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를 아십니까는 아닙니다만

by 어거스트

기차나 비행기를 탈 때마다 나는 아직도 옆자리 로망이 있다.

뭔가 근사한 사연이 있는 사람과의 운명적인 만남 같은 것.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은 없다.


몇 주 전, 추석을 앞두고 네덜란드에서 한국으로 가는 KLM 비행기 안.

옆자리에 휠체어를 타고 먼저 들어온 거구의 서양 할머니를 본 순간, 아... 오늘은 그냥 푹 자야겠다 싶었다.


이륙 후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그녀의 불편한 시선이 느껴졌다. 나처럼 발 받침대를 올리고 싶은데 버튼 작동이 잘 안 되는 것 같았다. 에고.. 그녀의 육중한 팔에 조작패드가 반쯤 묻혀있었다. 오지랖에 그녀의 팔을 살짝 들어 올려 작동법을 알려주었다.


그녀가 웃었다. "Perfect, thank you."


그렇게 소소한 대화가 시작되었다.

그녀는 스웨덴의 신경의학과 의사였다. 한국에는 학회 참석차 가는 길이라고 했다.


두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두었다는 공통점, 그리고 일과 가정을 오래 병행해 온 공통점 때문에 어쩐지 수다가 터져버렸다. 금세 그녀의 두 아들은 의사, 스웨덴 정부 공무원, 그녀의 딸은 변호사이며 사위는 노벨상 선정 위원이라는 점을 알게 되고 (와우. 엘리트 패밀리가 아닌가. 슈퍼 DNA. 서로 남편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안 했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자. ㅎ), 그녀가 가장 아낀다는 손주 녀석의 사진과 비디오를 보며 낄낄거리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식사를 마치고 잠시 쉬다가 내가 뜬금없이 물었다.

"what's life for you?" 당신에게 인생이란 뭔가요?

그녀는 미소를 짓더니 대답했다. "Finding your own joy." 너만의 즐거움을 찾는 것.


그리고 덧붙였다. 일과 가정도 중요하지만 자기 자신에게 크고 작은 선물을 자꾸만 해주는 걸 잊지 말라고.

그녀는 지팡이를 짚고서라도 혼자서 그리고 친구들과 끊임없이 여행을 다닌다고 했다.

"예쁜 걸 사 모으는 게 취미이지. 새로운 곳에 가는 것은 언제나 즐겁고."

그녀의 은발 머리 위에 살짝 얹혀있는 루이뷔통 로고의 벙거지 모자가 괜히 더 귀여워 보였다.


한국 학회는 추석 연휴 이후에 시작되지만, 일주일 먼저 가서 서울을 둘러볼 계획이라고 했다. 칠십이 훌쩍 넘어 보였지만 그녀의 말투엔 에너지가 넘쳤다.


한국적인 걸 경험하고 한국에서만 살 수 있는 것을 사고 싶다길래 국립중앙박물관의 기프트샵, 청계천 거리, DDP 동대문 디지털 플라자 등을 한글과 영어로 적어주었다. 사실 세 곳 다 나는 가본 적이 없다. 웁스.


우리는 이름과 이메일,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서로의 즐거운 추석을 기원하며 헤어졌다.


좋은 만남과 좋은 대화.




한국에 도착한 이튿날, 문득 한국 서점이 그리워 강남 교보문고에 갔다.

인문학 코너의 평대 건너편에서 유발 하라리의 넥서스를 들여다보는 모녀가 있었다.

딸은 서른쯤, 엄마는 오십 대 중반이려나. 서로 많이 닮았고, AI에 대해서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모습이 신선했다. 딸은 그렇다 치고, 어쩜 엄마가 저리도 지적일까. 혹시 교수님이나 작가는 아닐까. 나름대로 상상하면서 그 모녀가 옮겨가는 동선을 잠시 따라다녔다. 그들이 멈추면 나도 멈추고 주변의 책들을 괜히 뒤적거렸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떨어진 후 내가 원하는 책들을 몇 권 골라 계산을 마치고 나가려는데, 바로 앞에 혼자 서 있는 엄마가 보였다.

"두 분은 자매이신가요?" (어쩐지 툭 튀어나온 아부성 멘트)

"두 분이 함께 책을 고르는 모습이 참 보기 좋던데요." 내가 말을 걸었다.


"어머 아니에요. 그냥 딸이 책을 사러 간다기에 따라 나왔어요." 엄마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때 마침 딸이 계산을 마치고 우리 쪽을 돌아봤다.

나는 자연스럽게 이 모녀와 대화를 나눌 생각에 그녀를 보고 활짝 웃었다.

순간 그녀의 차가운 시선이 나를 휙 지나치고, 금세 그녀는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자기 엄마의 팔을 확 잡아채 뒤도 안 보고 출구 쪽으로 나가버렸다.

"어.. 저기..??"


하도 황당해서 화끈거리는 얼굴로 서점을 나왔다. 나중에 만난 친구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뒤집어지게 웃는다.

"야, 너 그거 '도를 아십니까..' 그건 줄 알았나 보다. ㅋㅋㅋㅋㅋ"




네덜란드에서는 모르는 사람도 눈만 마주치면 웃고 인사한다. 안녕. 좋은 하루.

우리나라에서는 눈이 마주치면 오해하는 건가? '도를 아십니까'로.


그러고 보니 처음 보는 나에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은 택기 기사 아저씨뿐이다. 그마저도 본인이 하고 싶은 정치 이야기, 정부 험담을 들어줄 사람으로 나를 이용하는 것이지만.


내 나라에 와서 이토록 외롭다니.

그래서일까. 자꾸만 아는 사람들을 찾아다니게 된다.

이십 년 넘게 다닌 피부과. 십 년 넘게 다닌 미용실.

그게 아니면 돈을 주고 친절을 산다. 호텔과 식당들. (아, 불친절을 살 때도 가끔 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헹.





(대문 이미지는 AI로 만들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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