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이라는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인데 '피해의식'은 사단이 사용하는 주요 무기 중의 하나라는 사실이다. 사람의 마음에 이런 반응이 커지면서 타인에 대해 부정적이 되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부정적이 되기 때문이다. 비교에 의해 나를 깎아내리고 자존감은 떨어진다. 교회에서는 나를 존귀한 자라고 하지만, 전혀 내 삶에서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결국 내가 존귀하지 않거나 하나님이 능력이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곤 한다.
한 번은 엄마가 같은 시장에서 일하는 분에게 돈을 빌렸는데 같은 학교 다니는 친구의 엄마였다. 장사하는 사람들끼리 있을 법한 일이지만 나로서는 끔찍한 일이었다.
중학생이 될 즈음 자연히 성적은 떨어졌다.
내 학업이 걱정이 되었던 엄마는 어려운 중에 제 돈을 다 주고라도 나에게 공부를 시키고 싶어 했다. 당신도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았고, 나의 원망도 듣기 싫었던 것 같다. 이미 그전에 포기했을 수도 있지만, 엄마는 사모로서 누릴 수 있는, 아니 누리고 싶은 그 무언가를 포기했다. 사모로서 받을 수 있는 존경이나 사랑의 표현들 말이다. 오히려 엄마는
"사모가 믿음이 없어 돈 벌러 다닌다"
는 주변의 조롱과 성도들의 눈빛
"예수 믿더니 잘 살기는커녕 저러고 있다"
는 믿음 없는 형제들의 비웃음을 감내하면서도 엄마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는 자책감은 뽀나스 랄까?
이런 감정은 고작 '목사아들'인 나로서는 절대 공감할 수 없는 감정들일 것이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할 수밖에 없는 엄마의 모습은 무척 안쓰러웠고, 그러다 보니 밖에 나가서 다른 아빠들처럼 돈을 벌어오지 못하는 아빠의 모습은 무기력해 보였다. 하나님께서 저마다 훈련시키시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알기 전 즉, 아버지를 훈련하는 것과 어머니를 훈련하시는 방법, 그리고 나를 훈련시키시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아빠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목사는 왜 나가서 '막노동'이라도 못하나?'
'그냥 목사 안 하고 돈 벌어 오면 안 되나?'
하는 그런 마음 말이다.
적어도 지금은 그런 원망을 하진 않는다 하지만, 어린 시절 경험 때문인지 지금도 경제적인 면에서 아빠보다는 엄마를 의지하는 건 어쩔 수 없는가 보다. 아빠는 경제적인 방면에 똑똑하게 반응하는 타입은 아니다. 오히려 경제적인 면에 대해서는 우리 가족 중에서 믿음이 가장 크신 분이다. '하나님이 주시면 쓰고, 안 주시면 안 쓴다'는 단순 명쾌한 물질관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다른 가족들이 그 믿음을 받쳐주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 목사님들이 돈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져도 문제 일수 있지만, 가정 경제에 대해서는 좀 관심을 갖고 책임 있게 행동하면 좋겠다는 대목이다. 신학과에서 재테크를 좀 가르쳐 주면 어떨까 생각한 적도 있다.
믿음을 가진 부모라면, 그저 보이는 믿음이 아닌 '참 신앙'을 가진 부모라면, 신앙이 약한 자녀들을 배려해 주어야 한다.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소외되지 않고 함께 공감할 수 있도록 중보해야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자식들에게 신앙을 물려준다는 건 말뿐 아니라 삶으로 잘 물려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 안에 정말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잘 담아 보여 주어야 한다. 물론, 청소년기 자식을 아직 키워보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말한다 할지 모르겠다. 혹, 이제 태어난 지 일주일 된 우리 딸이 자라서 가난으로 인해 나를 원망하면 생각이 또 바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일주일 된 아빠가 감히 부모로서 이래야 한다고 하는 말이 아니다. 신앙의 부모 밑에서 자란 "자식으로서 그리스도인 부모에게 하는 요청"이다. 내 자식은 착해서 다 이해해 주고 감내하겠지...라고 생각 했다간 큰코다친다. 다 이해하고 잘 참아 준 것 같은 자식이 커서 물질에 집착하는 어른이 될 수 있고, 표현은 하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위축되어 지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의 유년기처럼...
