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차렷

신난 다람쥐

by 어거스트

요즘 내 회사 생활은 미로 속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는 실험실의 쥐새끼처럼 정신이 없었다. 매일 떨어지는 업무 폭탄, 멱살 잡고 흔드는 듯한 상사의 끊임없는 잔소리까지. 글로벌 기업의 본사 임원이라는 거창한 타이틀 아래 숨겨진 진실은, 그저 징징거리는 어른아이 한 명이었다. "대체 왜 이렇게 나만 들들 볶아!?"


그러던 어느 날, 스트레스성 두통과 함께 침대에 쓰러져 습관적으로 네이버 웹툰을 열었다. 나의 저녁 식사 후 하루를 마감해 주는 신성한 의식이다. 그날 픽한 웹툰 제목은 <신입사원 김철수>. 주인공도 아니고 심지어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조연이 부서 회의에서 꽤나 똑똑한 의견을 냈다. 그를 칭찬하는 임원에게 그가 말했다. "사실 지난 수년간 경영진에 건의했던 내용이에요. 그때 이걸 했더라면 지금 우리 회사는 훨씬 성장했겠죠".

정신이 번뜩 들었다. 평소엔 온갖 회의와 워크숍 무대에서 잘난 척 떠들어댔지만, 정작 회사의 진짜 문제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방향 제시를 했던 적이 있었나.


그 순간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한 장면이 딱 떠올랐다. 힘들다고 투덜거리는 앤디 (앤 해서웨이)의 미간을 선배 나이젤이 연필로 콕 누르며 던진 대사, "정신 차리세요. 미란다는 그냥 자기 일을 할 뿐이에요. 문제는 당신이라고." 마치 나이젤의 연필이 내 이마를 콕 찌른 듯했다.

Wake up, sweetheart. 정신 차려, 이 아가씨야.

출처: https://youtu.be/zJf-J5RXxw8?si=SPQGuEnUcC5RUgle



며칠 후, 위기가 닥쳤다. 회사의 중요 전략 회의에 해당 업무를 담당하던 부하 직원 메르트를 대신 참석시켰다. 나는 다른 미팅에 참석했는데 회의 시작과 동시에 상사의 불만 가득한 문자가 쏟아졌다.

'어디야, 왜 안 들어왔지?'

'지금 메르트가 하는 소리 뭔 소리인지 모르겠고, 하여튼 맘에 하나도 안 들어.'

예전 같으면 당황해 쫓아갔을 텐데, 일단 심호흡부터, 후…, 그리고 차가운 머리로 문자를 보냈다. "지금 중요한 업무 중이라 메르트가 대신 참석했습니다. 회의 후 전화드릴게요". 놀랍게도 상사는 더 이상 답이 없었다. 오.. 이게 먹히네?

회의 후 메르트가 급히 달려왔다. 그의 얼굴은 이미 영혼이 탈출한 듯 창백했다. "아주 난리였어요. 말을 좀 심하게 하시더라고요." 나는 긴장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며 앉아서 문제를 정리한 후 상사에게 간단한 문자를 보냈다. 굽신굽신 사과 따윈 하지 않았다.

'메르트에게 들어보니 두 가지 문제가 있었더군요. 첫째,... 둘째,... 타당한 지적이시고, 둘 다 해결 가능합니다. 다음 주에 보고 드리죠. 다른 게 더 있을까요?'

바로 답이 왔다. "고맙군. 그게 전부야."


이게 끝이면 좋았겠지만, 내 회사 생활의 난이도는 매일 새로운 레벨로 경신 중이다.

제품 개발 연구소에서 급한 연락이 왔다. 수년간 투자한 신제품 테스트가 어이없이 실패했고 이에 따라 제품 출시 일정을 9개월이나 미뤄야 한다고.

유럽 전역 주요 고객사에 이미 출시 공지가 나간 상황이라 연구소, 마케팅/세일즈, 광고 담당팀까지 아주 혼돈의 아수라장이 됐다. 내 직속 팀은 지은 죄도 없건만 앞으로 닥칠 일의 압박 때문인지 완전히 풀이 죽어버렸다. 내 마음도 짜증과 분노에 엉망이었지만 차갑게 진정하며 일단 이 소식을 내부 (팀, 유관 부서, 최고 경영진, 지역 -region 대표들) 그리고 외부 고객사에게 어떻게 알릴지 대응 계획을 세웠다. 상사에게 제출하니 말없이 수락했고, 지난 한 주간 하루하루 실행해 나가며 최고 경영진을 지나 금요일 지역 대표들과의 회의에서도 큰 혼란 없이 상황은 진정되었다.


결국 깨달음은 단순했다. 중요한 건 회사 일이지 나 개인의 기분이나 감정은 아니었다는 것. 어쩌면 회사 생활의 절반은 ‘차갑게 머리 식히기’만으로도 해결 가능할지 모른다.




나는 쫄보다. 내 타이틀 때문에 나랑 눈도 못 맞추는 회사 사람들을 보면 내가 더 어쩔 줄 몰라한다. 매일 아침 출근하기도 전에 퇴근부터 하고 싶고, 집에 와서 한식으로 차려낸 저녁을 먹고 나면 침대 속으로 뛰어들어 고양이 영상이나 웹툰을 보면서 낄낄거리는 그냥 그런 아줌마다.

하지만 이번 주를 지내면서 뭔가 조금 마음이 단단한 아줌마가 된 기분이랄까.


지난 몇 주간 상사와의 갈등(순전히 내 생각) 때문에 조금 서먹한 거리를 두었는데, 어제 금요일 오후엔 갑자기 '이 난리통에 그도 참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퇴근 직전 짧은 문자를 보냈다.


'굉장했던 한 주였네요. 변함없이 곁에서 지도와 지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솔직히 답장은 기대하지 않았는데, 잠시 후 의외의 메시지가 왔다.

'정말 바쁜 한 주였지. 좋은 리더십을 보여줘서 고맙네.'

오....


오늘 유튜브에서 우연히 본 조승연 작가의 영상에서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다. 흔히 직장 생활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 지겹고 반복적이라 말하지만, 실제로 쳇바퀴 도는 다람쥐는 놀랍도록 신나 보인다는 거다.

이거 약간 내 얘기도 될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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