘 시키고 싶은 부모의 애틋한 한 마음이라고 치자.


학업은 학원이나 과외까지 시켜가며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끝나는 문제라 생각한다. 아니, 취업을 위한 학원까지도 있으니 자녀가 결혼할 때까지의 부모는 다양한 시스템에 의존해 적절히 아이의 양육을 책임 전가할 수 있게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신앙생활은 그렇지 못하다. 학원 선생에 맡기듯이 주일 학교에 맡기는 성격이 아니다. 과외를 시키듯이 개인교습이라도 시킨다 해도 잘 듣지도 않을 것이다. 신앙교육은 살아있는 교육이고, 부모의 삶을 통해 교육되는 무시무시한 대물림과 같은 것이다. 교육의 특성이 그렇듯이 교육을 시키는 사람, 즉, 교사로서의 부모의 역할과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간혹 부모 중에선 오히려 신앙이 너무 깊어 질까 걱정을 하곤 한다. 그런데 그런 걱정이라면 굳이 하지 않으셔도 될 듯하다. 그런 걱정을 하시는 부모님의 자녀들이 신앙이 좋을 확률은 매우 낮으며, 그 이유는 그런 걱정을 하시는 부모님 덕분이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혹, 그런 자신에게서 건강한 신앙을 세워나가는 자녀가 있다면 기적이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한다.


태생이 목사 아들이라서 그렇다고 말하면 할 말 없지만, 목사 아들이 신앙생활 잘하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앞서서는 부모들(목사와 사모)의 모순적인 행동이 그 중요한 요인이라 하였으나, 한편으로 너무 빨리 신앙생활을 알아버린 '조숙아'로서의 외로움이 더 큰 어려움이었던 것 같다. 외로워진 조숙아들은 고립을 피하기 위해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선택을 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죄책감과 상처들로 하나님과의 담이 더 높이 쌓여간다. 나름 학생 때부터 신앙생활을 잘해보고자 했던 내가 어느 순간 고독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처럼 지금도 어딘가에선 상당히 외로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들이 적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믿었던 교회 친구들 마저도 쉽게 죄라 여겨지는 것들과 타협하고 지향점과 가치관이 점점 달라진 친구들은 점점 나를 재미없어한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내가 좋아하는 예수님 이야기를 할 수 없게 된다. 적절한 타협점을 찾지 못하는 이상 공동의 재미가 없어진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기조차 힘들어진다. 타협점을 찾더라도 조금씩 벌어지는 관계는 우리로 하여금 선택을 요구한다.


All or Noting? _ 또래의 무리와 같지 않을 것이라면 떠나라는 것이다.


구원은 단회성 경험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구원은 시작이며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으로 들어가는 첫걸음인 것이다.

한번 구원이라는 자격증을 따면 그것으로 끝나는 무언가가 아니다. 이력서에 '구원의 확신이 있음'이라고 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비교적 어린 시절 이런 구원의 역사에 대한 확신을 갖는 아이들은 죽기 전에 주님을 만난 행운아들과 달리 정말 긴 여정에 들어가는 것이다. 마음껏 살아가는 친구들을 보며 내가 경험한 구속의 역사를 부정한 적도 있다. 아직 어리니 괜찮다고 합리화하며 적당히 일탈을 즐기기도 했다.


까놓고 말하면 중, 고등학교 시절에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찬양, 기도, 예배, 큐티 등을 열심히 하는 아이는 좀 지질하게 보는 경향이 있다. 왠지 하나님 얘기만 할 것 같고 같아 재미없어 보인다고 한다. 나처럼 학교에서 부각되지 않는 애들이 교회에서 부각을 나타내거나 하는 것도 그런 이미지를 주는 것 같다. 또 왠지 신앙 좋은 부모님의 말 잘 듣는 샌님 자식 같아 보인다고나 할까? 심지어는 신앙이 좋은 아이들은 교회 친구들에게 마저 바른말하는 애로 외면되기 십상이다. 그 애와 함께 있으면 항상 정죄감을 느끼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친구들에겐 재미없는 애처럼 보이고 조금만 교회에 열심인 뉘앙스를 비춰도 엄청 신실한 애로 비쳐 놀림을 받기 십상이다. 혹시 믿기지 않으시는 어른들이 있으실까 봐 다시 말씀드리면, 신앙 좋다는 게 놀림거리가 된다는 이야기다.