실제로 간간히 만난 목사 자녀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들의 꿈이 돈을 많이 버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종종 보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번 돈으로 부모님을 돕거나 좋은 일을 하고 싶다고 한다. 자라나는 자녀들에게 물질에 대한 신앙관을 잘못되게 심어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때문에 가난으로 인한 원망을 사지 않기 위해서라도 목사가정의 이유 있는 가난은 자식들과 충분히 공감되어야 한다. 부모의 신앙에 자녀들의 피해의식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는 물질적인 면뿐만 아니라 마음의 부분까지도 동일해야 한다.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족하는… 배부름과 배고픔, 궁핍과 풍부에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빌립보서 4:11-13"
우리의 이유 있는 가난은 훈련의 과정이다. 이런 훈련이 궁색함이 되지 않도록 부모들은 삶에서 말씀대로 순종하기 위한 노력을 보여 주어야 한다. 물론, 우리가 선택한 '가난해도 되는 삶'이라는 가치의 범위 안에서, '가난'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살기 위한 훈련의 도구라 여길 수 있어야 한다.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자족함’으로 반응하여 그 불편을 감내할 경우에 우린 그것을 감히 훈련이라 말할 수 있다. 혹, 부모인 본인이 스스로 느끼기에 가난이 그저 고난이며 고통이라고만 느껴진다면, 그래서 그 불편에 대한 불평과 불만뿐이라면 그 가난은 훈련이 아니다. 이때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초점이 되기보다는 가난을 극복하고 그로 인한 불편함에 초점이 되어 해결책만 모색하기 급급하게 된다. 하지만 종종 상황을 빌미로 하나님께 핑계 삼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가난을 훈련이라 여겨지지 않으면서 그것을 극복할 노력을 하나님께 돌리는 경우이다. 이경우 부모는 자신뿐만 아니라 가정과 자녀를 위해 기도하며 최선을 다해 가난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보여 주어야 한다. 우리가 처한 가난의 원인이 게으름 때문으로 비치기 쉽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상기하지만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가난을 극복하자!'는 결과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과정과 노력, 진정성이 자녀들과 공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난해도 되는 삶은 우리에게 허락되는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극단적이긴 하지만 믿음이 약한 사람이 가난해졌을 때 하나님을 더 찾게 되는지, 부유해졌을 때 하나님을 더 찾게 되는지를 생각해 보자. 왜 우리의 믿음이 가난에도 처할 줄 알아야 하고 부유함에도 거할 줄 알아야 하는지를 기억하게 해 준다.
지난 주일 설교 말씀 중 양과 양의 탈을 쓴 이리를 구분하는 방법을 말해 주셨다. 평상시에는 모르지만 배고파지면 알게 된다고 한다.
양은 풀을 먹고, 양의 탈을 쓴 이리는 양을 먹는다.
가난해지는 방법은 욕심내지 않는 것과 함께 내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으로 훈련되어야 한다. 굳이 가난해지거나 부유해지려고 노력하지 말고 주시는 은혜에 맞게 살기로 기도하자.
내가 자존심 상해하는 것을 알고, 엄마는 돈을 구하셔서 학원비를 나에게 직접 주셨다. 하지만, 난 이미 공부와는 거리가 멀어져 있었다. 엄마가 애써 마련한 돈으로 직접 학원을 선택하여 등록하고도 결석을 밥먹듯이 했다. 아니 출석을 한 달에 2번인가 밖에 안 했다. 결국 집에 전화가 왔고, 그날 난 아빠에게 마지막으로 매를 맞았다. 초등학교 6학년 겨울이었다.
우리 집이 넉넉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순간, 아니 넉넉하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다른 아이들처럼 학원을 다니거나 과외활동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과학상자를 사지 못하고 보이스카웃에 들 수 없을뿐더러 일상 준비물도 문방구에서 외상으로 사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즉, 가난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그리고 '가난'으로 인해 할 수 없는 것이 나에게 있음을 알게 된 순간, 난 꿈을 꾸는 것도 심지어 사고 치는 것도 자신감이 없어지고, 당당함도 사라지게 된 것 같다. 스스로 위축되고 눈치를 보게 되었다. 내 신앙이 생기면서 많은 부분 회복해 가고 있지만 형은 아직도 가난이 가진 위협적인 요소가 삶의 가장 큰 문제로 여기고 산다. 그리고 열심히 다양한 방법으로 보다 부유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신앙은... 그다음이다.
