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어린 시절처럼 운다고 해서 누가 나에게 밥을 먹여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대학에 진학을 하게 될 즈음 우리 집은 아빠가 서울에서의 목회를 접으시고 고향으로 내려가시게 되었다. 교회 보증금은 이미 월세 등으로 다 깎여 하나도 남지 않았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하더라도 지낼만한 집 한 칸이 없는 실정이었다. 다행히도 형은 군대에 가 있는 상황이었지만 대학생이 된 나는 집안의 큰 짐이 되었다. 부모님은 마지막 책임이라 느끼셨었는지 내가 수능을 볼 때까지는 어렵사리 자리를 지켜주셨다. 그리고 수능이 끝나는 그 주간 고향으로 내려가셨다. 뭐, 어느 정도는 훈련이 되어 있던 터라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다. 난 그런저런 사정이 있는 것으로 둘러대고 친구집에서 한 달여를 기숙하게 되었다. 말 그대로 기숙이었다. 친구 부모님께서 워낙 잘해주셔서 감사하게 불편 없이 지냈지만 마음의 짐은 어쩔 수 없었다.
차라리 수능이라도 망쳤으면 대학이라는 거 그냥 포기했을 텐데... 이도저도 아닌 점수를 주셔서 어떻게든 대학에 가보려 노력을 했던 것 같다.
엄마가 어렵사리 마련한 전형료로 4개 학교에 지원을 했고 두 곳에 붙었다. 수도권에 있는 학교였는데 당시 살던 집에서 2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학교였다. 학교를 붙고 나니 등록금이 문제였다. 엄마는 부랴부랴 친척분께 가서 아들 학자금이 필요하니 도와 달라했으나 거절당했다. 사실 그간 워낙 많이 도와주신지라 엄마도 더 도와 달라 할 염치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나마 좀 더 이름 있는 학교에 갔으면 엄마가 면이 서셨을 텐데... 듣지도 보지도 못한 학교에 갔노라 말하며 돈을 빌리러 다니는 엄마를 보며 처음으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은행 빚을 얻을 수 있는 형편도 되지 않아 신용보증마저도 또 다른 친척분이 서주시고 입학금 대출을 받았다.
다행히도 생활할 곳은 구했다. 내가 중등부 때부터 가르침을 받은 당시 교회 부목사님 집의 방 하나를 할애받았다. 당시 나는 친구 집을 나와야 할 상황이라 전전긍긍하고 있었고 평소 성경공부를 하러 다니던 목사님 댁의 빈방 하나를 발견했다. 사실 빈방은 아니고 갓 태어난 딸아이의 방이었다. 염치 불고하고 목사님께 방을 내어 달라 했다. 방세는 물론 낼 수 없다고 웃으며 말했던 것 같다. 목사님은 그러라고 하셨다. 기억이 잘 안 나지만 바로 승낙을 하시진 않으셨던 것 같다. 아마 사모님과 이야기를 나누셨던 것 같다. 나는 이 부탁이 부탁받는 사람에게 얼마나 힘들고 난처한 부탁인지 결혼을 하고서야 비로소 체감하게 되었다. 다 큰 청년이 크지 않은 우리 집에서 함께 살게 된다는 것이 얼마나 부담스러운 일인지 말이다. 게다가 지금 사역하고 있는 교회의 청년, 부모님이 목사인 가난한 제자의 부탁을 쉽사리 뿌리칠 수 있었을까 싶다. 여하튼 난 그렇게 그 목사님 댁에서 반년 간을 지냈다. (반년 간 생활하면서 정말 배운 것이 많지만 지금 이야기의 핵심이 아니기에 아쉽지만 그냥 넘어가겠다.)
