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이라는 단어의 풀이는 무엇일까? 생물학적 정의 말고 동물이라는 한자를 여과 없이 풀이하자면 다음과 같다. 움직일(동), 사물(물), 즉, 움직이는 물체인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본다면 박혀 있는 식물에 대비되는 단어로 사용된다. 인간은 우선 다른 동물과 차별화된 이성을 갖고 세상의 문명을 만들어 낸 놀라운 지능이 있는 것이 이전에 움직이는 생물체로 분류된다.
인간 또한 움직이는 존재중 하나다. 사지를 움직이고 한자리에서 다른 자리로 이동을 해며, 움직임을 통해 무엇인가를 표현하고 나타내는 그런 생물체 중 하나다. 그렇다면 이런 움직임에 가장 원초적인 모습은 어디에서부터 나타나게 되는 것일까? 바로 기본은 생존에서부터 시작된다. 우선 인간은 생존을 위한 에너지를 스스로 만들어 내지 못한다. 동물이 식물과 다른 점이 바로 이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에너지를 찾고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에너지를 찾아다니는 것이다. 동물과 식물의 차이는 여기에서부터 시작이다. 의식하고 있지 않았지만, 생존을 위해 우리는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움직여야만 한다.
인류가 창조된 이후 인간은 살기 위해 움직였다. 수렵을 하려고 뛰어다니고 채집이라는 생존 법칙을 행하기 위해 먹을 것을 찾아 돌아다녀야 했다. 그리고 채집한 곳을 표시하거나 기억해서 다음 해에 또다시 찾아와야 생존을 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극한직업이 따로 없다. 시간이 흘러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뗀석기 돌질부터 철기시대 쟁기질 그 순간까지 움직임 그 자체는 생존의 핵심이었다. 또 목축에 맛(고기맛, 우유맛)을 들인 다음부터는 계절마다 소, 양, 말이 풀 뜯기 좋은 곳을 찾으며 돌아다녀야만 했다. 그래야 그들의 젖을 얻고 고기와 가죽을 걸치고 엄동설한에 똥(땔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생명의 위태로움 속에서 우리는 달려야 했고, 남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간은 또 달려야 했다. 그런데 동물과 달리 인간은 날카로운 발톱도, 당찬 눈빛과 시력도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달릴 수 있는 허벅지도 갖고 있지 않다. 또, 단숨에 멀리까지 날 수 있는 날개도 없다. 동물 중 유일하게 수영 못해 허우적 되는 것이 인간이라고 한다. 참으로 나약한 존재이지만 우리가 세상에 탑이 된 것은 바로 커다란 뇌 때문 아닐까.
우리가 덜 움직이고 조금 더 손쉽게 영양소를 취하게 된 것도 바로 커다랗고 무궁무진한 머리통 때문이다. 이런 문명의 발달은 편리성을 제공해 주는 대신 양날의 검처럼 우리가 걷고 달리고 움직이는 것을 방해한다. 가끔 너무도 넘치는 풍요로움과 평화는 사람이나 동물에게 게으름을 준다. 이러한 풍요의 결과는 늘 잉여 산물이 남게 되는데, 그게 벼 이삭의 나락이 될지, 그 밖의 물질이나 돈이 될지 아님 칼로리가 되어 인간 몸 구석구석 쌓이는 지방이 될지는 뻔한 결과이다.
구피를 키우고 있다. 그것도 막구피가 아닌 아름다운 자태를 뿜어내는 고정구피(알비노 풀레드 빅도살 종) 어항이라는 안전한 곳에서나 먹힐 빨간색에 드레스 같은 도살(지느러미)을 자랑하는 이놈들은 정기적으로 뿌려주는 먹이를 주워 먹으며 스스로 점프 사(死)나 병에 걸리지 않는 한 용궁에 갈 일이 없다. 먹이를 찾아 헤멜 필요도 없고 커다란 황소개구리 위험으로부터도 안전하다. 그래서인지 우아함은 있어도 날렵함은 어디에도 없다. 인간이 애완용으로 키운 이래로 영민한 움직임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그냥 발색 좋고 치어들만 잔뜩 생산하면 되는 것이다. 비 온 다음 어느 날 집 앞 왕숙천에서 야생의 작은 물고기를 잡은 적 있다. 눈을 크게 뜨고 쳐다봐야 겨우 보일 뻔한 무채색의 옷을 입고 있다. 야생 작은 물고기의 날렵함은 플라스틱 통이 너무도 이들에게 비좁았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쉴 새 없이 플라스틱 통을 움직이며 헤매었다. 이후 어항 속에 넣었지만 그곳도 왕숙천에 비하면 꽉 막힌 공간일 뿐이다. 인간에 손에 길들여지지 않은 이놈들은 어항 또한 너무도 작은 세계였다. 그날 나는 바로 그들이 살던 왕숙천으로 방사했다. 왕숙천 태생 작은 물고기가 살기에는 어항이라는 유리 속은 너무도 안전하고 좁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길들여진 고양이는 참 애교가 넘친다. 가정에서 키우기도 하지만 인간이 사는 곳곳에 귀신처럼 살아가며 야생성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고양이들이 주변에 참 많다. 근데 인간에 손에 보호받고 무한 먹이를 공급받는 놈들은 먹이를 헤멜 필요가 없다. 그리고 때가 되면 공급되는 사료와 육류 섭취는 오히려 고양이에게 잉여 산물을 제공해 준다. 가끔 늘어져 배만 볼록한 고양이를 보면 만화 토토로처럼 귀엽기도 하지만, 저놈처럼 팔자 좋은 놈은 없겠구나 부럽기도 하다. 반면 길고양이들은 늘 배고픔을 달래려 음식을 찾아 헤맨다. 그리고 인간의 위협과 작은 자극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며 두문불출하기 바쁘다. 그들의 날렵한 몸매는 바로 여기서 나온다.
우리가 태초에 그랬듯이 문명이라는 편리함 속에 인류는 공존하면 살았다. 하지만 이 편리함 뒤에는 움직임의 결여가 동반됨을 알아야 한다. 애초에 인류는 먹을 것을 찾아 헤매며 계속 움직이여한다. 왜냐면 애초에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지고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 의해서 말이다. 편리함을 누리는 만큼 우리는 의도적으로라도 움직여야 왕숙천의 날쌘 물고기와, 길고양이의 에스라인과 날렵함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구피와 배 뚱뚱 고양이도 좋지만, 티브이와 스마트폰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태초에 달리기가 있었듯이 조금은 내려놓고 작은 공원이나 아파트 둘레라도 걷고 뛰는 것이라도 해보자. 시작하는 자여 그대의 움직임의 끝은 뱃살 쏙으로 보답될 지어다.
태초에 날렵함을 갖는다는 것은 바로 생존과의 직결이었다. 그래서 현재도 육체의 편암한과 안락함도 생명과의 직결이다. 그래서 우리는 움직이고 달려야 한다. 최소한 우리의 노력으로 단명은 면하기 위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