민감한 청소년기에 그것을 영광의 시험이라는 말로 아이들을 격려하지 말자. 경험하는 본인은 정말 힘들다. 개인의 사회성 문제로 여기는 분들도 있으시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자타가 공인하는 사회성을 가진 나조차도 최대한 신앙에 대한 노출이 꺼렸던 것 같다. 혹 아빠가 목사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은 지금 생각해도 긴장된다. 그렇다고 신앙 좋은 친구들끼리 모여 다니기엔 그 수가 턱없이 부족하며, 또... 왠지 재미가 없다. 자고로 청소년기의 재미는 '일탈행동'이 아니던가...? 교회 열심히 다니다가 혹시라도 실수를 하거나 잘못을 저지르면 엄청난 비난이 돌아오기 때문이다. 간혹가다 신앙도 좋고 교회 봉사도 열심히며 학교생활도 잘하고 친구 관계도 원만한 목사 지식계의 엄친아라도 나오면 모든 목사, 사모들은 큰일이라도 난 듯 기도한다. 우리 애에게는 사단이 들었나...? 우리 아들을 통해 왜 저를 연단하시나요...? '


제발 우리 아들도... 그나마도 묵묵히 기도만 해주시면 괜찮은데 꼭 5절까지 있는 찬송가처럼 끝없는 비교와 잔소리를 하시니... 이 또한 얼마나 머리 아픈 일인지... (요즘 아이들은 4절을 뇌절이라 하더구먼, 찬송가는 5절도 있다....ㅎㄷㄷ)


목사이시면서 부모님이신 분들... 절대 조심 부탁드린다.


그러시다 옆 교회 김 목사 님, 앞 교회 박 목사님과 비교당하시면 자존심 상하시잖아요. 저희에게는 두 분이 시험 이자 연단입니다. 여하튼, 그래도 나의 경우 다행인 것은 일탈을 꿈꾸다가도 마음 한구석이 찜찜하여 더 큰 잘못을 하기 전에 돌이키곤 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어린 마음에 하나님을 빨리 알게 된 것을 후회했다.

죽기 전에 회심하고 하나님 품에 안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진장 부러웠다. 마음껏 살다가 한방에 주님께 영광 돌린 삼손도 조금 부러웠고, 심지어는 지질하지만 자기 마음대로 살아본 탕자마저도 부러웠다. 뭐 서두에도 말했지만 많은 사람들의 기대대로 하나님을 일찍 만난 친구들이 죄다 목사로, 사역자로 살기 위해 무결점의 준비된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할 말 없다. 마치 신부, 수녀 준비생 정도로 여겨주는 것이라고 여겨 준다니 감사하다.


하지만, 모두가 목사님이 될 수 없지 않은가? 모두 선교사나 수도사가 될 수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리고 목사가 되던 그렇지 않던 우리의 삶에서 신앙을 지켜 나간다는 건 그렇게 한방에 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지 않은가? 어려운 현실의 문제 앞에서 많은 청소년들이 혼자의 힘으로 어린 시절에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 뜻대로 살고자 노력하는 건 정말 쉽지 않다는 것은 이 글을 읽고 있는 어른들이 더 잘 알지 않을까?





한참을 이런 고민에 빠졌을 때였다.

'성은아, 난 너를 보면서 기대가 된다.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을 너를 하나님이 얼마나 크게 사용하실지 기대된다.'



평소 나를 아껴주시던 선생님의 말이었다.


중 고등부 당시에는 선생님 하면 어른 같아 보였는데 지금 돌아보니 오늘의 나보다 어린 20대 중, 후반 정도였던 것 같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내가 가보지 못한 길을 먼저 가본 사람이 뒤따라 오는 날 보며 해주는 말 같았다.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었다. 또래 중에는 내가 가진 고민과 신앙을 나눌 사람이 없었지만 그래도 내 길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받은 것 같았다. 그 후로는 종종 청년 선생님들이나 전도사님들과 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묻고 배웠던 것 같다. 또래 중에 같은 고민을 하는 친구를 찾는 것보다 이것이 더 편했다. 하지만 그분들의 조언이 썩 마음에 와닿거나 하지는 않은 경우도 있었다. 아마 본인들도 자신이 말하고 있는 신앙의 내용에 대해 고민하고 도전하고 있었던 때였으리라 생각된다. 지금의 내가 그때 선생님들 정도인 듯한데... 아이들이 나에게 신앙에 대한 문제를 물어온다면 난 아마 그 형, 누나들과 동일하게 정답 같은 재미없는 말을 해줄 것 같다.


'응, 그럴 때면 이렇게 해봐'
'기도, 묵상은 이렇게 하니까 잘 되더라'
'커닝? 당연히 안되지. 그건 범죄야! 도둑질이야!'
'내가 다시 네 나이로 돌아간다면 절대 그렇게 살지 않을 거야...'
'나 때는...'


