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큰 교회 목사 아들 일 수 있었다. 허세를 부리자면 왜 못 부리겠는가? 왕년에 집에 금송아지 한 마리 없었던 사람 없듯이 우리 집도 그러했다. 어느 정도 안정적인 개척교회로 접어들던 시기에 아빠는 좀 더 개척정신이 발휘되었던 것 같다. 어린 나는 잘 모르지만 서울로 목회를 하러 가시기로 결심하셨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가정이 그렇듯이 아빠가 정하면 군소리 않고 따라가는 것이 진리이던 때였다. 주변의 만류와 걱정, 회유도 있었던 것 같지만 결국 아빠는 새로운 개척의 길을 나갔다. 결과적으로는 잘 안된 서울 개척목회였지만… 굳이 이해가 잘 안 되는 인도하심도 살다 보니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끔 웃으며 이야기하곤 한다. 우리가 만약 지금은 큰 신도시가 된 그곳에서 여전히 살고 있었다면… 아빠가 그 교회의 목회를 계속하고 있었다면…^^ 아빠는 추억조차 하지 못하게 하고, 우리 가족은 아직도 원망 아닌 원망을 하고 있다.
세상에서 비교하는 것이 가장 좋지 않듯이 목사 자녀 세계에서도 비교되는 것이 참 싫다. 특히나 나를 목사 자식으로서 어떻게 보는지도 참 민감하다. 그저 하나의 객체로 봐주면 좋을 것을 항상 꼬리표가 붙어 있어 여간 불편하다. 물론, 그냥 친구로 별로인 넘, 이상한 넘, 좋은 넘... 의 분류에 같이 들어가면 좋겠지만 그 안에서도 같은 목사 자식들끼리의 비교가 되곤 한다.
신경 안 쓸래야 안 쓸 수 없는 이런 상황들이 어렵다.
고등학교 때 반에 좀 큰 교회 목사님 아들이 있었다. 서로 친하지 않았고 이야기도 잘하지 않았다. 해서 나는 그 친구 아버지가 목회하시는 교회가 어디인지 얼마나 큰지 알지 못했다. 친구들이 두 사람을 비교하기도 했다. 서로가 비교될 수 있다는 것을 너무 잘 았았기 때문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던 것 같다. 목사 자식끼리 친하게 지내는 것도 친구들에겐 신기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어리고 잘 모를수록 친구들은 난감한 걸 물어본다. 목사는 월급이 어디서 나오느냐… 집은 누구 돈으로 살고 있냐 등등 마찬가지로 어리숙한 나는 개념 없이 대답한다. 둘이 답이 다르면 난감하고 그래서 항상 문제였다. 여하튼, 그 친구는 담배 피우다 학교에서 걸려 근신도 받고 비슷한 아이들과 어울려 다니며 꽤나 사고를 쳤다. 반면 난 조용히 살았다. (여전히 비교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게 되네… ㅋㅋ) 승자도 패자도 없는 이 비교경쟁에서 남는 건 눈치와 피해의식뿐이다.
검색하다 보니 자기 반 목사 자녀 4명의 친구를 비교해 놓은 포스팅이 있었다.
분석적으로 본 것은 아니고 지극히 개인적으로 정리한 것인데 내가 학창 시절에 내 친구들에게 어떤 친구였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하 인터넷 글_지나친 비속어나 표현은 편집했습니다)
우리 학교는 기독교 미션스쿨이라서 그런지 목사 아들이 유난히 많다.
우리 반에도 4명이나 된다. 그중에 한 명은 가끔씩 반애들 앞에서 삽질을 잘한다.
하지만 사람이 좋아서 내가 가장 친하게 지내고 싶은 친구고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고 싶다.
한 명은 성격이 굉장히 유머러스하다. 역시 사람 좋다.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또 한 명은 뭐 그다지 그렇다 할 특징은 없다. 그저 반 분위기에 조용히 묻혀간다;;
그래도 삐뚤어진 성격은 아니기에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학기 초부터 나름대로 선심을 쓰며 접근을 하고 있으나 난 사교성이 그렇게 좋지 않은지라 쉽지는 않다. 뭐 언젠가 되겠지.
마지막 한 명, 한마디로 말하자면 밥값조차 못하는 **
내가 이 놈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는데 하는 짓거리 짓거리 말 한마디 한마디가 신경 쓰이고 내가 나쁜 모습만 봤나 하여간 내가 보기에는 성격 지랄 같음.
