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 익숙해지는 법은 없다. 나이가 들어도 상처에서 비롯되는 통증은 똑같이 아프다. 입에 달고 사는 괜찮다는 표현은 사실과 반대일 때가 많다. 힘들고 괴롭지만 어른이라 겉으로 티를 내지 않을 뿐이다. 다들 그냥 덮어놓고 산다. 바쁘게 살다 보면 다 괜찮아진다고 여긴다. 하지만 저절로 치유되는 상처는 없다. 시간은 약이지만 치료제보다는 진통제에 가깝다. 날카로운 감각이 희미해질 때까지 놔둔다. 정말 다 나은 것일까 아니면 그저 무뎌진 것일까?
시간이 흐르면 해결된다고 생각하지만 통증은 사라지지 않고 누적된다. 물살을 맞으면서 깎여나간 바위가 모래가 되는 것처럼 고통은 내면 깊은 곳에 퇴적된다. 세월을 진통제 삼아 마구 삼키다 보면 예고 없이 부작용이 찾아온다. 마음의 내구도는 한계가 있다. 적재된 하중이 기준을 초과하면 구조물이 무너지듯이 마음도 마찬가지다. 심리적인 지지대가 붕괴되면 삶은 구심점을 잃어버리게 된다. 늘 그랬던 것처럼 훌훌 털고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무너지면서 쏟아져 나온 허무한 감정은 어두운 색으로 일상을 물들인다. 한 번 물든 마음은 본래의 빛깔로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지칠 때 조용하게 무력감이 찾아온다. 무기력한 상태를 벗어나려고 노력해도 소용은 없다. 늪에 빠진 것처럼 발버둥 칠수록 더 깊이 빠져든다. 지친 몸과 마음을 무너뜨리는 피로감은 우울감으로 이어진다. 꼬리를 무는 복잡한 감정의 고리는 풀기 힘든 매듭이 되어 단단한 응어리가 됐다.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가늠하기 힘들다.
괜찮다고 대답할 때마다 정말 괜찮았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속으로는 늘 외롭거나 괴로웠다. 마음은 근육이 없다. 인간은 고통을 감내하고 시련을 견디면서 성장하지 않는다. 그냥 조금 익숙해지는 것뿐이다. 겉으로 티를 내지 않으면서 남들처럼 행동하려고 애쓴다. 어른이라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덩치만 커졌을 뿐 아픔은 사라지지 않고 고스란히 내면에 남는다. 괜찮다고 말하지만 진짜 괜찮은 사람은 없다. 고통에 면역인 인간은 평범한 어른이 아니라 위대한 성인이다. 현실이 아니라 경전 속에서나 볼 수 있다.
크고 작은 손상이 누적되면서 몸이 망가지는 것처럼 마음도 똑같다.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넘긴 순간들이 많았다.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은 어리석은 착각이었다. 아프고 외롭고 괴로운 순간마다 비명을 지르는 자신을 외면했다. 유별나게 굴지 말자고 다들 이렇게 산다고 무심하게 내면의 외침을 무시했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내가 나를 몰아세웠다.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한 인간이 되면서 삶은 괴로워졌다. 어느새 가슴에 붙어있는 어른이라는 이름표는 작고 초라하게 변해버렸다.
시간이 지나면 상처는 흉터로 변한다. 통증은 사라지더라도 고통스러운 기억은 그대로 남아있다. 상처는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덮어두는 것에 가깝다. 오래된 기억들이 갑자기 파도처럼 밀려들어왔다. 회한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가슴 깊은 곳에서 비명소리가 들릴 때마다 외면하고 등을 돌렸다. 다 지난 일이라 이제 괜찮아졌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머리와 가슴은 서로 다르게 작동한다. 시간은 진통제일 뿐 치료제가 아니다.