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생각은 넣어 둬
네 생각대로 살지 않을 거니까
살면서 위축되고 초라해질 때가 몇 번이 있었다. 20대 때 나는 꿈이 있었고 그 꿈을 위해 노력하며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계약직으로 일하면서. 어쨌든 그때, 독립할 필요성이 있었고 작은 원룸을 얻기 위해 부동산 중개소가 아닌 은행으로 향했다. 2년 계약직. 계약기간이 1년도 남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대출 상담 직원은 고심하며 나를 한참을 바라봤다.
얼마를 빌리려고 했는지 정확히 기억도 나지 않는다. 다만 그 돈을 당연히 빌릴 수 있을 거라 너무나 찰떡같이 믿었던 내가 떠오를 뿐. 해맑게도. 왜냐하면 그 자금은 전세금 용도였고 방을 빼면 고스란히 은행에 갚을 돈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계약직 월급으로 이자를 꼬박꼬박 낼 의지와 능력도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는데 그에게는 그렇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불편한 얼굴로 나를 빤하게 보던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계약이 끝나면 정규직으로 전환되나요?"
"...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다시 나를 빤히 보는 그의 얼굴 때문인지 긴장감이 감돌았다.
"아무래도... 대출은 안 될 것 같습니다."
"아... 네." 하고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전세금을 손에 쥘 목적으로 위풍당당하게 은행 문을 들어서던 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금방이라도 쪼그라들 것 같은 불판 위에 마른오징어의 모습을 한 채로 은행을 나섰다. 내 사회적 위치가 거기까지인 거구나 제대로 느낀 경험이었다. 어쩌면 그때가 번듯한 직장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각인된 날이 아닐까 싶다. 실망감, 좌절감, 패배감... 또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리 큰돈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 돈도 못 빌리는 나 자신이 조금은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독립을 할 수 없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의 첫 독립은 성공했다. 지인 도움으로 다른 은행에서 조금은 비싼 이율이지만 대출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자도 한 번 연체하지 않고 조기 상환까지 하며 신용도를 조금 더 쌓았다. 처음 대출을 거절했던 그 직원을 원망하진 않는다. 지금 내가 남들에게 비치는 위치는 그냥 팩트일 뿐이니까. 심지어 그는 실적이 급했는지 며칠 후 연락이 와서 대출 해결했는지 묻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그 경험이 마지막은 아니었다. 전세금 대출 시 같은 일을 또 한 번 겪기도 했고 돈을 빌리지 않더라도 타인의 시선으로 상처를 받은 적은 종종 있다. 누군가는 내게 '별 볼일 없는 인생'이라고 폄하하기도 했고 또 다른 이는 있지도 않은 남자 친구까지 만들어 주며 '무기직끼리 결혼해서 그 월급으로 살 수 있겠냐'라고 묻기까지 했다. 이들은 분명 무례하고 예의 없지만 굳이 화를 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내성이 생겨서인지 처음 대출을 거절받았을 때만큼 패배감이 들지도 않았다.
왜냐고? 그건 내가 절대로 그렇게 살 생각이 없으니까. 다른 사람이 날 어떻게 보든 그건 그저 그의 것이고, 내가 그 생각대로 움직여 줄 필요도 없으며 저렇게 무례한 사람에게 화를 내는 것조차 내 에너지가 아깝다. 그리고 정말 격이 높은 사람들은 저렇게 남을 깎아내리지 않는다. 바보에게 바보라고 놀림받는다고 화를 낼 바보는 세상천지에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