무료로 살곳이 정해진 나는 알바를 하진 않았다. 그저 예전처럼 교회일에 열심히였다. 일주일에 2만 원씩 보내주시는 부모님의 용돈으로 차비와 점심값을 쓰면 빠듯한 생활이었다. 당시 차비를 제외하면 하루 1500원 정도가 점심 식대였다. 당연히 친구들과 어울릴 수 없었을뿐더러 그럴 의욕도 없었다.
한 번은 월요일이 되었는데 용돈이 올라오지 않은 적이 있다. 학교를 빼먹을까도 생각했지만 중요한 날이었던 것 같다. 결국 난 함께 사는 목사님께 1만 원만 꿔달라고 했다. 아직도 얼굴이 빨개지고 참 비참한 기억이다. 목사님이 어때서가 아니라 그런 말을 할 정도까지의 내 처지가 그랬다.
어렵사리 들어간 대학은 그다지 나에게 만족을 주지는 못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냥 내 처지가 불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당시 내 모습을 기억하는 친구의 말에 의하면 학교에 오자마자 강의실에 누워 잠을 자고 숙제는 노트 한 장을 찢어서 이름만 써서 제출했고, 학교 행사나 모임에는 거의 참석하지 않았고 수업을 마치면 부리나케 집으로 갔다고 한다. 그러니 당연히 낙제점을 받았고, 별 소망이 없던 난 바로 학교를 휴학했다.
군대라도 가고 싶었으나 용기가 나질 않았다. 함께 지내시던 목사님이 유학을 가시는 터라 그 집에서도 살 수 없었다. 그즈음 형이 군에서 전역하여 돌아왔고 정말 친하지 않은 우리 형제는 동거를 시작했다. 처음 함께 살게 된 집은 부모님이 아시는 분이 관리하시는 4평 정도 되는 허름한 오피스텔이었다. 월세만 내고 지낼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나마도 부랑인 시설로 용도가 변경되면서 우리 형제는 그곳을 나오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부랑인들을 위한 시설로 변경되면서 우리가 부랑인이 된 것이다. 이틀의 말미를 두고 통지를 받은 터라 형과 나는 부랴부랴 집을 구하러 다녔다. 어렵게 구한 집이 보증금 200에 15만 원짜리 가건물 집이었다. 그래도 길에 나안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다행이라 생각했다. 방은 두 평남짓 했던 것 같다. 천장은 매우 낮았고, 작은 싱글침대 하나와 행거 하나를 놓고 나면 바닥에 한 사람정도 누울 수 있는 그런 집이었다. 그런 집에서 1년을 지냈다.
어찌 되었든 학교를 휴학하고 일단은 일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 일한 곳은 구로공구상가 단지 내에서 음식을 배달하는 일이었다. 고등학교 친구였던 두뽕이가 하고 있는 아르바이트였다. 난 타본 적도 없는 오토바이를 타고선 음식을 배달하기 시작했다. 첫날 음식도 쏟고 잘못 배달하기도 했지만 이내 익숙해져서 곧잘 하게 되었다. 아니 몇 주 되지 않아 오히려 다른 녀석들보다 잘하게 되었다. 단지 내 식당에 배달하는 친구들만 어림잡아 50명 정도였는데 다들 담배 피우고 요령을 피워가며 했지만 난 담배도 안 피고 친구도 없던 터라 땡땡이치지 않았기 때문에 배달도 빠르고 일도 많이 했다. 돈은 주급으로 받았기 때문에 제법 손에 잡히는 돈도 생겼다. 당시 다른 아르바이트에 비교해서 시급이 괜찮았었기 때문에 집세를 내고 먹고 살 생활은 가능했다. 간신히 적응하던 배달 알바였지만 비 오는 날 배달하고 돌아오는 길 주차장에서 물에 미끄러져 넘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그릇이 깨지고 약간의 찰과상과 타박상을 입었다. 날 보자마자 주인아주머니는 깨진 그릇과 넘어진 오토바이 걱정을 하셨다. 내가 다쳤는지 보다 아주머니에겐 그것들이 더 중요했던가 보다. 몸의 부상보다 마음의 부상이 더 컸던 나는 부상을 핑계 삼아 배달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었다. 뒤늦게 잡기는 하셨지만 미련 없이 그만두었다.
