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이성을 학교나 직장에서, 혹은 친구나 가족의 소개로 많이 만났다. 요즘은 동아리, 각종 모임, SNS나 데이팅 앱 등으로 만나는 경우가 흔해졌다. 얼마 전에는 한국의 한 사원(절)에서 미혼 남녀 간의 모임을 주최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만남의 방식이 다양해짐에 따라서 "우리는 온라인에서 만나서 결혼했어요" 혹은 "영어 회화 모임에서 만났어요"라는 말이 이제는 낯설지 않다. 그러나 이런 변화 속에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예측할 수 없는 특별한 만남’을 기대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여행지에서' 만나는 것은 이러한 기대감을 충족시켜 주는 하나의 방법이다. 특히 장기여행, 혼자 떠나는 배낭여행, 외국 체류에서 뜻밖의 인연을 만나 결혼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만약 여행지가 남들이 많이 가는 곳이 아니라, 여행자들이 뜸한 곳이라면 같은 한국인을 만났다는 것 자체가 반갑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상대와 친해질 수 있다. 이렇듯 여행은 단순한 휴식이나 관광을 넘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 통로로 작용한다.
내 고등학교 친구 A는 인도 배낭여행 중 혼자서 푸쉬카르라는 도시를 여행하다가 한 한국인 여성을 만났다. 타지에서 여행을 오랫동안 하면 한국말을 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 그들은 가이드북에 나오는 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다가 우연히 만났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같이 여행을 하였다. 하루 이틀 그러다 보니 어느새 일주일이 되었다. 두 사람은 짐을 함께 꾸리고, 기차표를 함께 사고, 숙소도 같이 알아보게 되었다. 또한 낯선 타지에서 생기는 수많은 변수들, 예를 들면 비 오는 날에 릭샤를 못 잡아 한참을 걷거나, 옷을 샀는데 바가지를 당한 경험 등이 그들을 마치 군대의 전우애처럼 끈끈한 정이 쌓이게 하였다. 한국에 만약에 계속 있었더라면 서로 사는 곳도 다르고 나이도 다르고, 공통점이 없어서 만날 일이 없었을 것이다. 낯선 공간이라는 장소가 인연을 맺어준 셈이다. 그들은 한국에 와서도 서로 연락을 자주 했고 마침내 3년 후 결혼을 하였다.
내가 아는 지인 B는 혼자 유럽 배낭여행을 하던 중, 어느 게스트하우스에서 같은 일정을 가진 한국 여행자를 만났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통성명을 하고 같이 밥을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동행하게 되었다. 함께 걷고, 함께 밥을 먹고, 사진을 찍으면서 며칠을 보냈다. 고작 4일에 불과했지만 그 시간은 그들에게 진한 감정을 남겼다. 5일째 서로의 일정이 달라 서로 헤어져야 할 시간에 그들은 '우리 한국에서 다시 연락해'라고 했다. 이후 각자 여행을 하고 한 달쯤 지났을까. 서로가 약속이라도 한 듯 문자를 보냈고 한국에서 만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길 위에서 잠시 스쳐간 인연으로 생각되었지만, 그 짧은 기간이 그들의 인연을 만들어준 셈이다.
첫 번째는 낯선 환경이 주는 감정적 친밀도의 증가다. 2024년 한 글로벌 여행 플랫폼 보고서에 따르면, “장기 여행 중에 만난 동행자와 ‘친밀한 관계’로 발전했다”는 응답이 27%에 달했다. 특히 20-30대 1인 여행객의 경우 3명 중 1명꼴로 여행지에서 ‘인연’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학계에서도 유사한 결과가 나온다. 미국 컬럼비아대 커뮤니케이션 연구팀은 낯선 환경에 함께 노출될 때 ‘공유된 신경 각성(Shared Arousal)’ 수준이 높아져 감정적 친밀도가 단기간에 급등한다고 설명한다.
두 번째는 사회적 가면을 벗어던지기 때문이다. 군대에 가면 서울대 졸업생이든 하버드 출신이든 모두 '어리바리한 이등병'이 된다. 익숙한 일상을 떠나 낯선 장소에 있을 때, 우리는 진짜 ‘나’에 가까워진다. 여행지에서도 그 사람의 직장, 사회적 위치, 배경 등을 벗겨버리고, '본연'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한다. 새롭고 낯선 환경에서는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고, 상대에게도 경계 없이 마음을 열 수 있는 환경이 된다. 특히 '함께 이동한다'라는 경험과 '같은 목적지를 향해 간다'라는 공통된 목적은 서로에 대한 신뢰를 빠르게 쌓게 한다. 같이 웃고 고생하고, 버스를 놓치기도 하는 등 추억을 공유하다 보면 어느새 한 두 번의 데이트보다도 훨씬 더 깊은 정서가 만들어진다.
세 번째는 기술의 발전이다. 예전에는 통신 기술이 부족했다. 여행지에서 만나도 서로 간에 연락할 방법이 드물었다. 만약 상대가 외국인인 경우 사실상 다시 만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지금은 각종 메신저, SNS 등 물리적 거리와 상관없이 실시간으로 상대방과 대화는 물론 무료로 전화까지 할 수 있다. '너와 나의 거리가 서울-부산의 10배인 4,000km'라고 하더라도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그 길이는 0에 가까워진다.
인공지능이 점점 발달하여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 답 중 하나는 '경험과 감정의 소비' 이다. 콘서트·전시회처럼 경험 활동이나, 동호회·사교모임처럼 감정을 나누는 활동이 더 중요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바로 여행이 있다. 여행은 이 두가지를 충족시켜 주는 교집합의 역할을 한다.
앞으로의 여행은 단순히 유명 관광지를 둘러보거나 휴양을 즐기는 것이 아닐 것이다. 문화 체험, 새로운 만남 등 다양한 활동들과 접목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다보면 길 위에서 스쳐간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함께 식사를 하고, 같은 길을 걷는 일도 많아질 것이며, 예기치 못한 감정이 싹틀 수도 있다. 그 과정에서 자신도 몰랐던 내면을 알 수 있고 상대방과의 깊은 감정 교류도 할 수 있다.
인연은 어느 날 불쑥, 아주 자연스럽게 시작되기도 한다. 그것은 갑자기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어색하지 않고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사람처럼 친밀감 있게 다가온다. 만약 당신이 다음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면,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주변을 둘려보는 것은 어떨까. 당신의 이야기가 시작될 다음 정거장은 어디일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그 여정의 끝에 어떤 인연이 기다릴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