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존중감
'어이구, 네가 그럼 그렇지.'
아버지가 자주 내뱉던 말씀이셨다. 우리 부모님은 퍽 독설가셨다. 칭찬은 아꼈고 비난에 관대했다. 형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무언가를 해내는 것은 의외의 일이고 어떤 일을 망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렇게 그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했던가? 뭐, 굳이 새삼스럽게 신세한탄이나 부모님을 원망하려는 의도는 아니고 그냥 문득 '과연 나는 나 스스로를 믿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단 가정뿐만 아니라 계약직으로 일하다 보면 자존감에 스크래치가 생기고 구겨지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얼굴에 주홍글씨로 '계약직'이라고 낙인찍어 다니지 않기에 사내에서 업무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은 대개 친절하다. 그리고 호의적이다. 계약직인걸 알기 전까지는. 두 번 정도 비슷한 일화가 있는데, 업무차 본부나 다른 지점으로 출장을 가는 경우가 있다. 업무 때문에 만난 사람들은 처음엔 표정이 밝고 굉장한 호감을 느낀 듯 보인다. 그러나 내 신분을 밝히면 그들의 표정은 갑자기 굳어진다. 벌레라도 본 건가? 물론 그들이 당황해서일 수도 있고, 괜한 자격지심으로 스스로 그렇게 느낀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세상에 100프로는 없지 않은가. 그들의 본심에도 계약직이라는 신분을 홀대하는 자세가 분명히 녹아 있다. 그들에겐 동기라는 것이 있고 기수가 있고 그래서 비교적 연대가 강한 편인 듯싶다. 그쪽에 서지 못하면 조금은 후진 사람이 되고 만다. 적어도 내가 후진 사람이라고 생각하게끔 만든다.
그런 시선에 나는 왜 상처 받을까? 그건 아마도 나 역시도 그들처럼 나를 그렇게 여겼기 때문이 아니었나. 그들의 생각은 그들의 것이고 그들의 자유이며 그들의 권리이다. 하여 나는 그들을 처벌할 수 없고 그것을 바꿀 자유가 없다. 하지만 그 생각에 휘둘릴 필요도 없다. 20대에 나는 소위 스스로를 긁지 않은 복권이라 생각하며 같은 계약직 신분이어도 정규직에도 꿀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불쌍하게 여겼다. 매일 야근에,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그들의 여생은 여전히 그런 것이겠구나 싶은 생각과 나는 2년 뒤 여기를 벗어나 더 많은 것을 경험하고 더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게 20대의 객기에 가까운 패기라면 패기이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리저리 고꾸라지고 백수로 짧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다시 계약직으로 입사했을 땐, 젊음도 시들했고 복권도 구겨져 휴지조각이 된 것만 같았다. 내게 남은 생은 매일 야근에 시달리고 스트레스 값을 받으며 연명하는 그들의 것보다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 20대를 실패로만 가득 채운 30대의 자존감은 급격히 추락했고 쉬이 회복되지 않았다. 그래서 타인이 나를 딱하게, 혹은 한심하게 보는 시선은 나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불신이 더해져 더 아프고 더 날카롭게 나를 할퀴었다.
우습게도 그런 내 자존감을 회복하는데 도움이 된 것도 계약직으로 입사한 덕분이다. 얼핏 이해가 어려울 수 있지만, 최소한의 생계를 해결하고 나니 다시 새로운 꿈을 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다시 꿈을 꾼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본질인지도 모르겠다. 허황된 꿈이 아닌, 이룰 수 있는 꿈이라 생각될 때, 나를 진심으로 믿을 때, 더 이상 타인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는다. 사실 나를 찌른 건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내가 나를 불신하는 그릇된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남이, 심지어 내 가족마저 나를 믿지 않아도 적어도 나는 나 자신을 믿어줘야 한다. 그 믿음이 없으면 결국 나는 타인의 믿음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나는 나를 얼마나 믿어주는가? 나는 나를 끝까지 믿는다. 더디더라도 나는 매일 조금씩 더 나은 사람이 된다. 실제로도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기 위해 이 과정을 조금 더 즐기기로 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한다고 해도 덜 실망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은 일이 실은 내 인생을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일은 내게 가장 좋은 쪽으로 흘러간다. 이 깨달음은 많이 도전하고 깨지고 다시 일어선 자 만이 알 수 있다. 아픔도, 시련도 필요했기 때문에 일어났을 뿐이다. 그저 나는 나를 믿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