아마도 그런 이야기는 조언하는 우리가 생각하기에 중, 고등학교 때 누군가로부터 들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싶은 이야기 들일 것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외로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그 친구들이 듣고 싶어 하는, 정말 갈급한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다시 한번 그때로 돌아가 감정이입을 해보자면,


'오!? 그래? 나는 네 나이 때 그런 생각도 못 해 봤어!'
'잘하고 있는데? 충분해!'
'너무 잘하려고 스트레스받지 마... 넌 잘하고 있어'
'아직 우리는 과정을 사는 것이고, 넌 그 과정에서 최고로 잘하고 있어...'


라는 격려가 고팠던 것 같다.


외로운 고민 끝에 선배들의 조언으로 비로소 신앙이라는 건 나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지 누가 가르쳐 준대로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며, 누구를 따라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백 번의 다른 사람의 간증보다 내가 직접 경험한 하나님이 더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험하고 알아가는 방법은 계속적으로 훈련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내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 가는 중 도움이 된 많은 선생님들과 책들이 있지만 중요한 건 하나님과 내가 1:1로 이야기하는 것을 익혀가고 있냐는 질문이다. 혹, 누가 말해준 하나님, 누군가에게서 일어난 일을 보고 알게 된 하나님만 알고 있다면 철저하게 개인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교회에 신앙생활 잘하는(?) 아니 교회에서 자주 보이는 친구를 만나면 아직도 그렇게 물을 것인가?


‘어디 학교 다니니?’
‘공부는 잘하니?’


대신 이렇게 물어보자.


'교회 오면 뭐가 재밌니?'
'요즘 좋아하는 것은 뭐니?'


설마… 그렇다고 딱딱하게 그대로 물으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먼저 제한하지 말고 그 아이 안에 있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순수함, 열정, 갈망들을 물어보라는 것이다. 아이들은 그런 질문들을 통해 한 번 더 더 고민하게 될 것이다. 다양한 질문은 문제에 답을 푸는 고민이 아니라 생활 중에 건네받는 보다 살아있는 고민이 될 것이다. 아이들은 그 고민을 통해 어떻게 하면 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계속 고민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번외로, 10년 차 교사로 이 시기의 청소년들을 지켜보는 성도들의 역할은 분명 바른길로 선도하는 것 일수 있겠지만 바른길의 모양이 너무 제한적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종종 수련회 때 보이는 아이들의 특별한 예배의 모양을 보고 엄청 감동받으시는 장로님, 권사님들이 계시다. 그리고 돌아와서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면… 메마른 영혼이라며 안타까워하신다.


자… 생각해 보자.


지금 우리 중 고등부 아이들이 50명 남짓인데... 이 아이들이 모두 3명 이상 전도하여 150명이 되고, 주일마다 찬양단을 서며, 매 예배 때마다 통성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는 아니지 않은가? 하물며 측정 가능한 것이 그것뿐이라 한들 아이들에게 그 기준을 전수해 줄 필요가 있을까? 어른들이 경험하는 숫자가 주는 안정감에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까? 경험해 보니 상품 타기 위해 노력하여 획득한 전도왕 아무 소용 없더라! 감정에 취해 울며 기도한 아이들… 감정에 익숙해지면 절대로 어린 신앙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 많이 봤다. 돌아보니 전도왕이 전도해 온 수많은 친구들도 눈 씻고 찾아봐도 잘 안 보인다. 하물며, 그전도 왕 중에서 지금 교회 남아 있는 친구도 많이 안 보인다. 전도왕에게 자동차 주듯이 이런저런 선물을 주는 그런 신앙생활 말고 보다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의 신앙의 도전이 필요하다.


아이들 한 명 한 명이 존귀한 존재로 여겨질 수 있도록, 각자가 하나님과 교제하며 신앙을 세워 가는 것, 그 독특함을 인정해 주고 각자 나름으로 잘하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싶다. 하나님과 직면하는 신앙생활을 가르쳐 주면 어떨까? 그러기 위해선 교사가 그런 신앙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이렇게 말은 잘하지만 10년 가까이 교사를 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열정 없는 나 스스로에게 던지는 고민이다. 어쩌면 내가 경험한 청소년기의 외로운 신앙생활에 지금까지도 메여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요즘 애들은 신앙에 관심이 없어…’,

‘신앙은 혼자 이겨나가야 해…’라며 혼자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대화거리


1) (자녀에게) 친구 중에 신앙심이 좋다 생각되는 친구가 있는가? 어떤 친구인가?


2) (아빠에게) 친구 중에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친구가 있는가? 있다면 어떤 친구인가? 없다면 왜 없는가?


3) 다니엘의 삶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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