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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Feb 25. 2018

고마워요 돈키호테

삶을 바꿔준 한 문장

 장르 구별 없이 책이라면 가리지 않고 잡식하는 편이라 나는 책을 추천해달라는 부탁을 사람들로부터 자주 받는다. 그 사람의 분위기 그리고 관심사 등을 면밀히 살펴보고 책을 골라주는 친절한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내게 좋았던 책을 무심하게 골라 추천이란 이름표를 붙여 건네준다. 다만, 매력이 또렷한 책들이어서 그런지 나의 책 추천은 자주 성공하는 편이다. 그렇게 몇 권의 책을 추천해주고 읽은 후의 감상을 주제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면 읽었던 책 중에서 좋아하는 문장들은 어떤 것이 있냐는 질문을 받게 된다. 나는 답변으로 최근에 즐겁게 읽은 책의 신선한 문장을 꺼내기도 하지만 매번 이야기하는 책 속의 문장들은 거의 정해져 있다. 
  
 내 기억에 남는 책 속의 문장은 힘들었던 시기의 나를 다독여주고 응원해준 것들이다. 읽는 행위를 통해 느끼는 감동과 인상은 그때의 내가 처한 심리적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걱정과 고민이 없던 시절에 읽은 기형도의 시는 우울한 독백이었지만 앞날에 대한 고민과 불안으로 끙끙 앓던 20대 중반. 다시 접한 기형도의 문장은 내게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이정표와도 같았다. 뜻하지 않게 접한 책 속의 한 줄이 주는 뜨거운 감동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쉽게 식지 않는다. 삶에 대한 회의감이 가득했던 20대에 접한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는 먹먹함과 아련함으로 내게 위로를 건네줬다. 불안한 미래를 걱정하며 읽었던 시집 황금빛 모서리는 내가 삶의 불안을 느낄 때마다 꺼내 보는 처방전과도 같은 책으로 남았다. 
  
 내 인생을 관통하고 있는 가장 강렬한 한 문장은 돈키호테에서 읽은 것이다.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고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하며,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고 가슴에는 닿을 수 없는 저 밤하늘의 별을 품자." 처음 이 구절을 접한 것은 고등학생 때였다. 수동적으로 풀던 문제집 중간에 적혀 있던 글이었다. 어린 나는 불가능에 맞선다는 의지가 멋있게 느껴져서 노트에 이 문장을 옮겨 적었다. 좌우명을 삼아도 좋겠다고 생각해서 외우고 다녔지만 고등학생이면 다 그렇듯 수능의 압박감에 쫓겨 잊어버리고 살았다. 그래서였을까 시간이 지나 대학생이 되어 돈키호테 속에서 다시 이 문장을 발견했을 때 나는 지난 시절을 떠올리며 묘한 반가움에 젖었었다. 다만 조금 시간이 흘러서 인지 글 속에 표현된 강인한 신념이 주는 인상이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고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문장을 잊어버렸다. 
  
 사는 게 바빴고 뭘 해야 할지 몰라 매일매일이 갑갑했던 20대였던 나는 20대 중반을 앞에 두고 조용한 방황을 하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일을 업으로 삼겠다고 다짐했지만 자신감이 부족했고 먹고사는 일의 걱정이 늘 가슴을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늦은 밤 집에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또다시 돈키호테의 문장을 만났다. 라디오 진행자의 익숙한 목소리에 실린 그 오래된 구절은 이전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불가능해 보이는 도전을 시작함에 있어서 망설임이 없는 신념을 품은 문장의 감동이 가슴속으로 밀려들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돈키호테와 같은 상황이라는 것을 알았다.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돌진해야 하는 나와 그가 꼭 닮은 인물이라는 것에 느낀 동질감. 멋대로 흘러가던 정처 없는 내 삶은 그때 처음으로 또렷한 목적지를 정할 수 있게 되었다. 
  
 돈키호테 속 한 문장으로 인해 나는 목적지 없이 흘러가던 시간을 제대로 붙잡을 수 있었다. 물론 그 후로 나의 삶이 갑작스러운 변화와 발전을 통해 눈부시게 성장한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도전을 계속하고 있고 지나간 20대는 분명 득 보다 실이 많았다. 다만 그때 그 버스 안에서 라디오로 접한 그 한 문장이 없었다면 나는 더 많은 시간을 낭비한 채 어쩌면 지금과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오래된 책 속의 문장이 가져다준 작은 떨림이 삶을 변화시킬 깊은 울림으로 이어질 수 있었음에 나는 감사하다. 방황하던 나를 붙잡아줬다는 점에서 그리고 때때로 내가 나약해질 때면 또렷한 초심을 되새기게 해 준다는 점에서 돈키호테는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문장을 품은 책이다. 
  
 지금보다 좀 더 나이가 들어서 다시 돈키호테를 읽는다면 조용한 방황에 마침표를 찍어준 소중한 문장이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 같다.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고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하며 견디지 못할 고통을 감내하는 삶을 살겠다는 돈키호테를 보며 내일의 나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불가능에 도전하는 신념을 찬양하며 계속해서 인생의 도전을 계속해나갈지 아니면 현실의 벽 아래 안주하는 소시민이 될 것인지 더 이상 나는 고민하지 않는다. 불안한 현실을 살면서 나는 여전히 불가능한 꿈에 도전하고 있다.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돈키호테 속 오래된 구절을 접했을 때 도전하고 싶은 새로운 꿈을 떠올릴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짧은 문장이나 한 권의 책이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을 만큼 위대한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삶을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는 글은 인간이 지닌 변화의 힘을 사용하게 만드는 촉매의 역할을 한다. 현실과 맞서 나는 많은 것들을 소모하고 있다. 기회는 지나가고 젊음은 시들어간다. 그러나 아직 읽지 않은 수많은 문장들 속에 개봉되지 않은 희망이 잠들어 있다. 삶을 새롭게 변화시킬 그런 가능성들을 찾아서 나는 계속 책을 읽는다. 그리고 나도 그런 희망을 줄 수 있는 글을 쓰는 작가로 남고 싶다. 읽으면서 힘을 얻고 쓰면서 꿈을 꾼다. 지금까지 그랬듯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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