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은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견뎌내는 것
점심을 먹고 도서관에 가려고 가방을 메고 밖으로 나왔다. 겨울이라고 믿을 수 없는 따뜻한 날씨였다. 김동률의 신곡을 들으면서 느긋하게 걷다 문득 하늘에 눈길이 닿았다. 찻잔 위로 퍼지는 커피의 크레마처럼 부드러운 실구름이 보였다. 그 위로 작은 점 하나가 커다란 원을 그리고 있었다. 비둘기나 까마귀보다 훨씬 큰 날개를 가진 수리였다. 바람을 타고 멋지게 하늘 위를 날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날갯짓 한 번 하지 않고 여유롭게 비행하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수리가 지나가는 궤적을 따라 고개를 움직였다.
바람에 저항하지 않고 몸을 맡긴 채 유영하면서 수리는 꼬리날개로 동심원을 그렸다. 하늘에 보이지 않는 점을 찍고 도는 컴퍼스처럼 완벽한 원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원심력을 이용해서 순식간에 속도를 내며 방향을 바꿨다. 완만한 곡선은 자연스럽게 직선으로 이어지며 파란 하늘을 가르는 시원한 궤적을 만들었다. 수리는 점점 작아지다 이내 까만 점이 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더 멀리 가기 위해 수리는 바람을 이용했다. 맞서거나 피하지 않고 흐름에 몸을 맡겼다. 바람 부는 방향으로 천천히 몸을 틀어서 바람과 나란히 날았다. 거센 유속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 속으로 녹아들어 가 동력으로 삼았다.
수리는 빙글빙글 제자리를 돌면서 때를 기다렸다. 조급해하지 않고 느긋하게 하늘을 돌면서 바람을 읽었다. 계속해서 같은 구간을 반복해서 돌고 있었지만 결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원을 그리는 동안 작은 새 몇 마리는 수리를 추월해서 날아갔다. 차이가 점점 더 벌어졌지만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수리는 바람을 타고 아주 느리게 윤무를 추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얇은 띠처럼 흐르던 구름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 수리는 망설임 없이 원을 벗어나 쏜살같이 푸른 창공 저편으로 날아갔다. 익숙한 궤적을 벗어나 오로지 앞만 보고 질주했다. 앞서 있던 작은 새들을 순식간에 추월하면서 별처럼 작은 점이 됐다.
강한 바람이 날개를 밀어 올리는 순간 수리는 망설이지 않았다. 주변을 지나는 새들의 뒷모습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바람 속에서 치고 나갈 때를 묵묵히 기다렸다. 그 모습은 내게 큰 감동을 줬다. 목표를 향해 달리는 과정은 낭만이 없다. 극적인 반전이나 천재일우의 기회는 평범한 인생에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사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나를 앞서 지나간다. 저만치 벌어진 간격을 보면 불안해진다. 그러나 무의미한 삶은 없다. 착실하게 쌓인 경험은 기회를 만든다. 그리고 기회는 기회를 낳는다. 바람을 맞으며 때를 기다리는 동안 수리는 쉬지 않고 원을 그렸다. 폭발적인 추진력은 반복을 통해 누적된 원심력에서 온다. 삶도 똑같다. 시간은 의미 없이 흐르지 않는다.
똑같은 모양으로 원을 그리는 동안 수리는 목적지만을 생각했을 것이다. 사람도 똑같다. 목표를 정하고 나면 일정하고 꾸준하게 반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목표는 삶을 이끄는 원동력이라면 반복은 원동력을 강화하는 추진력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쉽게 동력을 상실한다. 남보다 늦는다는 강박과 뒤처지면 안 된다는 불안 때문에 조급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조급하면 더 빨리 지칠 수밖에 없다. 출발선에서는 결승점이 보이지 않는다. 삶은 100m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42km가 넘는 장기전이다. 호흡을 가다듬고 체력을 안배하는 태도를 가지고 꾸준히 나아가는 것이 핵심이다. 남의 뒤꽁무니 말고 내 앞에 놓인 길을 보고 나아가야 한다.
온 세상을 생명으로 물들이는 봄은 작은 가지에 돋아난 새순으로부터 시작된다. 시작은 누구나 초라하다. 처음부터 화려한 꽃을 다는 식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지루한 반복을 계속하다 보면 목적의식이 희미해질 때가 있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은 겨울도 끝이 있다. 때가 되면 얼음을 깨고 풀이 돋아나고 눈을 녹이고 꽃이 고개를 든다. 한파가 몰아치는 혹한기를 견디고 나면 추위는 점점 누그러지기 시작한다. 시련은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견뎌내는 것이다. 일상을 반복하면서 하루를 버티다 보면 살아남는다. 그런 매일이 모이면 인간은 성장하게 된다. 의미 없는 반복은 없다. 커다란 원을 그리면서 때를 기다리는 수리처럼 견디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