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육아에서 멀어진 평범한 엄마의 기록
엄마가 된 나의 컨디션은 아침에 결정된다. 아침에 일어나서 8시 40분까지. 이 한시간 가량의 시간 동안 아이에게 화를 내지 않는 날은 최상의 하루가 되고, 화를 참으면서 표출하면 적당한 하루, 내 화에 휘둘리면서 소리를 지르게 되는 날은 최악의 하루가 된다.
“아이가 유독 기분이 안좋아 보일 때가 있어요.
알고보면 집에서 엄마한테 많이 혼나고 온 날에 그렇게 침울해하더라구요.
될 수 있으면 아침에는 좋은 기분으로 올 수 있도록 해주세요~
라는 말을 어디선가 듣고나서, “나의 기분보다 중요한 아이의 하루”라는 메모도 써놓고 아침마다 이를 악 물고 답답한 아이의 행동을 지켜보곤 한다.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하면 안되는 것은 ‘감정적으로 화내지 않기’ 라고 한다. 훈육을 위해서는 사실에 대한 이야기만 해야지, 감정에 휘둘리면 안된다는 말이다.
또한 육아를 하면서 가장 어려운 것도 ‘화내지 않는 것’이다. 최근 유행하는 숏츠 중에서도 “아이에게 화내지 않기 0일차, 0분째,” 컨텐츠를 본 적 있을 것이다.
바로 ‘죄책감’,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이상향에 닿지 않는 자신을 인지했을 때 오는 ‘절망감’이다. 지금 시대엔 ‘몰라서 못 키우는 엄마’는 거의 없을 것이다. 잘 하고 싶은데 그렇지 못할 때 화살은 다시 아이에게 향한다. 악순환이 이어지는 것이다.
화를 잘 내는 내 모습도 그냥 인정하고, 나의 약한 모습을 아이에게 드러내게 될 때도 솔직하게 설명해주면 아이와의 관계에도 도움이 된다. 엄마의 부족한 모습을 보여준다 하여 아이가 엄마를 무시하는 일은 없다.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엄마가 힘든 날도 있고, 그럼에도 자신을 사랑하려 노력한다는 것을 알게 될 뿐이다. 사랑받는 것을 당연히 여기면서도, 그 사랑이 가벼운 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것은 감정의 소중함을 배우는 일환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하교하는 시간이 다가올 때. 둘째 하원 시간이 다가올 때. 아침식사를 준비하다가 아이들을 깨워야 하는 시간이 다가올 때. 나는 항상 긴장한다. 너무 얕고 좁은 인내심을 갖고 있는 나의 마음을 비우고 또 비워내며 아이들의 감정을 오롯이 받아낼 수 있기 위해 준비한다.
아이를 낳고 무엇을 배웠나요?
나는 말하지 못하는 게 어떤 건지를 배웠다.
“애들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아.” (…)
“하지만 애는 내 삶을 망가뜨려.” (…)
두번째 문장은 첫 번째 문장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일관성이 있었다.
우리가 양가성을 더욱 잘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양가성을 받아들이는 능력, 그것이 바로 모성애가 아닐까.
"엄마는 늘 우리를 사랑해야 한다고 느끼셨던 것 같아요.
하지만 한시도 빠짐없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관계란 없어요.”
(<분노와 애정>, 도리스 레싱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