사회의 룰을 모르는 무지한 놈. 나는 나 자신이 굉장히 착하고 관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에 본인에게는 절대 말 못 할 말이지만, 길 가다 벼락이나 처맞아라 ㅋㅋㅋㅋ
내가 그 녀석 개과천선 하는 건 바라지도 않고 뒤에서 자기 욕하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알았으면 좋겠다.
쯧, (중략) … 물론 참된 종교의 가르침을 전하는 참된 종교인도 계시나, 개인의지 상관없이 자기 교회 신도수 늘리려고 발광하는 예수쟁이들 때문에, 그리고 난 그 녀석 때문이라도 기독교 안 믿으련다.
(이하생략)
굳이 목사자녀 4명을 비교하는 이 친구도 참 별로지만… 이건 피할 수 없는 현실이란 것을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으면서 자신이 어디에 속하는지 생각해 보았는가? 재미있게도 난 세 번째나 네 번째 친구일까 하는 고민을 하고 있다. 피해망상까지는 아니더라도 혹시라도 마지막 친구 같은 모습은 아니었겠지? 라며 스스로를 주의하고 경계한다. 이게 다 눈치와 피해의식 때문이다.
만약 네 번째 아이와 친한 친구가 글을 썼다면 첫 번째 아이를 싫어했을지도 모른다. 항상 도드라지고 나서서 삽질하며 시끄럽고 지나치게 활동적인 그 친구를 성향상 싫어하는 아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명이라도 저런 감정을 나에게 느꼈다고 나에게 이야기한다면 난 해결해야 할 정죄감에 몸부림쳤을 것 같다. 아니면 반발심에 더 과장하고 더 잘 보이려 노력할 것이다. 참 피곤한 노릇이다. 이렇듯 다듬어지지 못한 자아는 지금까지도 하나님과 해결해 나가야 하는 숙제이다.
아직까지도 생각 없이 한 내 행동을 사람들이 마음껏 해석해서 상처받고 날 단죄 할 것만 같은 피해의식이 있는 것 같다. 심지어는 그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중죄인이 될 수도 있다는 비약까지 생기게 된다. 위 글에서도 굳이 끝을 그리 맺고 있으니 말이다.
‘나 때문에 교회에 안 다닌다니…’
다행인 건 지금의 나는 이런 피해의식을 건전하게 해결하고 겸손과 낮아짐,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담대함으로 조금씩 바꿔가시는 은혜의 손길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디고 오래 걸릴지라도 그 은혜의 기류를 타고 가면 된다.
친구 녀석들에게 물어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답을 들을 자신은 없다.
답은 내가 보배롭고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깨닫는데서 나온다는 것을 알고 의지하고 싶다. 대신 사과해야 할 것이 있다면 용서를 구하고 싶다. 어린 시절에 나의 연약함으로 상처나 불편함이 있었던 친구들이 있었다면 정말 미안하다.
다른 사람들한테 비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고, 설득해 봐야 소용없는 짓이다. 입만 아프고 변명만 된다. 내가 첫 번째 친구이던 네 번째 친구이던 그런 말은 해봐야 소용이 없다. 그저 계속해서 나를 묶고 있는 피해의식과 싸워나가고 예수님과 좋은 친구가 되고, 또 다른 좋은 친구를 사귀기 위해 좋은 친구가 되어 가는 것을 노력해야 할 뿐이다.
내 옆의 친한 친구에게 잘해주자. 좋은 점을 격려해 주고 약한 부분을 감싸주자. 나의 고민을 나눌 때에도 조심하자. 종종 상황과 형편이 다름으로 인해서 고민을 나누는 것이 시험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고민은 나보다 성숙한 사람에게 나누고 친구들과는 우정과 사랑을 키워나가자. 꼰대 같지만 경험으로 얻은 지혜라 여겨 주면 좋겠다.
대화거리
1) 아빠의 젊은 시절 사역지는 어디였는가? 지금 사역지를 결정하게 된 계기나 인도하심에 대해 나눠달라.
2) (자녀에게) 주변에 목사자녀가 있는가? 그 아이는 어떤 아이이며 나와의 관계는 어떠한가?
3) 아빠가 어떤 목사님이었으면 좋겠는가?
4) 바울의 이야기에 대해 나누어보라. 그 인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