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진 대화 속, 나는 아이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줄 수 있을까?
선거철이다. 오늘과 내일은 사전투표일이고,
오는 6월 3일이면 이 혼란한 흐름도 마무리된다.
생각이 갈라지고, 말들이 뾰족해지는 시기.
나는 이 시기에 그저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나와 세상을 사는 가치관의 방향이 많이 다른 엄마의 일방적인 카톡메세지 때문이다. 생각을 강요하는 것 같아 힘들다고 몇번이나 이야기했지만, 정치적인 이슈가 터지거나 선거철만 되면 다시 시작하신다. 가족 단체카톡방에는 나와 생각이 다른 엄마의 유튜브 링크전송이 하루에도 몇번씩 울려대고, 안부전화를 드리면 인사 끝에 “몇번 찍어라~ 누구 찍어라~”라고 하신다.
엄마의 정치적 권유는 늘 반복되었다. 20대, 투표를 처음 하던 시절. 정치엔 무관심했고, 이유도 모른 채 부모가 알려준 번호에 도장을 찍었다.
그렇게 말해주셨다면 어땠을까.
서로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이. 생각하는 가치관과 방향이 다르다는 것이 서로에게 뾰족하고 날카로운 판단으로 귀결되지 않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것일까?
적어도 나는 나의 아들딸에게 이런 무거운 짐을 주고싶지 않다. 하지만, 내가 자라온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내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 자신이 속하고 뿌리내렸던 땅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토양에서 열매맺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이런 회의적인 생각과 헛되어 보이는 다짐이 머리속에서 씨름하길 반복하고 있다.
열정적인 신념은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동기를 자극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하지만 핵심은 그런 신념을 ‘가볍게 붙들고 있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가 틀렸다는 증거를 마주할 때
스스로를 바보처럼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신념을 포기할 수 있다.
(<광장의 오염>, 65p)
내가 바라는 늙은 엄마의 모습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자녀들의 말을 귀기울여 듣고 많은 것을 배워가는 어른의 모습이다. 나와 생각의 방향성이 다르더라도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들어보고 싶고, 또 엄마가 자신의 말을 들어줄 것을 알기에 편하게 이야기 건네는 아들과 딸이 되길 간절하게 바란다.
이제는 안부전화를 거는 것도 망설여진다.
일방적인 메시지 속 목소리가 두려워진 내 모습.
그 모습을, 나는 내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다.
조용히, 단단하게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