생계를 위한 정식적인 알바가 필요했다. 해서 형까지 발 벗고 내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아 나섰다. 형은 내가 교회일만 열심히 하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그런다고 밥이 나오거나 떡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평생을 통해 체득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렵게 형이 구해온 아르바이트는 등촌동에 있는 찹쌀떡 공장이었다. 알바를 구하는 일이 낯설었던 나는 형에 손에 이끌려 그 공장에 갔었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공장의 첫인상은 썩 좋지 않았다. 형이 돈 벌기 위해 동생을 공장에 취업시키는 그런 영화 같은 장면이었다. 첫인상과 다르게 공장에서의 반년은 재미있는 추억들로 가득하다. 공장에서의 작업은 단순 작업이어서 3급 정도 되는 정신지체 장애를 갖고 있는 형들이 함께 일을 했다. 아마 그 공장은 공단 같은 데서 장애인을 고용하고 인건비 지원을 받는 곳이었던 모양이다. 나이는 나보다 몇 살이나 많았던 형들과 난 친구처럼 지내며 재미있게 일을 했다, 포장일을 하시던 아주머니들도 날 이뻐해 주셨다. 매니저 형과 사장님도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똘똘한 나를 이뻐라 해 주셨다. 평시에는 유명 제과점에 들어가는 찹쌀떡을 만들다가 수능이 임박해서는 정말 많은 양의 찹쌀떡을 만드는 곳이었다. 수능이 다가오자 아르바이트도 주말, 야간 등 많이 일했다. 수능이 끝나고 계속 일해보자는 공장장님의 제안을 뒤로하고 추운 겨울 난 다시 백수가 되었다.
재미있는 건,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만난 정신지체 형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전공 공부가 다시 하고 싶어졌다. 막연하게 못되게 살아온 청소년기에 대한 반성으로 앞으로 착하게 살 수밖에 없을 것만 같았던 '사회복지'를 전공으로 정하고 대학교에 진학했던 나였다. 하지만, 이제야 그냥 돕는 수준이 아니라 함께 재미있을 수 있다는 경험이 나에겐 큰 경험의 재산이 되었다.
조금 용돈을 모아 놓긴 했지만 학교 복학은 여전히 쉽지 않은 문제였다. 등록금은 역시나 대출이었고, 여전히 통학거리는 멀었다. 주말에는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는 나로서는 알바는 교회생활을 못하게 하는 세속적인 무언가였다. 게다가 당시 청년예배가 토요일 오후에 있었는데 찬양인도를 하던 나로선 알바는 큰 시험거리였다. 우리 집 사정을 모르는 청년부 사람들은 나의 이런 고민을 알지 못했다. 알더라도 생계를 위한 알바에 찬양인도자가 진다는 건... 용납하지 않는 눈치였다. 나 스스로도 그런 굴레를 만들어 놨었던 것 같다. 혹시라도 내가 맡고 있는 교회사역이 자신들에게 돌아올 것이 부담이었던 분들도 있었을까? ^^;
교회를 다니지 않는 몇몇 친구들은 찬양인도, 교회생활과 생계를 위한 아르바이트를 놓고 고민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반면, 당시 수준에선 알바를 하겠노라 예배를 빠지는 행위는 믿음 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연약한 모습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럴수록 친구들은 교회에서만 사는 나를 무책임하게 여겼다.
어디에선가 지금도 생계형 알바로 인해 예배 생활이 어려운 청년들을 무자비하게 비판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지는 않길 바랄 뿐이다. 한편에선 간증을 하기도 한다. 교회일 열심히 했더니 하나님 장학금도 주시고, 용돈도 주시고, 먹을 것 입을 것 부족함 없이 채워 주시더라는... 나 역시도 그런 간증이 있다. 하지만, 나의 간증이 때로 믿음 약한 누군가의 시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때야 알 수 있었다. 간증은 정말 겸손하게 해야겠다.