꼭 목사자식이 아니더라도 어린 시절 가난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물질에 집착하는 것을 누가 무어라 하겠는가? 하물며 부유하게 자라온 자녀들은 더욱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열심히 살아서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다면 오히려 자수성가했다고 칭찬해 줘야 하지 않나? 비록 부모세대는 어렵게 살았지만 자녀들만큼은 어떻게 해서라도 안정적으로 살기 원하는 게 부모님들 마음 아닌가? 반대로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 분 중 부자가 되는 것을 정죄하기만 하고 계신 분은 안 계신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런 것이 아니다. 잘하고 잘못했고를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어린 시절 가난을 경험했기 때문에 꼭 많이 가져야만 행복할 것 같다고 생각을 하는 그 가치관이 위험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행복을 너무 비싸게 만들어 현재 누리고 살아갈 수 있는 많은 행복한 것들을 값없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험상 그렇게 값없어지는 것의 가장 우선순위에 신앙, 믿음이 들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철없이 '왜 우리 집은 가난하냐...?'
심지어는 다른 목사 자식들은 잘 사는데... 왜 우리는 이렇게 사느냐?라고 물으면 엄마는 '우리는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아놓고 살고 있다'는 알아듣지도 이해되지도 못하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말을 하곤 했다.
그때 일을 회상하며 가끔 엄마와 대화를 하면 엄마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그렇다고 그때 네가 정말 못해본 게 몇 개나 되는가 말해봐라."
놀랍게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니 위에 주저리 쓴 것처럼 많이 있겠으나, 당시 못해서 큰일 날 것만 같았던 그 일들로 인해 내 인생이 크게 흔들리거나 문제가 되진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어떤 일도 미련으로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놀라운 일 아닌가...? 아마도, 그렇게 되기까지 아빠, 엄마는 몇 바가지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모유를 먹이고 싶은데 모유가 잘 나오지 않으니 우리 부부가 할 수 있는 건 기도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지금, 우리 아기에게 해가 잘 드는 집에서 살게 못해주는 가난한 아빠의 심정이 되어 보니 알게 되는 마음이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기도한다.
지금의 부족함이 아이에게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게 해달라고, 모자람을 알게 되겠지만 그것이 상처로 남지 않게 해 달라고, 물질적인 부족함이 부모로서 부족함의 기준이 되지 않게 해달라고...
그리고 회개한다.
철없는 말로 부모님의 마음에 상처 준 일과 나의 말에 상처받았을 아빠와 엄마의 마음을 위로해 달라고... 그분들의 마음에 죄책감이나 미안함이 있다면, 원망이나 분노가 있다면 난 이제 괜찮으니 깨끗하게 해 달라고... 나에게 해 주신 것처럼 부모님의 마음도 깨끗하고 평안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세상의 많은 가난한 부모님들께... 나의 오해를 사과하고 싶다.
이 책의 이야기들을 정리하기 시작하면서 가장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냐고 묻는다면 나와 비슷한 경험을 어디선가 하고 있을 친구들에 대한 공감, 위로가 그 첫 번째였고, 가난한 부모에 대한 오해… 그것에 대한 사과가 두 번째였다. 느끼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난 지금 창과 방패의 이야기를 함께하고 있다. 하나는 부모의 신앙과 가난으로 인해 자식으로 피해의식을 입었으니 열심히 공감하며 살아 달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부모의 마음을 모른 체 상처 주며 살아온 날들에 대한 반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중적이고 상충되는 이야기 같지만 이 두 가지가 만나는 접점이 혹시라도 이 글을 읽을 부모와 자식 사이에 일어났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리 되길 기도한다.
대화거리
1) 우리 가족이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라 생각하는가? 무엇을 할 때 가족이 가장 행복하다 생각하는가? 그것을 할 약속을 정하자.
2) 노아와 세 아들들의 이야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3) 해주고 싶은 것을 다 못해주는 부모님의 마음에 괜찮다고 말해주자.
**불편함을 잘 인내하는 자녀들에게 고맙다고 말해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