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엄마의 멈추지 않은 여정

자기소개 3

by 어거스트

(전편에서 이어짐)


대학 졸업 후 입사한 첫 번째 직장은 엄청나게 재미있었고 (영화 의상, 잡지 화보, 패션쇼 등의 온갖 잡무 담당) 만만치 않게 힘들었다. 나는 엉덩이 붙이고 머리로 노력을 쏟아 성과를 내는 사람인데, 이 세계는 센스와 순발력으로 돌아가니, 내 적성에 맞지 않았다. 1년 만에 서둘러 첫 사회생활을 접고, 1년간 미국에서 쉰 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식품회사 마케팅실에 취업했다. 이때가 스물네 살.

나보다 6살 많은 대학 동문 선배가 자기 친구를 만나보라며 소개 시켜준 사람이 현재의 남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깝도록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어째서인지 '지금이 결혼 적령기'라는 어른들의 말을 철떡 같이 믿고 나를 결혼이라는 제도 안으로 내던졌다.

소개팅으로 포장된 맞선 이후 7개월째 되던 날에 예식장의 버진로드를 걸었고, 결혼과 동시에 임신 (게다가 쌍둥이), 둥이들 출산 이후 또다시 임신. 만 스물일곱에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내가 남편의 아내, 시부모님 손주손녀의 엄마가 되고 나니,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고 없는지에 대해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대부분 결혼식장에서의 인사 외에는 대화 한번 안 해본 분들, 소위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걸 생각하면 참으로 대단히 어이가 없는 일이지만, 어렸던 나는 그저 어쩔 줄 몰라하면서 상처를 받곤 했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었을까. 나의 사회생활을 강하게 뜯어말리는 사람들이 잔뜩 생겨나니, 내가 이것만은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는 오기 같은 게 생겼던 것 같다. 그 힘으로 7년을 더 버텼다.


2013년에 싱가포르의 아시아퍼시픽 본부에서 채용하고 싶다는 오퍼를 받았다. 거의 매일을 울다 시피하며 하루하루 버티던 나에게 싱가포르행은 간절한 탈출구가 되어 주었다. 한국의 시댁과 처음으로 분리된 생활을 하면서 나는 시부모님의 손자들을 낳은 사람에서 아이들의 엄마로 뒤늦게 제자리를 찾았다.

그렇게 또 3년 반이 지나니 이번에는 중국 상해에 가서 지사의 경영진으로 합류하거나, 네덜란스 암스테르담의 본사로 가서 아시아 비즈니스의 세일즈와 마케팅을 총괄하는 커머셜 디렉터를 해보란다. 화려한 조건을 내세운 상해 지사로 마음이 기울어가던 때, 친정아버지의 조언이 마음을 움직였다.

"이왕이면 본인들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믿는 유럽인들과 한번 부대껴 보는 게 어떻겠니. 그리고 그들의 역사와 문화적 토양 안에서 아이들을 기르는 게 아주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해서 네덜란드에 온 지도 7년이 넘어간다. 처음에는 "네덜란드에 오니 어떻습니까"라는 질문을 받곤 했는데 7년을 살았다고 하니 "네덜란드의 어떤 점이 좋아서 계속 살고 있습니까"로 질문이 바뀐다.

내가 네덜란드를 좋아하는 이유는

(1)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자유. 한국과 싱가포르에서는 나 자신과 내 역할 (엄마, 아내, 딸, 며느리, 회사 직원)의 경계가 모호했다면, 여기에서 나는 그냥 나 고원숙이다. 다른 사람에 대해 크게 관심 없는 개인주의, 남을 자기 잣대로 함부로 평가하지 않는 성숙한 시민의식 덕분인 듯하다.

(2) 항상 웃는 사람들. 운전하다 횡단보도에서 잠시 정차했을 뿐인데 길을 건너는 사람들과 자전거 탄 사람들이 환하게 웃으면서 손을 흔든다. 집 앞 정원을 손질하고 있으면 동네 사람들이 오가면서 말을 걸고 잠깐 수다를 떨다 가는 그런 곳이다. 사회 보장제도가 잘 되어 있어, 배관공이든 사무직 회사원이든 모두 좋은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는 환경이 사람들에게 넉넉한 마음을 품게 하는 것 같다.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놓으니, 듣고 있던 직원들 중에 특히 네덜란드인(더치) 직원들의 표정이 환해진다. 굳이 여기 겨울은 왜 그렇게 축축하고 긴지, 왜 이 나라에는 감자튀김과 치즈 외엔 먹을 것이 없는지 등의 불평은 생략하기로 한다.


To be continued...

keyword
이전 02화상냥하고 용감한 코리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