그때부터 나의 가난의 책임은 내 선택이었다.
정말 돈이 필요했다면 난 교회를 빠져가면서도 알바를 해야 했다. 갖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이 더 간절했다면 그것을 위해서 난 열심히 돈을 벌었어야 했다. 그렇지 않고 알바를 하지 않음으로 인한 나의 물질적 결핍은 믿음에 따른 내 기회비용의 선택이었다. 나에겐 교회에 있는 것이 재밌는 취미였다. 다른 갖고 싶고, 하고 싶은 것들보다도 우선이었다. 어떤 비용을 들이는 것보다도 즐거운 놀이였다. 함께 하나님에 대해 궁금해하고 친해지는 것이 좋았다. 그런 이유로 가난의 불편은 스스로 감내할 수 있었다. 그때는 정말 그게 나의 즐거움이었고, 나에 맞는 훈련이라 생각했다. 놀랍게도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던 건 당시 필요로 하던 것들이 나에게 편리함은 주겠으나 근본적인 갈증을 해소해 주지는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어디서 나온 믿음이었는지 필요하면 기도하고 때에 가장 알맞게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했다. 그 소소한 경험들은 지금 내가 신뢰하는 하나님을 이해하는 큰 재산이 되었다.
하지만, 가난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주변에 불편을 주기도 하고 부담을 끼치기도 했다. 교회 공동체에서도 불편함은 있었다. 나의 물질적인 부족함을 본 누군가는 채워주고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내가 궁핍함으로 인해 불편하거나 부담스러웠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교회에서의 어떤 활동도 적잖은 돈이 필요했다. 매번 돈이 없어서 함께 활동하지 못하는 나는 스스로 분위기를 깨는 1등 선수라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소심해지기도 했다. 사실 스무 살의 나는 가난이란 것에 말처럼 의연하지 못했다. 친구들과 노는 일, 함께하는 문화생활에서도 심지어는 수련회나 사역을 위한 기본적인 자기 부담액 같은 것들도 항상 주변엔 부담을 주었다. 티라도 내지 않았어야 했는데 종종 나는 난 물질이 없으니 나를 빼고 진행하라는 식의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곤 했다. 물론 그 말을 하기까지 자존심이 많이 상하기도 했지만, 몇 번 받아들여지자 나는 본의 아니게 방어기제처럼 그런 태도를 사용하곤 했던 것 같다.
그런 나에 대한 부담으로 교회 형, 누나, 친구, 심지어는 동생들 까지도 본인들이 나의 비용을 기꺼이 부담해 주었었다. 한두 번은 감사함으로 받았지만 염치없음에 교회생활 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이 생긴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평소 나를 이뻐해 주시던 선생님께서 선물로 당시 유명 메이커 바지를 생일 선물로 사주셨다. 당연히 난 엄청 감사했고, 매우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그 옷을 입은 나를 본 몇몇 친구들은 그렇게 생각했었다고 한다.
'가난한 척하더니 메이커 바지 사입을 돈은 있구먼...'
난, 그 친구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던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가정에 불편을 끼치는 것이었다. 부모님의 사업실패, 근로능력이 없는 가족, 아픈 가족으로 인한 부양비용 등으로 개인이 아닌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처한 친구들이 있었다. 오히려 그 친구들이 경험하는 그 어려움에 비해 나의 그것은 배부른 소리였다. 가난으로 인해 나 한 사람만 배고픔을 경험하는 것이 아닌 상황이 있다. 나만 보고 있는 부양해야 할 가족들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채워 주어야 하는 대상이 생겼다는 것은 엄청난 삶의 무게가 된다. 당시에는 몰랐으나 결혼하여 아이를 낳은 지금 더욱 절실하게 느낀다. 그들은 자신의 신앙보다 불편한 삶에 대한 해결이 우선이었고, 사회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그들을 채워주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이들에게 신앙을 지키기 위한 표면적이고 일반적인 조건을 무조건 지키겠다 말하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이기적인 선택이 되는 것이었다. 월세를 함께 부담해야 하는데 교회 다닌다고 아르바이트도 안 하며 그 책임을 지지 않는 동생이 얼마나 얄미울까? 형의 입장에서는 그게 나였다. 하지만 종종 교회에선 말한다. 믿음의 차이라고...
아니다 이건 최선의 차이였다.
잠깐 딴소리지만, 어느 교회나 이런 고민하는 친구들이 있다. 때론 이것을 핑계 삼아 교회생활을 소홀히 하는 친구들이 있다. 생계를 위한 아르바이트와 유흥을 위한 아르바이트의 경계를 모호하게 표현하는 친구들도 있다. 최선을 다하는 신앙생활이라 말하면서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놀고 싶은 것을 다하고 최선이라 말한다. 이 또한 균형 있는 신앙생활은 아니다.
무조건 우선 교회로 들어오라는 가르침도 필요하지만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가 더 간절하다. 그리고 그런 가르침의 공간은 그들이 있는 그곳이 되어야 한다. 학교에서 그들의 어려움을 듣고 기도해 줄 수 있어야 하고, 직장에서도 그리 해야 한다. 청년들도 학생들도 심방이 필요하다. 가장 영향력이 센 그곳을 주님께 올려 드려야 한다.
내가 군대에 간 사이에 부모님은 조금 생활을 추스르셨다.
공공근로를 통해 무료급식을 하시던 일부터 무의탁 노인분들을 돌보시던 일까지... 정말 열심히 일하셨다. 비록 빚이 많긴 하지만, 십여 년이 지난 지금은 제법 모양도 많이 갖추셨다. 형도 직장을 구하고, 나름 열심히 살았다.
그렇다고 해서 제대하고 나서의 내 생활이 나아진 건 아니다. 여전히 나는 또 다른 부목사님 댁 방에 기생했고, 알바를 하진 않았다. 등록금은 대출이었고, 일주일에 2만 원 올라오는 용돈에 연명하며 살았다, 하지만, 지질한 테는 많이 벗은 듯했다. 그렇게 철이 들어갔나 보다. 역시나 주변엔 종종 부모님 병원비에 가족 생활비, 자신의 등록금을 고민하며 막중한 책임을 지고 사는 친구들이 있었다. 때마다 나의 엄살이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나의 가난은 가난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조금 불편한 정도...
이 평범한 수준의 가난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자랑할 것도 아니지만, 누구나 이런 평범한 가난을 잘 이겨내는 것 같진 않다.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제시하는 메시지는 돈이 최고이며, 돈만 있으면 불편하지 않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부자가 되어야 시간도 많이 생기고 물질도 많아 교회일을 더 열심히 할 수 있을 것이라 한다. 마치 대학 가면 신앙생활 열심히 할 거라고 그 열심을 보류했던 중고등부 시절과 마찬가지로 좋은 직장을 가지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할 것이라 생각하는 어리석음과도 같은 것이라 생각된다.
감사하게도 평범하지만 다소 불편하게 살 수 있는 은혜를 주셨나 보다. 때론 은사를 사모하는 것보다 은혜를 누리는 것이 훨씬 편할 때가 있다. 안타깝게도 적당히라는 말은 믿음의 삶에서 일반적이진 않은 것 같다. 그것을 배워가는 지금이 참 감사하다.
대화거리
1) 목사로 살아가면서 가장 어려운 점이 무엇인가?
2) 목사 자녀로 살아가면서 가장 어려운 점이 무엇인가?
3) 가인과 아벨 형제의 이야기에 대해 나누어보자.
4)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는 어떠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